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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9)화 (9/214)

9화 

“큭, 어어어… 으윽…….”

고통을 이기지 못한 암살자의 재갈 물린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귀에서는 진득한 핏물이 흘러내렸다.

팔다리는 성한 곳 하나 없이 부러지고 비틀려 있었다. 몸 곳곳에서는 진물과 핏물이 배어 나와 악취를 가득 풍겼다.

암살자는 차라리 죽게 해 달라며 빌었지만 그의 마음대로 죽을 수가 없었다. 딱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극악한 고통은 계속되었다.

“네놈의 몸에 있는 문신을 전에도 본 적이 있지.”

암살자의 오른쪽 귀 뒤쪽에는 문신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정삼각형과 역삼각형이 겹쳐져 별 모양을 띠고 있었는데, 머리카락 속에 감춰져 있어서 자칫 못 보고 지나치기가 쉬웠다.

그것은 일반적인 별 문양이 아니었다. 여섯 개의 모를 가진 붉은빛 육망성이었다.

지금까지의 암살자들은 저런 문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또한 이번 침입에서 사살된 다섯 명과 고문을 받다 사망한 한 명도 저 문신이 아예 없었다.

“네놈은 다른 놈들과 다르게 도노반 마르퀴스의 첩자가 아니다. 맞지?”

“으으으…….”

대답을 하는 건지 신음을 하는 건지 모를 소리가 암살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스테리온은 암살자가 가지고 있는 저 별 문양을 전 황태자 네이든의 사고 현장에서 본 적이 있었다.

“너흰 분명 전 황태자 네이든 마르퀴스를 암살한 세력이지.”

순간 암살자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졌다.

그러나 소드 마스터인 아스테리온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배후가 누군지 밝혀라. 너희는 누구지?”

절대 밝힐 생각이 없는지 암살자가 신음을 흘리면서도 미약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스테리온이 옆에 서 있는 기사 중 한 명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기사가 암살자에게 다가가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냈다.

“순순히 자백한다면 편하게 보내 주도록 하지. 만약 가족이 있다면 시신이나마 그 품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재갈이 풀렸는데도 암살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한 카일라니 공작가를 해하지 않았다면 너희 가족에게는 어떠한 해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할 것이며, 이 모든 건 카일라니 공작이자 소드 마스터인 내가 맹세한다.”

암살자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어 떠지지 않는 눈으로 카일라니 공작을 바라보았다. 암살자의 눈에 희미한 빛이 감돌았다.

암살자를 향해 아스테리온이 몸을 기울였다.

“…그…….”

미약하게나마 암살자의 입술이 달싹였다. 귀를 기울인 아스테리온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라.”

마지막 단어를 내뱉은 암살자가 갑자기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아스테리온이 반사적으로 몸을 물리며 무형의 마나로 벽을 세우듯 그와 기사들을 감쌌다.

그때였다. 거품을 물고 눈동자를 뒤집은 암살자의 귀 뒤 쪽에서 검붉은 빛이 갑자기 터져 나왔다. 한순간에 강한 빛이 폭발했다.

퍽!

암살자의 머리가 폭발하듯 터지면서 핏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스테리온의 마나 장벽에 부딪힌 핏물이 아래로 흐르며 막을 부식시켰다. 심문실의 벽도 핏물이 튄 곳은 모두 녹아내렸다.

“이게 무슨!”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던 기사단장 세르지오와 기사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공작님, 이건 10년 전에 있었던……!”

전 황태자 네이든의 사고 현장에서 목격했었던 것을 떠올린 세르지오가 말했다.

“맞아.”

아스테리온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저 암살자의 배후가 네이든의 사건과도 연결되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암살자는 머리가 터져 버린 상태로 목 아래 부분만 남아 의자에 묶여 있었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시신을 잘 수습해 주도록 해.”

“알겠습니다.”

실마리를 제공해 준 암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다.

아스테리온이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을 가르며 침실로 복귀했다.

칼리드가 갈아입을 새 옷을 준비해 욕실로 향하는 아스테리온의 뒤를 따랐다.

“지금 공작 성에 남아 있는 1급 정보원이 몇 명이지?”

“다섯 명입니다.”

“그들을 모두 호출하도록 해.”

욕실 문을 닫기 전 아스테리온이 명했다.

“알겠습니다.”

피 묻은 옷을 벗어 던지고, 아스테리온이 욕조에 몸을 담그며 생각에 잠겼다.

근래 영지 공작 성을 침투한 암살자들을 떠올리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점점 더 거세지는 적들의 공격에 록사나에 대한 걱정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이대로 그녀를 내 옆에 묶어 둬도 괜찮을까?’

지금이라도 다시 적들의 시선에서 록사나의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숨겨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엘프 절맥증이 완치되기 전까지는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당장 그녀를 떠나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아스테리온은 마음 한구석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치료까지 3년의 시간은 걸리니까, 그 기간 동안은 그녀를 곁에서 볼 수 있어서 다행이군.’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들자, 그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가 금방 사라졌다.

몸을 씻은 후 의복을 갈아입은 아스테리온이 집무실에 도착하자 때맞춰 정보원들과 기사단장 세르지오, 부단장 헥터, 제1 보좌관 트레버, 칼리드가 자리했다.

아스테리온은 죽은 암살자에게서 얻어 낸 단서를 공유했다.

“‘로자렐이라언이트 로포렐레라스이트에 스텔라.’라고 했다고요?”

헥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반복되는 ‘로렐라이’를 빼면 ‘자이언트 포레스트에 스텔라’가 남지. 로렐라이는 단서를 제공한 암살자의 혈육으로 추측되고 말이야. 그자에게 특정 단어에 대한 제약이 걸려 있어서 우회적으로 혈육의 이름을 섞어서 말한 것 같아.”

“아!”

아스테리온의 명쾌한 해석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언트 포레스트는 로웰 후작 령에서 아주 가깝지요. 그리고 스텔라는 붉은 육망성 표식을 돌려 말하는 것 같고요.”

보좌관 트레버의 말에 사람들이 침음을 삼켰다.

“충분히 예상했었지만 그 능구렁이 같은 로웰 후작이 그곳에 뭔가 숨기고 있는 거군요.”

기사단장 세르지오가 말했다.

대체 그곳에 뭘 숨기고 있는지 유추하며, 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향후 대책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밀명을 받은 공작가 소속의 최정예 정보원들이 카일라니 공작 령을 떠나 은밀히 로웰 후작 령으로 향했다.

* * *

록사나가 공작의 집무실에서 아스테리온과 마주했다.

“공작 부인으로서 구체적으로 제가 뭘 하면 되죠?”

“부부 동반으로 가끔 사교계에 같이 나가는 거.”

“다른 건요?”

“티타임이나 초대 같은 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파티도 마찬가지야. 공작가 내정은 기존대로 처리될 거야.”

그녀에게 실권을 맡기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알겠어요.”

록사나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시선을 내리깔며, 그의 잔이 놓인 곳을 아주 잠깐 바라보았다.

아스테리온은 차에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마주하고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내내.

“궁금한 게 또 있나?”

록사나가 찻잔을 만지며 머뭇거리다 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침실 밖에서 아스테리온은 그녀를 차갑고 사무적인 태도로 대했다.

“음…….”

“…….”

아스테리온은 재촉하지 않고, 긴 다리를 꼬며 등을 소파에 느긋하게 기댔다.

결심을 한 듯 록사나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을 통해서 꼭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왜 저인가요?”

“다른 귀족가랑 엮이기 싫어서. 그대는 어디 갈 데도 없잖아.”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아스테리온의 말이 뾰족한 가시처럼 그녀의 가슴을 후비었다.

‘역시 그렇구나.’

록사나도 짐작하고 있었다.

“돈은 많이 주세요.”

보통 돈 얘기나 본격적인 협상은 계약 전에 논의해서 확정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나서야 그 협상 비슷한 걸 하기 시작했다.

록사나가 돈 얘기를 꺼냈지만, 재산에 욕심이 없어 보이는 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그의 아내는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건지도.

‘아내. 내 아내.’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아내’라는 말을 굴려 발음해 보았다. 무척이나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그의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은근히 바라보는 아스테리온의 시선은 록사나에게 위험하게 다가왔다.

잠잠하던 록사나의 심장이 팔딱거리며 뛰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며 말을 덧붙였다.

“제 조건을 제대로 얘기 안 한 것 같아서요.”

그와 이혼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더 이상 공작가에 머물 수 없을 테니까, 돈을 많이 모아 나중에 번듯한 가게라도 하나 차리고 싶었다.

잠시 후, 아스테리온이 입을 열었다.

“얼마를 원하지?”

록사나가 기억하기로는 선대 공작 부인 엘리노어가 한 달에 2천 골드 정도 사용했던 것 같았다.

“한 달에 2천 5백 골드요.”

“겨우 그 정도로 되겠어?”

록사나가 맑은 에메랄드빛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스테리온을 바라보았다.

“한 달에 5천 골드를 주지. 당신에게는 공작 부인에게 주어지는 재산이 없으니까.”

록사나의 입이 저절로 쩍 벌어졌다.

그녀는 모르지만, 공작 부인에게 배정되는 예산은 한 달을 기준으로 최소 4천 골드였다.

거기에다가 결혼과 함께 공작 부인만의 사유 재산으로 건물, 땅, 보석 등이 어마어마하게 주어지는 게 관례였다.

여기에서 나는 수익들이 있기 때문에 4천 골드라는 예산은 사실 카일라니 공작가의 규모를 생각하면 무척이나 낮은 액수였다.

5천 골드는 사유 재산이 없는 록사나를 위한 아스테리온 나름대로의 배려가 담긴 금액이었다.

“싫은가 보군.”

“아니요. 주세요! 5천 골드.”

록사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한 달에 5천 골드라니! 그 돈만 몇 년 모아도… 위자료가 없다고 가정해도 작은 영지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지 않을까?!’

“계약서를 작성하지.”

“그래요!”

그의 마음이 변할세라 록사나가 동의했다.

사랑도 제대로 못 받을 텐데, 돈이라도 챙겨야겠다. 물론 그의 잘난 얼굴도 뜯어 먹으면서.

* * *

결혼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났다.

공작가 후원 너머 깊숙한 곳에는 웅장한 아름드리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 아래에 록사나가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앉아 있었다. 가지마다 풍성하게 달린 나뭇잎이 그늘을 만들어서 시원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이 평온해진 록사나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청량한 자연의 향이 가슴을 채웠다.

이곳은 공작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사람들을 피해 숨다가 발견한 곳으로 그녀만의 휴식 장소이자 비밀 장소였다.

거대한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었지만 딱히 할 일이 없는 록사나는 이곳에서 자주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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