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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8)화 (18/214)

18화 

대화를 다 마치자, 눈물을 훔치며 아이린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 하려고?”

“짐 싸야죠.”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소녀는 열의를 불태웠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배를 채우는 게 먼저였다.

록사나 자신이야 입맛이 없으니 안 먹어도 그만이었다. 그런데 만약 록사나가 저녁 생각이 없다고 한다면 아이린도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버틸 것이 뻔했다.

아이린이 어릴 적 거리 생활로 인해 아무리 배고픔에는 이골이 났다고 하지만, 먹을 게 넘쳐나는 공작가에서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었다.

한창 성장기인 소녀에게는 못 할 짓이었다.

“아이린.”

록사나가 아이린을 불러 세웠다.

“네, 록시 님.”

“저녁 시간이잖니.”

“아, 그러네요. 시장하시죠? 저녁을 어디에 준비할까요?”

아이린은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노련한 고용인 못지않게 그녀의 마음을 속 깊이 헤아릴 줄 알았다.

“이곳에서 너와 함께 먹고 싶어. 그러니까 내가 먹는 똑같은 음식으로 2인분을 준비해 주렴.”

“네, 그럴게요.”

대답은 씩씩하게 해 놓고, 아이린이 잠시 머뭇거렸다. 음식을 가져올 동안 이 방 안에서 혼자 있을 자신이 염려되어 그런 걸 테다.

“네가 음식을 가져올 동안 나는 잠시 눈을 붙이고 싶어. 이따 너와 함께 짐을 챙겨야 하니까, 그게 좋을 거 같아.”

“네. 그럼 얼른 다녀올게요. 잠시 쉬고 계세요.”

그제야 아이린이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록사나는 한껏 지친 몸을 이끌고 침실에 들어섰다.

침대 위로 올라가 도톰하고 부드러운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겨 덮었다.

반나절 만에 녹초가 된 몸은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를 않았다.

혼자 짐을 미리 쌀까도 생각해 봤지만 아이린이 알면 잔소리를 마구 쏟아 낼 것 같아 포기했다.

그 아이의 잔소리가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저 오늘만큼은 더 이상 심력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록사나가 눈을 내리감았다. 가늘게 내쉬는 자신의 숨소리와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머리에는 쿡쿡 찌르는 두통이 서서히 몰려왔다.

온몸의 수분을 쏟아 내듯 울었던 후유증이 지금에서야 한꺼번에 몰아치는 것 같았다.

록사나는 일부러 창문 밖의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 바람이 그녀의 두통을 가져가 주기를.

겨울을 맞이하는 늦가을의 바람은 시시때때로 날카롭게 나무와 창문을 할퀴었다.

바깥의 바람 소리에 귀를 잔뜩 기울이니 한결 두통이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록사나의 생각이 조금씩 긍정적인 방향으로 서서히 날개를 폈다.

‘앞으로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정도로 위자료를 챙겼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어. 정령의 힘도 그렇고.’

특히 정령의 힘은 최근 들어 미약하지만 유의미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3년 넘게 겨우 현상 유지만 했었는데, 몇 달 전부터는 정령의 기운이 아주 미세하게나마 그녀의 몸에 서서히 쌓이기 시작했다.

‘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야. 사실 카일라니 공작가 아래에서 성장하지 못했다면 험한 꼴 당하고 살았을지도 몰라.’

마지막을 음미하듯 록사나는 두 눈을 감은 채, 공작가에서 지내며 겪었던 소소하지만 소중한 추억들을 떠올렸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침실 밖 응접실에 누군가 들어서는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음식이 든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가 전해졌다.

평소에는 그녀가 깰까 소리 없이 움직이는 아이인데 일부러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듯했다.

잠시 뒤, 작게 노크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아이린이 다가와 록사나의 몸을 살짝 흔들었다.

“록시 님,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어요.”

록사나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아이린과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두 사람은 무얼 먼저 챙길지를 이야기하며 접시를 하나둘씩 비워 갔다.

그 후에는 함께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당장 입어야 할 옷 몇 가지와 보석, 개인 물품들 위주로 챙겼다.

중간에 칼리드가 찾아와 아이린에게 정산된 퇴직금이 담긴 금화 주머니와 서류를 건네주고 갔다.

짐 싸기가 다 끝났을 때는 밤 10시쯤이 되었다.

귀족가 여인의 짐치고는 굉장히 간소했다. 그녀의 짐은 록사나도 들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의 나무 궤짝 세 개가 전부였다. 그 옆에는 아이린의 짐 가방 하나도 자리했다.

“수고했어, 아이린.”

“짐이 얼마 되지도 않아서 금방 끝났어요.”

“오늘 밤은 나랑 함께 자자.”

“네, 좋아요.”

평소라면 기겁하며 냉큼 거절했을 아이린이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예외였다.

두 사람은 커다란 공작 부인의 침대에서 함께 잠들었다.

다음 날 새벽, 록사나가 아이린을 데리고 흘러가는 바람처럼 카일라니 공작가를 떠나갔다.

* * *

아침 식사를 들기 전, 차 세트가 담긴 쟁반을 든 칼리드가 카일라니 공작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가을의 막바지라, 해도 뜨지 않은 5시 30분쯤 되는 시각이었다.

“들어와.”

칼리드가 안으로 들어섰다.

서류 더미가 쌓인 널따란 책상에 앉아 아스테리온이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하룻밤 사이에 핼쑥해져 있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칼리드가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쟁반을 소리 없이 내려놓고 찻주전자에서 따뜻한 차를 우려내기 시작했다.

차가 알맞게 우려질 시간을 기다렸다가 빈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아스테리온의 손이 닿기 편하되 업무를 보는 데 거치적거리지 않을 만한 위치로 찻잔을 매끄럽게 내려놓았다.

서류에 눈을 고정하고 있는 아스테리온이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찻잔을 손쉽게 들어 올려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적절한 온도에 맞춰진 한 모금의 찻물이 그의 목 안을 부드럽게 타고 넘어갔다.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들어 칼리드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아벨리오 남작님이 30분 전쯤 하녀 아이린과 함께 대여 마차를 타고 캠든 영주 성으로 떠나셨습니다. 이른 시간대이기는 하나 몇몇 고용인들이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기 보고서입니다.”

보고서를 받아 든 아스테리온이 내용을 쭉 훑었다. 어제저녁 집사가 이미 보고했던 내용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록사나와의 논의 내용과 향후 처리 방향, 어린 시녀 아이린의 퇴직 처리 완료, 비용 전달에 관한 사항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아벨리오 남작님이 요청하신 물건들을 처리한 이후에는 남작님 계좌로 송금 처리를 하고, 이에 대한 처리 서류는 인편으로 전달할까 합니다.”

“칼리드가 알아서 하도록 해. 시녀들 퇴직 처리 문제도 같이.”

“알겠습니다.”

손에 쥔 보고서를 내려놓는 아스테리온의 표정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다.

결혼 생활과 그 끝이 어떠했든 4년 동안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던 두 사람이었다.

카일라니 공작 부부의 이혼이 앞으로 두 사람과 공작가, 그 주변에 어떤 식으로 파장을 미칠지 뻔했다.

사교계는 다시 한동안 떠들썩해질 거다.

스물일곱 살의 그의 주군은 여전히 변화무쌍한 청년기를 겪고 있었다.

그의 부모인 선대 공작 부부가 금슬이 좋고 무탈한 결혼 생활을 했었기에 칼리드는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서류 작업에 몰두하는 주인을 뒤로하고 집사 칼리드가 인사 후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마자 서류를 보던 아스테리온의 손이 멈췄다. 그의 손에서 서류 뭉치가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자신의 이혼이 아직은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무딘 건 아니었다.

이혼을 입에 담은 순간부터 심장 어느 한 곳이 고장이라도 난 듯 아리고 욱신거렸다.

어젯밤, 침대에 몸을 뉘었지만 한숨도 청할 수 없었고, 더러 숨이 가빠 오기도 했다.

‘잘한 거야. 지금 그녀를 내 곁에 두는 건 내 손으로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짓이야.’

본격적으로 로웰 후작의 꼬리를 잡기 시작한 지 4년이 되어 가자, 그가 의심해 온 모든 연결 고리들이 서서히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 이혼은 그녀에게는 모질지만 보다 안전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아스테리온이 록사나를 온전히 떠나보낼 수 있었던 건 그녀의 엘프 절맥증이 완치되었기 때문이다.

3년의 치료 과정을 거치며, 주치의 알렉이 이미 완치 판정을 내렸었다.

하지만 아스테리온은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곁에 두기 위해 혹시 모르니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이유로 1년의 시간을 더 끌어 왔었다.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듯이 한낱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 역시 사람이었다. 평소에 아무리 차갑고 냉정한 성품이라고 할지라도 아내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눈가에 이슬이 맺힐 때면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당장에라도 두 팔 벌려 보듬어 안아 주고 싶었지만 두 손을 꼭 움켜쥐어야만 했다.

철저하게 자신의 연인을 감추었던 네이든도 결국에는 제대로 지켜 내지 못하고 큰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아스테리온은 그런 친구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정적들의 숨통을 조여 가고 있었다.

그가 파헤치는 일들은 네이든의 사건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만약 지금 편하자고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되어 그의 주변은 물론 카일라니 공작가와 관련된 이들에게까지 덮쳐 올 것이다.

해서 그 머리와 몸통에 해당하는 적들을 단숨에 뽑아내고자 오랫동안 숨죽이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1년, 늦어도 2년 내에 무조건 승부를 본다.’

아스테리온이 이를 갈며 굳게 각오를 다졌다.

모든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면 그때는 떳떳하고 당당하게 록사나 앞에 서고 싶었다.

그녀가 받아 주느냐 마느냐는 그때 가서 해결하면 되는 문제였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지내 준다면 지금은 그걸로 됐어.’

아스테리온이 옷 안쪽에 숨겨 걸고 있던 펜던트를 자신의 목에서 풀었다.

펜던트를 한 번 쓰다듬다가 살짝 튀어나와 있는 부분을 눌렀다.

딸깍.

펜던트가 열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가는 실팔찌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실과 파란 실을 꼬아 만들어진 실팔찌는 방금 만든 것처럼 빛바래지 않고 선명한 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스테리온이 혹여 조금이라도 상할까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실팔찌를 어루만졌다.

록사나는 열세 살 때 그를 처음 만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아스테리온은 12년 전에 열두 살의 그녀를 처음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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