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어서 사과하세요. 그러면 황세손도 너그럽게 용서해 줄 겁니다.”
퍽이나 자애로운 목소리였다.
“저는 사과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무게를 잡은 막시밀리언이 짐짓 너그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정확한 내막을 따로 알아보자고 말하는 이는 더더욱 없었다.
“어쩜, 연치가 어리심에도 막시밀리언 저하께서는 참으로 너그러우십니다. 잘못하고도 사과할 줄 모르는 누구와는 다르게…….”
구경꾼들 속에 있던 중년의 부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눈물이 맺히려는 테오도르의 두 눈가가 붉게 변했다.
먹음직스런 먹이를 코앞에 둔 듯, 주변의 시선은 뱀처럼 어린 황자의 몸을 서서히 조여 왔다.
테오도르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달싹였다. 비참하도록 싫었지만, 계속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이 상황은 끝나지 않을 테니까.
“…제, 제가…….”
“막시밀리언 저하, 아까 넘어지신 곳은 괜찮으십니까?”
그때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으려고 사람들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록사나 카일라니 공작 부인을 발견하고는 다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흥미로운 눈빛을 짙게 발산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헤치며 록사나가 앞으로 나섰다.
빅토리아 모자가 서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자, 하나둘 길을 터 주었다.
빅토리아뿐만 아니라, 주변의 귀족들은 록사나 카일라니의 뜬금없는 등장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록사나는 그런 그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막시밀리언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하, 아까 정원 오솔길에서 심하게 넘어지시는 걸 봤습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나 안 넘어졌는데.”
막시밀리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어린 영식들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검은 옷이 아니라 흰옷을 입고 계시네요.”
록사나가 자신의 손뼉을 짝 마주치며 말했다.
“카일라니 공작 부인, 이 무슨 무례입니까? 그리고 뜬금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빅토리아의 시녀인 말로리 백작 부인이 갑자기 끼어든 록사나의 행동을 지적했다.
록사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옳다구나 하며 트집을 잡는 미운 시누이처럼 매서웠다.
록사나는 말로리 백작 부인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아까 제가 정원 오솔길을 산책하다가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아이를 봤어요. 다른 영식들이 가만히 서 있는 그 아이를 갑자기 밀더라고요. 너무 세게 넘어져서 걱정되었는데… 다들 자리를 금방 떠서 괜찮은지 미처 확인을 하지 못했어요.”
사람들의 눈과 귀가 쫑긋거렸다.
왠지 불길한 예감에 말로리 백작 부인이 옆에 있는 빅토리아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빅토리아의 자애로웠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녀의 눈빛이 서늘했다.
빅토리아가 입을 떼려는 순간, 록사나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하와 영식들은 다른 색 옷을 입고 계시네요. 그럼…….”
록사나의 녹안이 자연스럽게 검은 옷을 입고 있는 테오도르 황자에게로 향했다.
황자의 검은색 상의와 하의에는 미처 다 털어 내지 못한 흙과 먼지가 그대로 묻어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그제야 잔뜩 흐트러진 테오도르 황자의 모습이 제대로 들어왔다.
막시밀리언과 어린 영식들은 각각 흰색, 남색, 베이지색, 자주색 계열의 옷을 위아래 한 벌로 입고 있었다.
그들의 옷은 눈에 띄는 실밥 하나 없이 깔끔하기만 했다.
“막시밀리언 저하가 또래보다 키가 크셔서 테오도르 전하이신 줄 알았지 뭐예요. 테오도르 황자님과 저하를 오늘 처음 뵈어서 제가 큰 실수를 했네요. 송구합니다.”
록사나가 살짝 무릎을 구부리며 늦은 인사를 했다.
먼발치에서 막시밀리언을 몇 번 본 적이 있었지만 가까이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눈치가 빠른 몇몇 사람들이 뭔가 깨달은 듯, 짧은 탄식을 뱉어 냈다.
사람들은 록사나가 막시밀리언과 테오도르 사이에서 일어난 일의 목격자라는 걸 깨달았다.
카일라니 공작 부인의 말은 막시밀리언이 얘기한 내용과 전혀 달랐다.
즉 록사나의 증언 아닌 증언에 따르면, 테오도르가 아니라 막시밀리언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얘기가 된다.
7황자 테오도르의 지저분한 옷과 막시밀리언의 깔끔한 순백의 옷차림이 록사나 카일라니 공작 부인의 말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명백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막시밀리언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아, 아냐! 내가 밀었어.”
헉 소리를 내며, 막시밀리언이 바로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방금 스스로 진실을 고백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막시밀리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빅토리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람들도 당황했다.
아직은 처세에 능숙하지 않은 여덟 살 어린아이의 장난이나 실수라고 할지라도 이 사건은 쉽게 넘어가기가 어렵게 되었다.
서로의 위신과 명예가 걸린 문제였다.
황실과 황실의 핏줄은 제국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어떤 순간에도 그들이 하는 말의 무게는 세상 어떤 금은보화보다도 무거웠다.
그만큼 신중해야 하고,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되었다.
황족의 말에는 막중한 책임감이 따르며 나이가 많든 적든 스스로가 한 이야기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했다.
그들의 입이 가볍고 거짓을 품은 칼날을 마구 내뿜는다면 어떤 귀족과 백성들이 황실을 믿고 따르겠는가.
황족들이 말을 하기 시작하는 아기 때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을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거 참, 그럼 막시밀리언 저하가 거짓말을 하셨다는 건가?”
“대체 왜 그런 거짓말을…….”
“힘없는 테오도르 황자께서 누명을 쓰신 거군.”
정원 내 분위기가 점점 테오도르 쪽으로 기울어 갔다.
귀족들의 냉담했던 시선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몇몇은 테오도르 황자를 동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가장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테오도르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람이 등장해 자신의 억울한 누명을 단숨에 벗겨 주었다.
보랏빛 자수정처럼 단단해진 테오도르의 두 눈이 록사나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테오도르는 짙은 안개 속에 홀로 갇혀 있었다. 그런데 소년을 무섭게 짓누르던 눅눅한 안개가 한 사람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주변 풍경이 뚜렷해졌다. 그 자리에는 한 여름의 녹음을 가득 품은 록사나가 서 있었다.
그때 한 발 늦게 수습을 하려는 듯 빅토리아가 나섰다.
“나도 모르게 민감하게 반응을 해 버렸네요. 아이들이 서로 어울려 놀다 보면 이런저런 일들이 사소하게 생길 수 있는데 말이죠.”
가식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은 빅토리아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테오도르 님과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서 막시밀리언이 테오도르 님을 잘 따르거든요. 함께 놀다가 약간 오해가 있었나 봐요. 그렇지, 막시밀리언?”
“네, 어머니. 제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테오도르 삼촌이 보여서 같이 놀려고 했어요. 그런데 일부러 길을 막고 시비를 걸려는 줄 알았나 봐요. 제 친우들이 앞으로 나섰다가 테오도르 삼촌이랑 살짝 부딪친 것 같은데… 넘어지셨어요.”
어머니의 눈짓에 막시밀리언이 영악하게 대꾸했다.
아들의 대답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빅토리아가 록사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리 막시밀리언이 혼자 있는 테오도르 님을 자주 챙기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네요.”
밝은 갈색인 빅토리아의 눈동자는 빛을 받아 언뜻 황금색으로 보였으나 짐승의 눈처럼 번뜩였다.
록사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이 자리에 있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빅토리아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었다.
빅토리아가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를 하니 바람에 부는 갈대처럼 테오도르에게 호의적이었던 시선들도 서서히 거두어졌다.
힘없는 황자보다는 황후가 될지도 모르는 여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으리라.
【 누구에게도 받아 보지 못한 】
권력을 쥔 자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였다.
록사나가 이 사건을 목격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황궁에 입궁하자마자 록사나와 아스테리온은 외무부의 수장인 파이퍼 백작을 마주쳤다.
파이퍼 백작이 아스테리온에게 대화를 청했다.
혼자가 된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이 돌아올 동안 정원을 둘러보고 있겠다며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그녀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을 피해 황실의 정원에 딸린 오솔길을 산책했다.
다른 귀족가보다 한참 늦은 공작가의 입장 순서를 생각하며 록사나는 정원의 깊숙한 곳으로 계속 발길을 옮겼다.
정원수로 감싸인 오솔길에 들어섰을 때였다. 한 소년이 이미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년의 뒷모습은 록사나 자신처럼 무척 외로워 보였다. 그 소년은 테오도르였다.
사실 록사나는 테오도르를 이때 처음 보았고, 귀족가의 아이보다 낡은 옷차림에 소년이 황자인지도 몰랐었다.
갑자기 나타난 막시밀리언 무리가 하는 말을 듣고서야 소년이 7황자 테오도르임을 알게 되었다.
만약 록사나가 막시밀리언과 테오도르의 일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울타리 하나 없는 어린 황자는 이 자리에서 조카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진실을 열심히 부르짖어도 다수의 입은 한 명을 쓰러뜨리기가 쉽다.
잠시 사건을 회상하던 록사나가 홀로 서 있는 테오도르 곁으로 발걸음을 옮겨 옆에 섰다. 그 모습이 마치 테오도르의 보호자를 자청하는 듯이 보였다.
빅토리아의 한쪽 눈썹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는 걸 보며 록사나가 입을 떼었다.
“이제 오해라는 게 밝혀졌으니 사과를 하시면 되겠군요.”
말을 마친 록사나가 막시밀리언과 그 친우들에게로 시선을 살짝 옮겼다가 빅토리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슨 사과를……?”
빅토리아가 어이없다는 듯 말을 뱉었다.
록사나가 자신의 옆에 있는 테오도르의 어깨를 한 팔로 살짝 감싸 안았다.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록사나를 올려다보았다. 소년의 눈동자 색이 활짝 핀 라일락 같았다.
록사나의 시선 또한 따스하게 테오도르에게 닿았다.
“테오도르 전하,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에요. 막시밀리언 저하와 영식들, 그리고… 로웰 영애가 사과를 하면 받아 주실 거죠?”
로웰 영애…….
사람들이 입을 쩍 벌렸으나 북적이던 황실 정원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곧 깨어질 거울처럼 빅토리아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금이 갔다. 테오도르의 몸 또한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