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아직 열한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막시밀리언의 모친인 빅토리아를 로웰 영애라고 칭하는 건 카일라니 공작 부인에게 굉장히 좋지 않다는 걸 알았다.
제국 법과 황실 예법에 따라 로웰 영애라고 부르는 게 맞다 해도 빅토리아 로웰은 황실의 묵인하에 사람들에게 황태자비로 불리고 있었다.
귀족들은 카일라니 공작 부인의 대담함에 놀랐다.
모든 시선이 빅토리아에게 쏠렸다.
빅토리아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표정을 가다듬었으나 분한 기색까지는 미처 다 숨기지 못했다.
빅토리아의 두 손은 자신의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을 숨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평소 황실 행사에 간간이 참여하던 록사나 카일라니는 소심해 보였었는데 너무 무르게 보았던 것 같다.
“카일라니 공작 부인, 황실의 일은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그만하시지요.”
빅토리아는 자신의 아들 막시밀리언과 테오도르 황자의 일을 교묘하게 집안 일로 치부했다.
또한 ‘로웰 영애’라 호칭된 사실을 자연스럽게 묻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황실의 일원이며, 외부인인 록사나는 신경을 끄라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로웰 영애’라는 호칭에 대한 반박이었으나 그것까지는 지적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빅토리아 자신을 우습게 만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리온 제국 황실에서 황제와 황태자 다음으로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이가 바로 빅토리아 자신이었다.
전 황후가 사망해 현재 황후 자리는 공석이다. 또한 도노반의 첫 번째 부인인 이사벨은 그녀에게 상대도 되지 못했다.
그렇기에 현재 궁내 내정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빅토리아가 최고의 권력자나 다름이 없었다.
사람들은 얼음물에라도 들어간 듯 시린 분위기 속에서 빅토리아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카일라니 공작 부인이 무슨 의도로 이 자리에서 빅토리아와 맞서는지 궁금했다.
현 카일라니 공작과 빅토리아 로웰의 예전 관계를 질투하는 것이 아닐까 짐작했다.
하지만 록사나는 그저 가엾게 누명을 쓴 테오도르 황자의 누명을 벗겨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황실만의 일일 수도 있사오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론화되었으니 황실만의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록사나가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황실의 일만으로 치부하고 싶었다면, 황실 일원만 있는 곳에서 이 문제를 다뤘어야 한다는 뉘앙스를 눈치채지 못할 이는 없었다.
귀족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문제를 꺼내 든 것부터가 잘못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말이었다.
록사나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황족이 하는 말과 행동에는 언제나 품위가 있어야 하지요.”
아까 테오도르 황자에게 황족의 품위 운운하던 빅토리아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그러니 어서 책임감 있게 테오도르 황자에게 사과하라는 말이기도 했다.
만약 여기서 빅토리아 모자가 사과도 없이 이 일을 넘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황족의 명예와 품위는 두 사람의 손에 의해 철저히 땅에 떨어지고 말 거다.
여기서 계속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못할 것이다.
이를 악무는 빅토리아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막시밀리언이 그런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다 매섭게 테오도르를 노려보았다.
게다가 그레이트 홀에서 열리는 저녁 무도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분하지만 빨리 이 상황을 끝내야 했다.
“테오도르 님, 제 결례를 용서하세요. 자, 막시밀리언. 너도 어서 사과드리렴.”
“죄송해요, 테오도르 삼촌.”
고개를 숙이는 막시밀리언이 풀 죽은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렇지만 가까이 있던 록사나는 악의에 차서 치켜뜬 막시밀리언의 눈을 놓치지 않았다.
록사나가 막시밀리언 옆의 귀족 영식들을 다소 엄하게 바라보았다.
“7황자님,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눈치를 보던 세 명의 영식들이 재빠르게 말했다.
테오도르가 속으로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억울한 일들을 생각하면 똑같이 돌려주고 싶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역으로 자신이 불리해질 게 뻔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편을 들어 준 카일라니 공작 부인도 곤란해질 거다.
“사과를 받아들입니다.”
상황이 반전되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마무리되자, 테오도르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곧 시작될 무도회를 핑계로 빅토리아 로웰은 막시밀리언을 데리고 허겁지겁 자리를 떴다.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졌다.
록사나와 테오도르의 주변에는 정원을 정리하는 궁의 시종들만이 남아 있었다.
테오도르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맑은 눈으로 록사나를 올려다보았다.
“테오도르 황자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록사나 카일라니입니다.”
정식으로 어린 7황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테오도르 마르퀴스입니다, 카일라니 공작 부인. 오늘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하는 테오도르를 보며, 록사나가 얼른 그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녀는 동그랗게 뜨이는 황자의 보랏빛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여린 눈빛을 보는 록사나의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어린 테오도르가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황자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지만, 소년은 자신보다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다. 황제라는 아비는 자식에게 관심조차도 없었다.
록사나가 살며시 테오도르의 앙상한 두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아이의 마른 몸만큼이나 손가락도 무척 가늘어 그녀에게 더욱 애잔함을 안겨 주었다.
“테오도르 황자님, 감사 인사를 듣기에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본 것을 말한 것뿐이고, 황자님의 마음을 다 풀어 드리지도 못했는걸요.”
마음……. 자신의 마음.
테오도르의 심장에 깊숙하게 박혀 있던 날카로운 얼음이 파사삭 깨졌다. 이내 그것마저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종국에는 녹은 물마저 사라졌다.
테오도르는 눈가가 시큰거렸다. 자수정빛 두 눈에 투명한 눈물이 한가득 차올랐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 봐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받아 보지 못한 따뜻함이었다.
제 손을 잡은 록사나의 두 손이 참 따뜻했다.
또르르 눈물을 흘리는 테오도르를 보며, 록사나가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난…….”
목이 메여 온 테오도르가 말을 잇지 못했다.
록사나는 어린 7황자의 처치를 떠올렸다.
웅장하고 화려하지만 살얼음판 같은 황궁, 보이지 않는 권력 다툼의 틈바구니 속에서 소외되고 방치된 어린 황자.
처음 본 순간부터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의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황자는 무척 외로워 보였다.
그 모습이 어린 날의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부모를 잃었고, 자신을 거두어 준 선대 카일라니 공작 부인 엘리노어까지 잃었던 록사나는 늘 외로웠다. 지금까지도 그랬다.
오늘의 호의가 어쩌면 황자에게 독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은 작은 호의와 온기 하나에서 삶의 이유를 찾기도 하니까.
“테오도르 황자님, 밤하늘의 별을 보신 적 있으시죠?”
테오도르가 그렇다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예쁘고 못난 별을 보셨나요?”
“아니, 별은 보석처럼 반짝여서 다 예쁜걸.”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테오도르는 말을 편하게 했다.
“맞아요. 빛나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세상에 못난 별은 없어요. 우리에게 머리 위에 하늘이 하늘이듯이, 하늘에게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 땅이 하늘일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땅에 사는 별들이에요. 황자님도, 저도요.”
잠시 말을 멈춘 록사나가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어린 소년의 자수정빛 두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황자님은 제가 본 아기별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세요.”
“정말?”
록사나가 말하는 바의 의미를 어느 정도 알아들은 테오도르가 반문했다. 자신은 늘 초라했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었다.
“그럼요. 오늘 용감하게 잘 견디실 때 황자님 몸에서 빛이 났는걸요. 저만 봐서 다행이에요.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챘더라면 제가 이렇게 멋진 아기별을 가까이서 만나 뵐 수는 없었을 거예요.”
맞잡은 손을 록사나가 장난스럽게 살짝 흔들었다.
“나 아기 아닌데…….”
살짝 삐진 말투였지만 테오도르는 입가의 미소를 감추지는 못했다.
“어머, 죄송해요. 그럼… 좀 더 큰 아기별로 할까요?”
“…응.”
테오도르가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럼 큰 아기별님께 어울리는 걸 드리고 싶은데 받아 주시겠어요?”
카일라니 공작 부인이 자신에게 뭔가를 준다는 말에 어린 테오도르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다.
“뭔데?”
록사나가 자신의 목에 건 목걸이 하나를 풀어내어 테오도르에게 손수 걸어 주었다.
테오도르가 제 목에 걸린 목걸이의 보석 부분을 들어 올렸다.
은색의 작은 타원형 안에 나뭇잎 하나가 꽉 차게 양각되어 있었고, 그 안에는 별 모양의 보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둣빛으로 반짝이는 모습이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안에 아주 작은 또 다른 별이 들어 있었다.
참 신기했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어 록사나의 목 부분을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테오도르에게 준 목걸이 말고도 카일라니 공작 부인은 다른 목걸이 하나를 더 착용하고 있었다.
파티에 참석할 때면 록사나는 버릇처럼 늘 두 개의 목걸이를 하곤 했었다.
그것은 카일라니 공작가의 휘황찬란한 목걸이들 중 하나와 어릴 적 엄마에게 물려받은 정령의 목걸이였다.
몸에서 정령의 목걸이를 떼어 놓고 싶지 않았기에 두 개의 목걸이를 하게 되었다.
정령의 목걸이는 외관이 소박했지만, 은은하고 고급스러워 어떤 목걸이하고도 제법 잘 어울렸다.
지금 정령의 목걸이는 이제 테오도르 황자의 목에 걸려 있었다.
자신을 살피며 염려하는 테오도르를 보니 마음이 더욱 포근해졌다.
록사나는 두 개의 목걸이를 하는 습관을 들인 것과 황자에게 정령의 목걸이를 건네준 것 역시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어울리세요.”
“고마워.”
테오도르는 처음 받아 본 선물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