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1)화 (11/214)

11화 

업무가 많지 않을 거라는 록사나의 말을 믿지 않았던 두 시녀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말이 사실임을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본가에 있는 자신들의 시녀들과 비교했을 때, 3분의 1도 안 되었다.

록사나는 공작가의 내정에 손을 대지 않았고, 사교계에 참석하는 일도 무척 적었다.

록사나가 꾸미는 데도 관심이 없어서 그들이 시중드는 횟수 자체가 적었다.

덕분에 마리나는 쇼핑을 즐길 시간이 넉넉했고, 크리스틴은 공작의 집무실 주변을 수시로 맴돌았지만 그다지 소득은 없었다.

* * *

아스테리온이 지하 감옥을 막 빠져나왔다.

비밀리에 파견 보냈던 정보원이 잡아 온 자를 심문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는 대조적으로 옷에 배인 피비린내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아스테리온은 울긋불긋한 가을의 빛깔을 입고 있는 나무들이 자리한 길을 따라 걸었다.

본관 앞에 다다르자, 록사나가 막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우뚝.

아스테리온의 걸음이 대번에 멈췄다.

그를 발견한 록사나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걸어와 앞에 섰다.

“아스테리온.”

그녀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드러났다.

록사나와의 거리가 열 걸음쯤 남았을 때, 아스테리온이 한 발 뒤로 몸을 물렸다.

이를 본 록사나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걷히고,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그녀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서운한 마음을 애써 털어 내며 록사나가 아스테리온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아스테리온이 이번에도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록사나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면 아스테리온이 한 발 뒤로 물러나는 서너 번의 공방이 되풀이되었다.

“안 다가갈게요.”

힘없는 목소리로 록사나가 말했다. 아스테리온은 대꾸 한마디 없었다.

록사나는 저를 냉정하게 밀어내는 그의 태도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밤에는 제법 말 상대를 해 주면서……. 왜?’

거의 매일 밤마다 자신을 찾아오면서도 침실 밖에서만 마주치면 그는 늘 그녀에게 거리를 벌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을 하나 세우듯이 말이다.

결혼 이후 침실 밖에서 그와 마주하기만 하면 이런 상황은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밤에는 더없이 뜨거운 사내인데, 낮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어 그녀의 속을 태웠다.

매번 상처를 입으면서도 록사나는 그에게 다가가고 또 다가갔다. 아무리 자신이 그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고, 서로 계약으로 묶인 관계라지만 원만한 사이로 지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정말 너무했다.

“인사 정도는 받아 줄 수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싫어요?”

록사나는 자신도 모르게 톡 쏘아붙였다.

“…싫은 게 아냐.”

마지못해 대답해 준다는 듯 그의 응답은 한 박자 느렸다.

“그렇겠죠.”

아스테리온의 대답에도 록사나의 기분은 풀릴 줄 몰랐다.

기분 상한 얼굴로 입을 꾹 닫아 버린 록사나를 대신하듯 이번에는 아스테리온이 물었다.

“산책이라도 가는 길인가?”

“맞아요, 산책 가요.”

그녀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같이 산책할래요?”

“아니.”

칼 같은 거절이 돌아왔다. 록사나의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옅은 물기가 차올랐다.

“흥, 이젠 나도 싫거든요.”

휙!

록사나가 단번에 몸을 돌려 제 갈 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입술을 꾹 깨문 그녀의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멀어져 가는 록사나를 바라보는 아스테리온의 심장 한구석이 쿡쿡 쑤셨다.

그가 잠시 오른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지그시 눌렀다. 그럼에도 아픔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자신을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미소 짓는 록사나의 표정이 슬픔으로 물들어 가는 건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록사나를 만날 때마다 왜 항상 자신의 몸에는 피비린내가 배어 있는 상태인지……. 그렇다고 사실대로 그녀에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어떤 사람에게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피비린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끔찍하고 지독한 피비린내를 그녀가 맡게 할 수는 없다.

무겁게 가라앉는 심장을 애써 외면하며 아스테리온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빨리 돌아가 지겨운 이 피비린내를 씻어 내고 싶었다.

* * *

아스테리온에게서 제법 멀어졌다는 느낌이 들자, 록사나가 후원의 오솔길 사이에 주저앉았다.

얼굴을 치맛자락 사이에 파묻기 무섭게 억지로 참고 있던 서러움이 퐁퐁 쏟아졌다.

“흡.”

꼭 다물린 입술 사이로 울음이 배어 나왔다.

혼자 하는 사랑은 몹시도 그녀를 아프게 했다.

차라리 결혼 전이 더 나았다. 그때도 똑같이 혼자 마음 주고, 혼자 사랑을 했는데…….

마음의 상처의 깊이는 그때와 너무나도 달랐다. 장미 가시에 찔리는 아픔이었던 것이 지금은 칼로 심장을 벤 듯이 너무 아팠다.

‘나빴어. 도대체 왜, 왜?’

록사나도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아니,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는 별개의 문제였다. 그는 그녀에게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러면서 잘도 매일 밤 찾아오다니……!’

일순 분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도 싫어하는 게 아니어서 금방 사그라들었다.

얼마나 훌쩍였을까.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남은 눈물을 훔치며 록사나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너무 울어서 그런 건지 순간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옆에 있던 나무에 손을 짚으며 이내 중심을 바로잡았다.

잠시 어두워졌던 시야가 돌아오고 어지러움이 사라지자, 록사나는 아름드리나무가 있는 후원 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 * *

어느 덧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공작님이 마님을 자주 찾으시는데 왜 4년이 되도록 후계자 소식이 없지?”

“그러게. 혹시 불임 아닐까?”

“누구? 공작님? 아니면 공작 부인?”

“당연히 공작 부인이겠지. 공작님은 소드 마스터시잖아.”

줄리와 파울라가 소곤거리며 말을 주고받았다.

“애들아!”

데이지가 깜짝 놀라며 주변을 허둥지둥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 주변에 다른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 얘. 데이지, 너는 꼭 그러더라. 우리가 뭐 틀린 말 했니?”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없는 말 지어낸 것도 아니고.”

공작 부인이 불임이라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널리 퍼져 있었다. 한미한 가문 출신에 후계자까지 없는 공작 부인의 위치는 카일라니 공작가 안팎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위태로움을 가중시켰다.

특히 가신들 사이에서는 이를 문제 삼고 있는 이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또한 일부 귀족가 영애들은 내심 카일라니 공작 부부가 하루 빨리 이혼하기를 바랐다.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없으니 공작과 재혼하게 되면 후계 문제로 속 썩을 일이 없을 거다.

즉, 재혼이라고 해도 전혀 흠이 되지 않는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카일라니 공작은 재력과 외모, 권력을 모두 갖춘 상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후계 문제에 있어서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은 무심하고 태연했다. 주변에서 후계 문제를 아무리 들먹여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아직은 신혼 생활을 충분히 즐기고 싶다는 게 그의 주된 이유였다. 무려 4년 동안이나 말이다.

만약 이런 공작의 비호가 아니었다면 공작 부인은 진작 쫓겨났으리라.

* * *

딱히 할 일은 없지만, 주로 책과 차를 끼고 살며 쌓여 가는 돈을 헤아리는 재미는 제법 쏠쏠했다.

지금까지 모은 돈이면 최고 귀족들이 사는 1구역에 번듯한 주택 구매는 물론 가게도 차릴 수 있을 만큼 넉넉했다.

“오늘은 무슨 소식이 실렸나.”

록사나는 신문을 뒤적였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부동산 시세 등을 어림짐작하기에 신문만큼 좋은 수단은 없었다.

잠시 동안 모든 지면을 가볍게 훑어본 록사나가 신문을 내려놓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지금의 삶에 나름 만족했다. 언젠가 이혼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지금처럼 아스테리온과 살고 싶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비껴가는 건 마음 아프지만, 내 몸을 싫어하지는 않으니까……. 언젠가는 나를 바라봐 주지 않을까?’

비굴하고 서럽지만 이렇게라도 그에 곁에 계속 머무르고 싶었다.

지금처럼 가끔씩 부부 동반으로 사교계에 나가고, 권력은 없지만 그의 부인으로서 옆에 설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들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늘 뜻대로 되지 않는 법.

‘만약 그와 헤어져야만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할까?’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시큰하게 저려 왔다.

록사나는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해 그동안 한 푼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계획도 나름 세워 놓았다.

바로 상단을 시작하거나, 아니면 이곳저곳 여행을 좀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그때 정착해 생활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공작가의 내정 권한이 주어지지 않아 남들에게 자신의 운영 능력을 보여 줄 기회가 없었지만, 웬만큼 뭐든지 잘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남몰래 문라이트라는 상단을 통해 진행한 투자들도 성공적이었다.

‘내겐 다른 세계의 지식과 정령의 힘도 있으니까.’

록사나가 자신의 방 주변 기척을 살핀 후, 한 손을 펼쳤다. 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손안에 가느다란 기운들이 모여들더니 어린아이 머리만큼 둥글게 커졌다.

록사나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가득 번졌다.

‘이제 정령의 힘을 제법 회복했어!’

끊임없이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사실 예전과 비교하면 5분의 1에도 한참 못 미치지만, 제 한 몸 정도는 충분히 지켜 낼 만한 힘이었다.

그때였다.

똑똑.

록사나가 깜짝 놀라며 힘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 그와 동시에 문 너머에서 어린 하녀 아이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어, 들어와.”

록사나가 이마에 맺힌 땀을 재빨리 훔쳐 내면서 한 박자 늦게 응답했다.

침실로 들어온 아이린이 록사나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서신 하나를 공손히 내밀었다.

“여기요. 집사님이 가져다 드리라고 한 거예요.”

록사나가 서신을 받아 들었다. 봉투의 겉면에는 금색의 황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다음 달이면 추수절이구나.’

늘 이맘때쯤이면 황실에서 추수절 초대장이 전달되곤 했다.

추수절 축제는 매년 10월 셋째 주나 넷째 주에 3일간 열렸다. 올해는 추수 시기가 예년보다 빨라서인지 10월의 셋째 주로 결정되었다.

이 기간 동안 평민들은 3일간 거리 축제를 벌이고, 황실에 초대를 받은 귀족들은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