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제가 힘들 때마다 의지가 되었던 목걸이에요. 낮에는 너무 환해서 별을 볼 수 없으니까, 목걸이의 별을 보면서 위로도 받고, 소원도 빌고 했어요. 테오도르 황자님께도 분명 힘이 될 거예요.”
“응. 그런데 소원은 이루어졌어?”
“이루어진 것도 있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있어요.”
“그럼 다시 가져가…….”
“네?”
목걸이를 벗으려고 하는 테오도르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런 테오도르를 보며 록사나가 말렸다.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나한테 줘 버리면… 공작 부인은 남은 소원을 이룰 수가 없잖아.”
록사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목걸이가 없어도 제 소원은 이루어질 거예요. 별을 보고 소원을 빌기만 하면, 별이 사라져도 소원은 이뤄지게 되어 있거든요.”
테오도르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예를 들면 사람들이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비는데, 소원을 다 말하기도 전에 별똥별은 금방 사라지잖아요. 그런데 별똥별이 사라져도 소원은 사라지지 않고 이루어져요.”
“그렇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테오도르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표정 변화가 풍부했다.
록사나가 마주 웃었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항상 목에 걸고 다녀 주세요.”
“응, 소중하게 간직할게.”
“혹 잃어버리셔도 찾을 수 있으실 거예요. 정령의 축복이 깃들어 있어서 이 목걸이를 만진 사람에게는 정령의 기운이 묻게 되거든요. 천이나 다른 걸 이용해서 만져도 똑같아요.”
“와~!”
테오도르가 신기한 눈빛으로 별 목걸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정령의 축복이 깃든 물건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다. 정령은 만나기도 정말 힘들고, 정령의 축복은 더더욱 받기 힘들다고 들었다.
그만큼 이 목걸이는 무척 귀한 물건이었다.
잠시 후, 록사나가 주변을 슬쩍 살펴보았다. 근처의 몇몇이 아닌 척 황자와 공작 부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할 록사나가 아니었다.
록사나와 테오도르가 소곤거리듯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이 중에 귀가 무척 밝은 자가 듣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누군가 이 목걸이를 탐내어 빼앗거나 몰래 훔칠 수도 있다.
황족의 물건에 허락 없이 손을 댄 자는 치도곤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힘이 없는 황자에게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록사나는 일부러 목걸이의 비밀을 언급했다. 감히 탐내지 말라고.
록사나의 시선을 느낀 자들이 몸을 사리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일에 열중하는 시늉을 했다.
그들은 록사나의 뒤에 있는 카일라니 공작가의 힘마저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표정을 갈무리한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테오도르 황자님, 목걸이에 대한 답례로 받고 싶은 게 있어요.”
파란 하늘에 갑자기 회색 구름이 몰려온 듯 테오도르의 얼굴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답례야 당연히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테오도르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값진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가슴속에서 걱정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뭔데?”
테오도르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록사나라고 불러 주세요. 저는 테오도르 황자님께 공작 부인보다 록사나라고 불리고 싶거든요.”
록사나의 말을 바로 이해한 테오도르의 얼굴이 환한 달처럼 밝아졌다.
쑥스러운 듯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래……. 록사나.”
“테오도르 황자님,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상기된 테오도르 황자의 두 볼을 살짝 감싸며, 록사나가 애정을 담아 아이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 * *
그레이트 홀 앞에서 아스테리온을 만난 록사나는 추수절 무도회에 참석했다.
귀족들은 무리를 지어 황실 중앙 정원에서 있었던 소란에 대해 떠들어 댔다.
테오도르 황자를 비호하는 세력보다는 빅토리아를 비호하는 귀족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들은 카일라니 공작 부인에 대한 안 좋은 말들을 양념처럼 섞었다.
빅토리아의 편을 드는 척 황실 내부의 일에 공작 부인이 나섰다는 것과 로웰 영애라고 지칭한 점 등을 꼬집었다.
현 황태자인 도노반과 로웰 후작가의 눈치를 보며 아부하는 것이었다.
황제와 황족들이 등장하고 무도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록사나는 도노반 황태자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소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 시선이었다.
애써 모른 척하며 록사나는 아스테리온과 함께 춤을 췄다. 어쩌면 황태자보다 더 빠르게 소식을 접했을 아스테리온의 표정은 변함없이 덤덤했다.
록사나는 앞으로 있을 빅토리아 측의 보복보다 아스테리온의 반응이 더 신경 쓰였다.
어떤 정치적 입장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황실과 엮이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그 다짐을 깰 수밖에 없었다.
무도회가 한창 무르익을 때쯤, 카일라니 공작 부부는 황궁을 떠났다.
공작가로 돌아오는 내내 아스테리온은 그 일에 대해 록사나에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거의 매일 공작 부인의 침실에 드나들던 카일라니 공작의 발길이 그 이후부터 뚝 끊겼다.
* * *
추수절이 지나고, 일주일이 흘렀다.
“사교계의 여론이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제1 보좌관인 트레버의 말에 아스테리온이 보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우리 쪽 귀족들의 상황은 어떻지?”
아스테리온이 집무실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테오도르 황자님의 억울함에 대해 부각시키고는 있지만 워낙 저쪽에 붙은 귀족들이 많다 보니 화제에 올랐다가도 금방 수그러드는 추세입니다.”
“음…….”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아스테리온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여론을 저희 쪽으로 유리하게 바꾸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트레버가 덧붙였다.
“도노반 황태자 쪽에서 가만히 넘어가지는 않을 텐데……. 제대로 된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겠지.”
“맞습니다. 황태자 쪽으로 노선을 정한 귀족들의 수가 전보다 늘었습니다. 거기다 로웰 후작이 번질나게 황태자 궁을 드나들고 있고요.”
7황자 테오도르와 관련된 추수절 사건 이후, 이런 변화는 두 사람 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들이었다.
빅토리아 로웰과 록사나 카일라니 두 사람의 논쟁의 영향이었다.
하지만 도노반 황태자와 카일라니 공작의 대립으로 번질 여지는 충분했다. 도노반과 아스테리온의 사이가 무척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황태자는 공작가에 시비를 걸 만한 건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 그 건수가 생겼다.
도노반이 아스테리온의 전 약혼자였던 빅토리아 로웰을 비공식적인 황태자비로 맞아들인 것을 떠나서 처음부터 둘의 관계는 상극이었다.
리온 제국의 네 공작가 중에서 카일라니 공작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세 공작가를 압도했다. 로웰 후작가보다 앞서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전 황태자가 사망한 이후에 카일라니 공작가는 중립으로 돌아섰다.
현 황태자인 도노반의 입장에서는 개인적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물론이요, 추후 황권을 이어받았을 때 정치적으로 강력한 적이 될 수도 있었기에 아스테리온은 감히 무시하지 못할 존재였다.
현재의 상황은 도노반 황태자가 자초한 일이라고 귀족들은 뒤에서 수군거렸다.
“제국 법과 황실 예법으로는 ‘로웰 영애’로 호칭함이 옳지만, 현 상황은 그렇지 않지요. 모두가 다 안다고 해도요.”
“황태자가 사랑꾼이라는 가면을 쓰고 여론 몰이를 한다면 대중들은 홀랑 넘어가겠지. 적절한 명분이 되어 줄 황세손도 있으니 말이야.”
빅토리아가 공식적인 비는 아니었지만, 황세손을 낳았기에 이번 일로 카일라니 공작가를 공격해도 충분한 명분이 되어 줄 것이다.
“황태자와 로웰 후작이 귀족원 위원들과 자주 접촉하는 건 제국 법을 바꾸기 위해서일까? 마침 적절한 타이밍이잖아.”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이참에 황태자는 후궁을 둘 수 없다는 법을 뜯어고치려고 할 겁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요.”
“막을 방도를 철저히 대비해 놔야겠군.”
“물론입니다. 후궁 소생이나 사생아였어도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일들이 역사적으로 더러 있었으니까, 굳이 제국 법을 개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근거로 들면 이쪽에서도 충분히 반박할 수 있습니다.”
트레버가 외 알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리고 황세손을 내세우면 그동안 반대하셨던 폐하께서 흔들리실 수는 있겠지만, 저희가 작정하고 반대를 하면 중심을 잡으실 겁니다.”
황후 소생의 적장자인 네이든 황태자를 잃었던 황제의 입장에서는 제국의 황권이 굳건하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도노반 황태자는 이를 기회로 삼아 빅토리아의 지위가 공고해야 황세손이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을 앞세워 큰 목소리를 낼 것이다.
황제는 분명 흔들릴 수밖에 없다.
황태자가 후궁을 둘 수 없다는 법은 황제보다 황태자의 세력이 커지는 걸 견제하려는 정치적 제어 장치였다.
그리고 황자는 자신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세력을 견제해야만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황제는 아무리 귀애하는 아들이라도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이 생기는 걸 원치 않을 거야.”
“네. 조만간 귀족 회의가 열리겠지요. 더 바삐 움직여야겠네요.”
카일라니 공작가를 중심으로 한 중립 세력은 도노반 황태자의 뜻을 저지시킬 예정이었다.
“그래. 우리 별 황자님 쪽 동태는?”
아스테리온이 록사나의 목걸이를 선물 받은 테오도르 황자를 별 황자라고 지칭했다.
* * *
아스테리온은 록사나가 가장 아끼는 목걸이를 모르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그 목걸이를 몸에서 절대 떼어 놓지 않았었다.
가끔 아스테리온은 그 목걸이의 기운이 특별하다는 느낌을 지워 낼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별다른 움직임은 없습니다.”
7황자에게 해코지하려는 자나 그런 세력의 움직임이 포착되는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전 황태자 네이든은 테오도르를 세상에 다시없는 보물처럼 귀애했었다.
테오도르 황자가 백일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네이든이 떠났다. 당연히 지금의 테오도르 황자는 네이든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아스테리온이 테오도르 황자의 열악한 상황을 알면서도 그동안 손을 쓰지 않았던 건 모두 그를 위해서였다.
눈에 띌수록 도노반 황태자와 그 세력들에게는 제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스테리온이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테오도르 황자 주변에 자신의 사람들을 심어 놓았다. 주기적으로 정보를 전달받고 있었으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는 않았다.
아직은 모든 상황들이 시기상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