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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6)화 (16/214)

16화 

아스테리온과 보좌관 트레버는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논의를 이어 나갔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어디에도 이번 일의 중심에 있는 록사나를 책망하는 말이나 단어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후 혼자가 된 아스테리온이 집무실의 거대한 창문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일들이 흘러가는 것 같아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결코 쉽게 무너질 그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보호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고민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네이든, 필사적으로 테오도르 황자를 지키고자 했던 너도 고민이 많았겠구나.’

한없이 힘들었을 친구를 떠올리며 늦게나마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며칠 전, 록사나를 영지로 내려 보냈다.

영지로 먼저 내려가 있으라는 그의 말에 록사나는 어떤 이유도 묻지 않았고, 아스테리온 또한 굳이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지난 4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이러한 행동 패턴은 두 사람 사이에 자리 잡혔다.

그는 록사나가 거미줄 같은 정치판에 얽혀 들길 원하지 않았다. 귀찮은 하이에나 떼를 상대하는 것은 그 혼자만으로도 충분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아스테리온의 상념을 방해했다.

“들어와.”

그의 허락에 수도 공작 성의 집사 프란시스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프란시스는 카일라니 공작 령 레드포드 영주 성을 관리하는 집사 칼리드 밀튼의 장자였다.

또한 아스테리온의 최측근 중 한 명으로서 공작가 정보부 수장이기도 했다.

“요새 기온이 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따르며 삼십 대에 접어들고 있는 프란시스가 말했다.

아스테리온이 창가에서 떨어져 집무실 소파에 자리했다. 그가 잔을 들어 홍차를 음미했다.

맞은편에 자리한 프란시스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찻잔을 들었다.

자신을 아기 적부터 보아 온 프란시스는 아스테리온에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형과 같은 존재였다.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일 이야기가 아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짧은 티타임을 즐겼다.

티 세트를 챙겨 집무실을 나오는 프란시스의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이 떠올랐다.

프란시스의 걱정은 지금의 정치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좀 더 개인적인 부분으로 자신의 주군인 아스테리온의 행복이었다.

프란시스는 아스테리온을 바라보는 공작 부인의 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록사나의 시선은 언제나 따스한 빛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이 등을 돌릴 때마다 공작 부인의 녹안은 흔들렸다.

어쩌면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의 꽁꽁 얼어 있는 심장을 녹여 줄 수 있지 않을까.

깜찍하게 귀여울 아기 공녀나 공자라도 생긴다면 공작가의 분위기도 한결 풀리게 되지 않을까 제법 기대를 했더랬다.

남들이 듣는다면 배를 잡고 웃겠지만, 제발 생겨라, 밤마다 기도 비슷한 걸 해 보기도 했다.

그런 그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공작 부부의 관계는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런데 이번 추수절 황궁에서의 일과 황태자와의 대립이 심해지며, 이를 계기로 두 사람 사이에 뭔가 큰 변화가 생길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 * *

레드포드 영지의 카일라니 공작저.

수도 황궁에서 열렸던 추수절에 참여하고 공작 령으로 내려온 록사나는 3주 만에 남편을 마주했다.

그리고 남편은…….

“이혼하도록 하지.”

이혼 서류를 록사나의 앞으로 내밀었다.

서류를 바라보는 록사나의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이 일렁인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무겁게 가라앉은 시선을 들어 올린 그녀가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안으로 말아 움켜쥔 자신의 두 손을 들킬세라 주름져 흘러내리는 치마 사이로 숨겼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듯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반면에 아스테리온의 얼굴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감정의 줄기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남편이 내뱉은 말이 록사나의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이혼하도록 하지. 이혼하도록 하지. 이혼하도록…….’

떨림으로 쿵쿵거리는 심장을 움켜잡아 지금 당장 멈추고 싶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까.

그 어떤 말도 그의 결정을 돌릴 수 없을 터인데.

록사나가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이유가 뭐예요?”

가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감추려던 아픔이 배어 나왔다.

솔직히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되었다.

그에게 그녀가 필요 없어졌다. 쓸모없어진 물건이어서 처분하려 했는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결심한 거다.

또한 몰락한 남작가의 영애였던 그녀는 공작 부인의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그는 그녀에게 먼지 한 톨만큼의 관심도 없었고, 마음 한 자락도 내어 주지 않았다. 아스테리온은 록사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의 첫사랑이 돌아올 자리가 필요해졌을 수도…….’

심장이 산산이 조각나는 와중에도 이유를 묻는 자신이 구차하게 느껴졌다.

“이유라. 여러 가지가 있지.”

록사나는 하마터면 숨을 크게 들이켤 뻔했다.

그에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 놀랄 일인가.

동요하는 모습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스테리온이 말을 이었다.

“원래 우리 결혼의 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어. 그 끝이 언제든 이상하지 않지.”

맞다, 그는 편의상 아내가 필요했을 뿐이다. 아무 권력도 없는 적절한 방패막이.

문제를 일으켜서도 안 되고 그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을 아내 말이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제나 진중한 그의 목소리는 이 순간 더욱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록사나의 귓가와 가슴속으로 점점 깊이 파고들었다.

“당신으로 인해 내 상황도, 공작가도 곤란하게 되었어.”

얼마 전, 추수절 황궁에서의 사건이 결정타였음을 그녀는 다시 한번 직감했다.

록사나가 이를 사리물었다.

모든 게 잘 짜여진 각본처럼 그녀를 옭아매며 궁지로 내몰았다.

여기에 그가 관여를 했을까?

아니, 비록 그녀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일부러 사건을 키워 쫓아낼 만큼 그는 명예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었다. 그녀에게 공작 부인의 자리를 제안했던 4년 전처럼 차라리 거래를 제안했으리라.

바로 지금처럼.

“4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 대한 대가로 적당한 규모의 영지와 위자료를 지급하도록 하지.”

그가 그녀 쪽에 놓인 이혼 서류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록사나의 시선이 이혼 서류로 향했다.

아까는 눈앞이 캄캄해져 보이지 않던 글자들이 눈에 서서히 들어왔다.

공작가에 속해 있는 영지 중 하나인 캠든 영지와 50만 골드의 위자료를 떠나는 날 일시불로 지급하고, 그동안 착용했던 각종 보석과 드레스 등은 그녀의 소유로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기존에 공작가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것으로 그녀에게 건네진 몇몇 보석에 대해서는 현 시세의 두 배 가격으로 공작가에서 즉시 구매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카일라니 공작가가 소유한 아벨리오 남작 위를 이혼 서류에 서명하는 즉시 그녀에게 승계한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영지가 없는 남작이었던 록사나의 아버지는 그녀가 열세 살 때 어머니와 함께 갑작스런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녀는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그 당시 록사나는 미성년자였기에 자동적으로 황실에 작위가 반납되었다.

리온 제국 법상에 따르면, 그녀가 성인이 되어야만 작위를 승계할 수 있었다.

이때는 반드시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만 하며, 이에 대한 금전적 대가 또한 황실에 지불해야 한다.

록사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작위를 승계하지 않았다.

작위를 되찾기도 전에 공작 부인이 되었고, 공작 부인이 되었을 때는 황실과 사교계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되찾지 않았던 작위인데…….’

카일라니 공작가가 무엇을 대가로 지불하고, 언제 아벨리오 남작 위를 되찾아 왔을까.

이혼하는 지금에서야 카일라니 공작가가 아벨리오 남작 위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랑이 없는 부부 사이에서 이런 이혼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일평생 경제적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조건들이었다.

록사나가 조건을 다 확인한 듯하자, 아스테리온이 이혼 합의서를 꺼내 들었다.

그가 그녀 쪽으로 자연스럽게 펜을 내밀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쓰인 곳에 록사나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록사나 카일라니.

그들의 이름 옆에는 당연하게도 사인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미 아스테리온의 사인이 되어 있었다. 이제 록사나만 사인하면 완벽해진다.

그녀의 손이 떨려 왔다. 가만히 자신의 두 손을 마주 움켜잡았다. 떨림이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록사나가 펜을 집어 들었다. 이제 사랑도 결혼도 모두 끝낼 때가 되었다.

사각거리는 펜촉 소리에 맞춰 록사나의 이름 옆에 사인이 완성되었다.

다음은 아벨리오 남작 위 승계 서류와 캠든 영지에 대한 소유권 서류였다.

여러 번의 사인을 마친 록사나가 손에서 펜을 내려놓았다.

아스테리온이 서류를 정리해 록사나 쪽으로 내밀었다. 그녀가 서류를 집어 들어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과 록사나 카일라니의 결혼 생활은 끝이 났다.

아직 관청의 승인 절차가 남아 있긴 했지만, 이 순간부터 그녀는 다시 록사나 아벨리오가 되었다.

록사나는 자신의 눈에 투명하게 어른거리는 습기를 애써 서서히 밀어냈다.

그녀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이 말을 하지 않고는 모든 걸 끊어 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당신을 사랑했어요.”

아스테리온의 눈가가 움찔거렸다.

그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를 자신의 비밀 중 하나를 소리 내어 말하고 나니 그다음은 쉬웠다.

“걱정 말아요. 이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지울 테니까. 처음부터 다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서서히 어떤 것도 남지 않게 모두 비워 내다 보면 우리 사이에 남게 되는 건 아무것도 없겠죠.”

한참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고맙군.”

마지막 의무라고 느꼈던 듯 그가 느리게 대답했다.

‘고맙다니……. 앞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일이 당신에게는 그저 고마운 일일 뿐인가요?’

여전히 록사나의 심장은 아스테리온을 향해 뛰고 있었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햇살 아래, 태양에서 실을 뽑아내 자아낸 듯 그의 금발이 눈부시게 빛났다.

하늘과 바다의 짙푸른 빛깔을 닮은 청명한 아스테리온의 눈동자에는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과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

여인보다 더 고혹적이고 아름다운 조각상 같은 얼굴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매혹시키고 만다.

너른 품과 단단한 어깨, 탄탄한 근육이 균형 있게 자리 잡은 몸은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둔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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