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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7)화 (17/214)

17화 

태생적으로 잘난 사내는 흠잡을 곳 없이 너무나도 잘났다.

록사나는 더욱 자신을 눈멀게 하는 지금 이 순간들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이제 그를 지워 내야 하는데, 마음속에 더욱 각인이 되는 것 같았다. 참으로 잔인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숲의 짙은 녹음과 쪽빛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아스테리온에게서 늘 받고 싶었던 눈 맞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이 서늘하게 변해 갔다.

첫눈이 내릴 시기를 몇 주 앞둔 늦가을의 바깥 날씨를 이 안으로 미리 옮겨다 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얼음같이 단단한 푸른 화살이 그녀의 가슴에 푹푹 와 박혔다.

록사나가 까만 커튼을 드리우듯 힘없이 두 눈을 내리깔았다.

무릎 위의 이혼 서류를 움켜쥔 록사나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발길이 서서히 문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집무실을 나가면 두 사람의 인연의 실은 완전히 끊어지겠지.

문을 당기기 직전, 록사나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무릎을 살짝 굽히며 우아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차마 전하지 못한 속마음과 함께.

‘안녕, 나의 태양. 이제는 당신을 놓을게요. 그러니 부디… 우리 가능하면 서로 마주치지 말아요.’

다시 등을 돌린 그녀가 문을 열고 집무실을 떠나갔다.

집무실 문이 닫히며 아슬아슬해 보이던 록사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 * *

집무실을 나온 록사나의 발길이 공작 성 후원 쪽으로 향했다.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발밑에서 힘없이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그녀의 가슴도 조각조각 찢겨 가루가 되어 갔다.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울 때면 늘 이 길을 걸었더랬지.

그러면 지나가던 바람이, 후원에 맺힌 꽃이, 묵묵히 서 있는 나무들이, 말없이 손을 내밀며 그녀를 달래 주곤 했었다.

그녀가 아름드리나무를 향해 다가가자, 물 흐르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반바퀴쯤 빙 돌아 나무의 뒤편으로 향했다.

아름드리나무에 가려 공작 성이 보이지 않게 되자, 록사나의 몸이 속절없이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얼굴 위를 적시기 시작했다.

“흑, 흐윽 흑…….”

수도 없이 할퀴고 찢겨져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겨우 부여잡고, 그녀가 서럽게 울음을 토해 냈다.

심장 곳곳에 구멍이 나 피가 철철 흐르는 것처럼 너무나 아리고 아프다.

록사나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바람 따라 바닥을 구르는 낙엽과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그녀의 울음소리를 삼켰다.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의 아내로 보낸 지난 4년 동안, 록사나는 지독하게 고독하고, 외롭고, 슬펐다.

마음을 물들인 아픔은 서서히 크기를 키워 가며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매일매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귀족 사회에서의 이혼은 사회적 매장이나 다름없었지만, 록사나에게 그런 것 따윈 상관없었다.

진심 어린 온기 한번 받아 보지 못하고, 강제로 꺾여 버린 자신의 사랑이 애달팠다.

* * *

해가 뉘엿뉘엿 서쪽에 걸릴 때쯤, 중앙 홀의 계단에 록사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막 1층 계단을 내려오던 칼리드가 록사나를 발견하고는 잠시 멈춰 섰다가 그녀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했다. 붉게 부어오른 록사나의 두 눈을 보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괜찮으십니까?”

록사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노년에 접어든 칼리드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

가문의 안주인이 기거하는 곳임을 나타내는 가문의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침실 문 앞에 시녀 크리스틴과 마리나, 어린 하녀 아이린이 대기하고 있었다.

두 시녀는 태평한 데 반해 아이린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내 록사나를 발견한 아이린이 그녀에게로 쪼르르 달려왔다.

“마님, 오셨어요?”

저택 내에서 사라진 그녀를 찾느라 그동안 속 좀 태웠나 보다.

아이린은 뒤에 자리한 칼리드를 의식하면서도 어서 그녀를 방으로 모시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문 앞에 완전히 다다르자, 두 시녀가 록사나에게 마지못해 고개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아이린이 얼른 침실 문을 열었다.

방 안에 들어서기 전 록사나의 시선이 두 시녀에게 향했다.

이를 본 칼리드가 눈치 빠르게 그녀에게 물었다.

“주변을 물릴까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록사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이린은 남도록 해.”

“네, 마님.”

아이린이 재빨리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가는 록사나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는 칼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러들 가 있게. 별도의 호출이 있을 때까지는 3층에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크리스틴과 마리나가 당황스럽다는 듯 몸을 쭈뼛거렸다.

그들이 안쪽을 힐끔거렸지만 어느새 록사나는 칼리드의) 몸집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두 사람을 칼리드가 매섭게 쏘아보자, 두 시녀가 기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대대로 카일라니 공작가의 집사를 지냈던 칼리드의 집안은 자작가였다. 그리고 이번 대 밀튼 자작은 칼리드다.

작위가 없었더라도 카일라니 영지 성의 집사인 그를 그녀들이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시녀들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주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칼리드가 몸을 돌려세웠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이 열려 있었지만, 그는 예의를 잊지 않았다.

“들어오세요.”

록사나의 허락에 칼리드가 공작 부인의 방에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공작 부인의 방에 딸린 응접실에서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계단 아래에서 만나 이곳까지 오면서 칼리드가 여러 번 말을 걸었지만, 그녀를 한 번도 ‘마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었다.

그 의미를 두 사람 모두 충분히 알고 있었다. 록사나는 이제 카일라니 공작 부인이 아니라, 외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록사나가 아이린에게 공작 부인의 예물을 모두 내어 오라고 지시했다.

침실을 통해 연결된 드레스 룸에서 아이린이 70여 개의 크고 작은 보석 상자들을 날랐다.

록사나는 그중에서 공작 부인에게만 전해지는 보석들을 추려서 칼리드 앞에 놓아주었다.

하얀 장갑을 낀 칼리드의 손이 분주히 보석들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린의 얼굴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최종적으로 칼리드의 손에 선택된 보석 상자는 스무 개였다.

그가 겉옷 주머니 안쪽에서 종이를 꺼내 록사나에게 내밀었다.

펼쳐 본 서류에는 해당 20개의 보석 목록과 현재 시세, 그녀에게 지급될 두 배의 가격이 기재되어 있었다.

“이상 없네요.”

“이것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다른 서류를 내밀었다. 이번 것은 더 묵직했다.

제국 은행에서 발행된 통장 잔액 서류와 돈을 인출하는 데 필요한 아벨리오 남작의 인장이 그녀의 손안에 들어왔다.

록사나가 통장 서류를 확인하는 동안 칼리드가 설명을 덧붙였다.

“보시는 바와 같이 위자료와 이 보석들에 대한 비용은 이미 받으신 아벨리오 남작님 명의의 제국 통장에 입금되어 있습니다. 제가 가져가는 보석을 제외한 이 방의 모든 물건들은 모두 남작님의 소유입니다.”

“알겠어요. 저는 보석이랑 제 개인적인 물건들만 챙겨서 내일 새벽에 떠나려고 해요.”

록사나의 말에 칼리드의 두 눈이 커졌다.

이혼 서류에 사인을 한 지 만 하루도 안 되어 떠나겠다는 그녀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방의 그림이나 장식품들도 원래부터 공작가에 내려오던 것들이니 놓고 가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드레스와 가구, 공작 부인의 방에 필요 없는 그 외의 자잘한 것들은 집사에게 처분을 부탁해도 될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거기에 드는 제반 비용은 처분된 물품 비용에서 제하고 보내 주시면 될 거 같아요. 그리고 내일 캠든 영지로 떠날 마차 대여도 부탁해요. 한 대면 돼요.”

“알겠습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아이린에게로 록사나의 시선이 향했다.

“아이린, 네가 들은 대로 나는 내일 아침 카일라니 공작가를 떠나. 나를 따라가겠니?”

이제는 울 것 같은 표정의 아이린이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전 마님이 어디 가시든 따라갈 거예요.”

“나는 이제 더 이상 카일라니 공작 부인이 아니란다. 록사나 아벨리오, 남작이 되었지. 그러니 앞으로는 마님이나 공작 부인이라고 부르면 절대 안 돼. 아직은 혼란스럽겠지만 말이야.”

“그럼 마… 아니. 뭐라고 불러요?”

“너 편한 대로 부르렴.”

“네?”

아이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옆에 있는 칼리드의 얼굴에도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뭐 어때? 난 이제 공작 부인이 아닌 걸.”

잠시 생각을 한 아이린이 입을 열었다.

“그럼 록시 님이라고 부를래요.”

록사나가 허락의 의미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연해 보이는지 아이린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히려고 했다.

“아이린, 나를 따라가겠냐는 질문은 네가 공작가를 떠나 나와 함께 이곳을 나가겠냐는 의미야. 어쨌든 너는 공작가 소속 시녀니까.”

“저는 무조건 록시 님을 따라갈래요. 버리고 가셔도 쫓아갈 거예요.”

아이린이 재빠르게 대답했다.

올해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 시녀는 눈치도 빠르고, 참으로 영특했다.

아이린이 공작가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2년 전부터였다.

길거리를 떠돌며 생활하던 열세 살의 아이린을 거두어 준 사람이 바로 록사나였다.

공작가 내에서 크게 할 일이 없었던 록사나가 남아도는 시간에 직접 글과 산수, 장부 보는 법 등을 가르쳤고, 그 밖에도 알아 두면 유용한 지식들을 하나하나 알려 준 아이였다.

선대 카일라니 공작 부인 엘리노어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서로를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은 애틋하고 돈독했다.

자신의 곁에 아이린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지금 이 순간 록사나는 안심이 되었다.

아이린의 존재 덕분에 세상을 향해 새롭게 발을 내딛는 게 덜 무섭게 느껴졌다.

록사나가 칼리드를 마주 봤다.

“제가 아이린을 데려갈 거예요.”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제가 아이린의 퇴직 절차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내일 이 아이가 남작님을 따라가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겁니다.”

* * *

칼리드가 물러가고, 록사나와 아이린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록사나는 그녀가 오늘 낮 이혼을 했다는 소식을 시작으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아이린은 침착하려 애썼지만, 울먹임을 숨기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부어오른 록사나의 눈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참 마음이 여린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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