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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2)화 (12/214)

12화 

록사나는 추수절이라는 행사의 의미보다 아스테리온과 함께 참석하는 몇 안 되는 사교 활동이라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었다.

한동안 바빴던 남편과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록사나는 어느새 미래에 대한 고민들을 잊어버리고는 다가오는 추수절을 잔뜩 기대했다.

결혼 생활 내내 아스테리온과 나들이 한번 해 본 적 없는 그녀에게 이런 공식적인 행사 참석은 소소한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나마 그와 내가 서로를 멀쩡히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니까.’

침실을 제외하고, 항상 바쁜 그와 온전히, 그것도 제대로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비록 오고가는 마차 안에서 마주할 뿐이었지만.

* * *

리온 제국의 추수절이 시작되었다.

정오부터 해가 지기 전까지는 황실 정원 파티가 진행되었다. 미성년자인 귀족가의 자제들을 위한 시간이었다.

해가 지는 저녁부터는 그레이트 홀에서 무도회가 시작된다. 이곳엔 성인만 입장이 가능했다.

추수절 첫날,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면서 하늘이 서서히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각자 집안의 재력을 과시하며 한껏 꾸민 소년 소녀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황궁 정원의 곳곳에 자리했다.

알코올이 없는 음료를 들고,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화려한 파티를 즐겼다.

더 나이가 어린 아이들은 무리 지어서 정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왁자지껄한 정원의 중앙 분수대와는 달리 정원수로 감싸인 안쪽은 한산했다.

록사나는 귀족들에게 붙들린 아스테리온과 떨어져서 정원수를 지나 홀로 오솔길에 들어섰다.

‘역시. 사람들 시선 피하기에는 이곳이 좋네.’

굳어 있던 표정을 한결 풀며 록사나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늑한 장소를 물색하던 그녀의 눈에 마음에 드는 곳이 나타났다.

커다란 나무들로 동그랗게 둘러싸인 모양새였는데, 안쪽에는 넓은 빈 공간이 자리했다.

‘아.’

막 안쪽으로 한 발 내딛던 록사나가 걸음을 멈췄다. 그곳에는 이미 선객이 있었다.

* * *

소년의 은발 머리가 저물어 가는 빛을 받으며 반짝였다. 추수절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밝은 얼굴과는 달리 소년의 얼굴에는 침울함이 묻어났다.

귓가에 들려오는 악사들의 연주는 풍성한 추수의 계절을 노래하고 있었지만, 소년의 마음은 쓸쓸했다.

어쩔 수 없이 정원 파티에 참석했지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소년이 정원을 떠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무리를 지은 아이들이 나타났다.

아이들은 여덟에서 열 살 정도로 보였다. 그들 중 백금발의 남자아이가 무리를 이끌었다.

아이들은 일제히 은발 머리 소년이 있는 쪽을 향해 다가갔다. 만약 누군가 보았더라면 저러다 부딪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걸음 속도가 빨랐다.

상념에 빠져 있던 소년도 그들을 발견했다. 피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에는 늦었다.

백금발의 막시밀리언이 가만히 서 있는 소년의 몸을 거칠게 밀어 버렸다.

“저리 비켜! 왜 내가 가는 길을 막는 거야?!”

소년 테오도르가 그 힘에 밀려 넘어지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푸핫! 크큭큭.”

막시밀리언과 함께 온 세 명의 아이들이 테오도르를 보며 낄낄거렸다.

분했지만 테오도르는 의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다른 아이들보다 체구가 왜소한 어린 소년의 옷에는 여기저기 흙이 묻어 있었다.

자신을 벌레처럼 바라보는 아이들의 악의적인 시선을 받아 냈다.

테오도르는 움츠러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막시밀리언, 네가 일부러 와서 부딪친 거잖아.”

“무슨 소리야? 영식들, 내가 그랬어?”

시치미를 뚝 떼는 막시밀리언의 말에 한 아이가 옆에서 거들었다.

“황세손 저하, 저희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7황자님이 저하께서 가시는 길을 일부러 막았습니다.”

“맞습니다.”

“거짓말을 하시다니, 뻔뻔하시네요.”

다른 두 아이들도 한마디씩 거들며 이에 동조했다.

“그렇다는데?”

막시밀리언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후우.”

테오도르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 아마 피했어도 이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었으리라.

수없이 이런 상황들을 겪어 온 테오도르였다.

테오도르는 대륙에서 막강한 리온 제국의 황자였지만, 뒷배 하나 없는 황족이었다. 든든한 울타리였던 테오도르의 어머니는 4년 전에 돌아가셨다.

외가인 제스티움 백작가는 황궁에서 먼 변방에 위치했고, 명맥만 겨우 유지되고 있었다.

아버지인 알프레드 황제는 소년에게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반면에 막시밀리언은 테오도르의 큰형인 황태자 도노반의 장자로 황실에서 모두가 떠받드는 황손이었다.

사실상 테오도르와 막시밀리언은 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자신보다 세 살 많은 어린 삼촌을 무시하며 막 대했다.

테오도르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늘도 억울함과 서글픔만이 가슴 안에 소복소복 쌓여 갔다.

언제쯤에나 이런 상황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테오도르가 입을 다물고 있자, 자신의 뜻에 수긍했다고 생각한 막시밀리언은 어이없는 말을 던졌다.

“사과해.”

“뭐?”

테오도르가 황당해서 반문했다.

“내 길을 막았잖아! 그러니까 사과해야지.”

입술을 꽉 깨물며 테오도르가 막시밀리언을 노려보았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황궁 거지 주제에.”

“낄낄낄.”

“큭큭큭.”

막시밀리언과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테오도르의 반응을 즐기며 웃었다.

테오도르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얼굴까지 일그러지려 했지만 간신히 버텨 냈다.

테오도르는 황실에서 방치된 존재였고,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궁에 사는 황자라고 보기에는 옷차림이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막시밀리언은 지루하거나 심심해질 때면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테오도르를 찾아왔다.

늘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고, 쉼 없이 시비를 걸며 괴롭혔다. 이들에게는 그저 재미있는 놀이 중 하나였다.

테오도르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도 빈번했다.

황실의 귀한 물건들을 일부러 깨뜨리고는 함정에 빠뜨리거나, 막시밀리언이 아끼는 물건을 테오도르의 낡은 궁에 숨겨 두기도 했었다.

교묘하게 가짜 목격자까지 만들어서 테오도르가 범인으로 몰리는 경우도 여러 번 발생했었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그때마다 사실을 말했었지만, 아무도 테오도르를 믿어 주지 않았다.

황궁 사람들은 테오도르의 잘못이라고 판단했고, 황족의 수치라고 떠들었다.

날이 갈수록 테오도르의 몸과 마음은 멍이 들고 흉터로 얼룩졌다.

오늘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테오도르와 막시밀리언이 팽팽하게 대치했다.

그때, 한 시종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황세손님!”

자연스레 아이들의 시선이 시종에게로 향했다.

“황태자비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어머니께서?”

“네.”

실제 황태자비는 이사벨 마르퀴스지만 그녀의 슬하에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다.

반면에 방금 시종이 말한 황태자비는 이사벨이 아닌 막시밀리언의 생모 빅토리아 로웰을 가리켰다.

빅토리아는 원래 법도대로라면 로웰 후작 영애로 불리는 것이 맞았다. 현 제국 법상 황태자는 한 명의 정비만을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황태자라도 황제가 되기 전에는 후궁을 들일 수 없었다. 아무리 빅토리아 로웰이 도노반의 암묵적인 두 번째 비이고, 그녀가 낳은 막시밀리언이 황세손이어도 말이다.

그러나 황실과 사교계에서는 지금까지 그 누구도 잘못된 호칭을 바로잡지 않았다.

“어서 가시지요.”

시종이 막시밀리언을 재촉했다.

* * *

막시밀리언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한 번 쳐다보고는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완전히 사라졌다.

혼자 남은 테오도르가 터덜터덜 힘없이 자리를 떴다.

방금 전까지 소란스러웠던 곳에 정적이 내려앉으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과 풀벌레 소리가 그 빈 공간을 채웠다.

‘나설 걸 그랬나.’

나무 뒤에서 그 모든 광경을 목격한 록사나는 축 처져 있던 7황자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자꾸만 아른거렸다.

록사나는 그 자리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가 그레이트 홀 입장 시간이 가까워 오자, 그때서야 다시 움직였다.

오솔길을 빠져나가자, 정원 입구 쪽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무도회가 열리는 그레이트 홀로 가기 위해서는 그들을 지나쳐 가야 했다.

곧 자신에게 향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생각하니 달갑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록사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졌는지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점점 커져 갔다.

그 사이를 뚫고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세손이 가는 길을 막고 행패를 부렸다는 말입니까?”

“네, 어마마마. 여기 있는 영식들도 보았습니다.”

막시밀리언이 옆에 있는 아이들에게 눈짓을 했다.

“맞습니다, 황태자비 전하.”

세 명의 영식들이 입을 모아 동의했다.

우뚝.

록사나가 걸음을 멈춰 섰다.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한 번쯤 들어 본 목소리다 했더니 역시나 그들의 얼굴도 낯익었다.

록사나가 시선을 조금 옆으로 돌렸다. 빅토리아 로웰 앞에 은발의 깡마른 소년이 위태롭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7황자 테오도르였다.

사람들의 눈빛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차갑게 번뜩거렸다. 그 시선들은 오롯이 테오도르를 향하고 있었다.

비단결 같은 백금발을 늘어뜨린 빅토리아가 붉은 입술을 열었다.

“테오도르 님, 왜 그러셨습니까?”

“…….”

굳게 입을 다문 테오도르를 보며, 빅토리아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하……. 황족은 언제나 품위 있게 행동해야 함을 모르지 않으실 터인데 이리 경거망동하시다니요. 더구나 오늘은 추수절입니다. 넉넉한 마음을 가지셔야지요.”

이어지는 말은 멋모르는 아이를 타이르는 듯 부드러웠지만 실상은 수많은 가시를 품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시종에게 끌려오면서 이렇게 되리라는 걸 짐작했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열심히 말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테오도르가 자수정 빛의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오는 것까지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힘없는 어린 소년의 곁에는 그의 억울함을 증명해 줄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본인의 잘못을 알고 계시다니 다행이군요.”

입을 열지 않는 테오도르를 보며 빅토리아가 저 좋을 대로 판단했다.

테오도르는 빅토리아의 말에 반박 한마디 하지 못했다. 빅토리아의 앞에 끌려온 순간부터.

아니, 빅토리아가 그녀의 아들인 막시밀리언의 이야기만을 들은 순간부터 모든 일의 원인과 잘못은 테오도르로 확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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