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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0)화 (10/214)

10화 

록사나가 양손을 펼쳐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그녀의 손바닥 위에 힘이 모이며 소용돌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작게 몰아치는 소용돌이는 체리만 한 크기를 이루었다.

곁에서 조금 떨어져 놓여 있는 피크닉 바구니 쪽으로 록사나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의지에 따라 바구니의 뚜껑이 열어젖혀지고, 안에 담겨 있던 음료와 빵이 차례대로 들어 올려졌다.

록사나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흩어지려는 집중력을 끌어 올리며 자신의 앞에 그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휴, 힘드네.”

이마의 땀을 맨손으로 훔치는 그녀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정령의 힘은 여전히 미미하게만 사용할 수 있었다.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에 사용했던 힘과 비교하면 겨우 아기 뒤집기 수준이 될까 말까였으니까.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록사나는 스스로를 달랬다.

꼬르륵.

힘을 썼더니 배가 고팠다. 방금 정령의 힘으로 꺼내 놓은 냉차와 빵을 먹기 시작했다.

“샌드위치가 먹고 싶은데. 안 되겠지?”

주방장에게 샌드위치 만드는 다양한 방법을 직접 알려 준다면 언제든 맛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튀지 않는 공작 부인이 되는 것이 그녀의 목표임을 상기했다.

* * *

“지금까지 시녀 자리에 지원한 명단입니다.”

칼리드가 서류를 록사나에게 건넸다.

록사나가 명단을 쭉 살펴봤다.

지원자는 총 열 명이었다. 백작가에서 준남작가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그 가운데 카일라니 공작가의 가신 가문 소속이 일곱 명이고, 나머지 세 명은 타 지역에 있는 가문의 영애였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지원자가 많네요.”

카일라니 공작가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사실 적은 숫자였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칼리드다. 하지만 그는 록사나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어린 공작 부인은 사교계에 나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데뷔탕트도 치르지 못했다.

현 공작 부인은 사고로 부모를 잃고, 천애 고아가 되었다. 그녀가 미성년자였기에 아벨리오 남작 작위는 황실로 넘어갔고, 남은 재산이라고는 살던 집 하나였다고 들었다. 그녀를 돌봐줄 만한 가까운 친척도 없었다.

록사나의 부모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던 선대 공작 부인이 그들의 딸을 거두었다.

선대 공작 부인이 살아 계셨다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지난 7년간 지켜봐 온 록사나는 영특했지만 세상일에 무관심했다. 조용한 성격으로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마님께서 필요하신 인원만큼 뽑으시면 됩니다.”

“두 명이면 될 거 같아요.”

적어도 세 명은 뽑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록사나가 하녀 일을 하긴 했었지만, 귀족가의 생활이나 예법에 어두운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족 가문의 지위와 재정 여건에 따라 고용하는 시녀의 수는 다르다. 고위 귀족 안주인의 경우 평균적으로 세 명에서 다섯 명의 시녀를 두었다.

“면접 날짜는 언제로 하시겠습니까?”

“면접 없이 바로 채용하려고요.”

칼리드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록사나가 설명을 덧붙였다.

“타 지역 가문은 어떤 의도로 접근하는 건지 모르니까, 제외예요. 가신 가문이라도 데일 백작가처럼 평판이 안 좋거나, 우리와 정치적 성향이 다른 가문들도 제외했어요.”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면 적당한 곳은 두 가문 정도네요. 크리스틴 펠립스 영애와 마리나 브린 영애를 제 시녀로 들이죠.”

“네, 알겠습니다.”

칼리드는 록사나의 선택이 흡족했다.

펠립스 자작가는 말 사육으로 나름 유명한 가문이었다. 브린 남작가는 철을 다루며, 무기 등을 주로 생산했다. 카일라니 공작가와도 종종 거래하는 가문들이었다.

“마님, 정말 시녀를 더 들이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사교계에서 록사나를 무시하지는 않을까 염려되었다.

록사나도 칼리드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부부 동반 모임이 아니고서는 티 파티를 포함한 다른 초대에 응할 마음이 없었다.

그렇기에 시녀가 더 필요하지도 않았고, 평소 요란하게 치장을 즐기는 성미도 아니었다.

“네, 두 명이면 충분해요.”

그로부터 사흘 뒤, 공작가의 1층 응접실에는 크리스틴 펠립스와 마리나 브린이 나란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교계 활동을 하며 안면을 텄던 두 사람은 자신들을 안내해 줄 집사를 기다렸다.

크리스틴은 자신들에게 제공된 차를 마시며 한껏 들뜬 기분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사모하는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을 가까이서 매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녀 출신을 공작 부인으로 맞아들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었다.

당장 공작가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자격과 명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펠립스 자작인 아버지와 그녀의 오라버니들이 나누는 얘기를 엿듣게 되었다.

사교계에서 돌고 있는 카일라니 공작과 관련된 악의적인 소문들과 신황태자파의 압박을 더 이상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공작은 반강제적으로 결혼을 서둘러야 했고, 그 상대가 하녀 출신인 것은 카일라니 공작가의 권력이 더 강해지는 걸 바라지 않는 황실의 눈총 때문이리라.

부유한 가문에다 아름다운 외모로 칭송받는 크리스틴 자신에게 아스테리온이 청혼서를 넣지 못한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었다.

“차향이 좋네요.”

솔직히 차향보다 찻잔이 너무 예쁘다고 말하고 싶었던 마리나 브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크리스틴이 맞장구를 쳐 주었다.

마리나는 은연중에 자신의 본가와 공작가의 재력을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브린가가 부유하기는 했지만, 공작가만큼은 아니었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물품을 마리나는 사랑했다. 그녀가 이 찻잔 세트를 사려면 가문 사람들이 최소 한두 달 동안은 쉬지 않고 철을 담금질해야 한다.

가족들은 그녀의 취향을 존중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지속적인 취미 생활은 집안에 부담이 되어 갔다.

브린 남작은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막내딸에게 스스로 돈을 벌라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공작 부인의 시녀 자리에 지원하라고 부추겼다. 마리나는 싫다고 단칼에 거절했다.

시집가기 전까지는 편하고 자유롭게 그녀의 우아한 취미 생활을 마음껏 즐기고 싶었다.

브린 남작은 딸 몰래 지원서를 공작가에 제출했다.

며칠이 지나, 마리나 브린을 공작 부인의 시녀로 고용한다는 편지를 받았다.

사실을 알게 된 마리나가 그녀의 아버지 앞에서 울고불고하며 뒹굴었다.

그때 브린 남작이 딸의 눈앞에 편지를 디밀었다. 그는 자신의 딸에게 가장 중요한 내용을 친절하게 콕 짚어 주었다.

한 달 급여가 무려 50골드였다. 딸의 한 달 용돈보다 열 배나 많았다.

마리나가 눈물을 뚝 그쳤다. 그녀가 원하는 예쁜 것들을 가족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신나게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녀의 동의가 없었다는 약점을 잡아 아버지와는 다시 거래를 했다.

한 달 용돈의 절반인 2골드 50실버를 매달 지급받는다는 계약서를 품에 안고 마리나는 카일라니 공작가에 오게 되었다.

* * *

칼리드가 두 사람을 데리고 록사나의 방에 딸린 응접실에 들어섰다.

“마리나 브린입니다.”

“크리스틴 펠립스입니다.”

록사나를 마주한 두 시녀가 인사를 했다.

크리스틴이 재빠르게 공작 부인을 훑었다. 그녀는 흔치 않은 검은 머리에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제법 예쁘장한 얼굴에 체구는 자신들보다 작았다.

‘동갑이라고 들었는데 한참 어려 보이네.’

나이를 알지 못했다면 열다섯 살쯤 된 소녀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록사나 카일라니예요.”

차분한 록사나의 목소리가 크리스틴의 상념을 깨웠다.

“마님,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록사나가 칼리드를 바라보며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다 편하게 앉도록 해요.”

칼리드가 응접실을 나가고, 마리나와 크리스틴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하녀 데이지가 세 사람 앞에 차와 다과를 준비해 주었다.

크리스틴은 공작 부인인 록사나보다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어 셋 중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본인은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록사나는 크리스틴이 날카롭게 자신을 훑어 내리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마리나는 적당히 화사하되 앙증맞은 레이스가 장식된 연한 핑크빛 드레스 차림이었다. 귀여운 인상이라서 그런지 잘 어울렸다.

각자 차를 한 모금씩 들고 나자, 록사나가 입을 떼었다.

“숙소는 미리 안내받았어요?”

“네, 공작 부인.”

마리나만 대답했다.

록사나의 시선이 크리스틴에게로 향했다.

“펠립스 영애는 숙소를 안내받지 못했나요?”

“받았습니다.”

크리스틴이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칼리드가 나간 후, 묘하게 크리스틴의 태도가 변했음을 알면서도 록사나는 일부러 계속 모른 척했다.

“그랬군요. 대답이 없어서 못 받은 줄 알았는데…….”

“…….”

록사나가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크리스틴은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실수를 깨달았지만 사과할 마음이 없었다. 굽히고 들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작 부인, 시녀는 저희 둘뿐인가요?”

때마침 마리나의 목소리가 크리스틴을 구해 주었다.

“맞아요.”

“시녀가 저희 둘뿐이라니…….”

크리스틴이 재빠르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걱정하는 말투였지만 말끝에 은근슬쩍 비웃음을 흘렸다. 고작 시녀가 둘뿐인 공작 부인의 무능함을 비꼬는 것이었다.

록사나가 크리스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공작 부인의 자리를 지키자고 마음먹었다지만 그렇다고 은근히 시비를 거는 크리스틴을 보고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또한 하녀 일을 하던 몰락 귀족 출신이 공작 부인이 되었으니 시기와 질투를 받을 걸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공작가와 내 위신을 펠립스 영애가 나서서 걱정해 줄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시녀가 두 사람뿐이어도 할 일이 많지 않을 거예요.”

록사나가 차갑게 말했다. 크리스틴과 마리나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공작 부인의 매서운 표정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리나가 크리스틴에게 은근슬쩍 눈치를 주었다.

이에 크리스틴이 마지못해 입을 열어 사과를 했다.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여기서 내쳐진다면 공작가에 머물 수 없었기에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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