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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8)화 (8/214)

8화 

‘밤 상대로 젊은 여자를 찾는다고 했던가?’

끔찍한 소문을 떠올린 아스테리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당장에라도 저 돼지 같은 자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에 오가는 사람이 많고 잠행을 나온 상태인지라 밖으로 뻗어 나가려는 살기를 어렵게 갈무리했다.

“자작님, 공작가 고용인을 건드렸다가는 무슨 사달이 날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카일라니 공작가입니다.”

“흥! 고작 개만도 못한 하녀 하나 때문에 귀족이 움직일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니코 자작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멀리 떨어진 록사나의 몸을 훑어 내렸다.

‘흐흐흐. 카일라니 공작가 하녀라 그런지 역시 다른 것 같군.’

니코 자작이 두툼한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축였다. 하녀치고 잡티 하나 없이 뽀얀 피부와 가녀린 몸이 그의 구미를 몹시 자극했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이! 어서 데려오지 않고 뭐 하는 것이냐!”

“호, 혹시 또 모르지 않습니까. 카일라니 공작가는 고용인들 대우가 좋다고 합니다. 그러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봅니다.”

자작가에 고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하인은 오들오들 떨면서도 할 말을 했다.

니코 자작의 매질이 정말 무섭기는 했지만, 고향에 있는 어린 여동생이 떠올라 양심이 쿡쿡 찔렸다.

“흠흠. 네가 신참이라 귀족 사회를 잘 모르니까 내 친히 가르쳐 주마.”

또 한 번 노성을 터뜨릴 것 같던 니코 자작이 갑자기 점잖은 체를 했다. 그들 주변으로 한 무리의 귀족 영애들이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멀어지자, 니코 자작의 얼굴이 다시 야차같이 변했다.

“카일라니 공작가가 움직이려면 상대가 공작 부인 정도는 되어야지. 그러니까 잔말 말고 데려오기나 해! 네가 오늘 내 손에 맞아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다.”

니코 자작이 몸을 지탱하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올려 하인을 향해 위협했다.

울상을 지은 하인이 내리쳐지는 지팡이를 피해 냉큼 몸을 뒤로 물렸다.

“이놈이. 어서!”

지팡이가 빗나가자 약이 잔뜩 오른 니코 자작이 노성을 터뜨렸다.

“아, 알겠습니다.”

대답과는 다르게 록사나를 향해 다가가려는 하인의 행동은 옆으로 걷는 게처럼 한없이 굼떴다.

그때였다.

“컥!”

순식간에 두 사람을 낚아챈 아스테리온이 음침한 골목의 그림자에 몸을 묻었다.

덕분에 번화가 메인 거리는 더없이 평화로워졌다. 반면에 좁은 골목 안에는 공포가 내려앉았다.

쿵!

“큭.”

니코 자작의 몸이 짐짝처럼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니코 자작이 기절했다.

“윽.”

목덜미를 붙잡혀 숨통이 조인 하인이 신음을 간신히 내뱉었다.

아스테리온이 손을 놓자, 하인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공포감에 잔뜩 짓눌린 하인은 차마 고개를 들어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할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오물이 가득한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하인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툭.

하인의 앞에 묵직한 주머니 하나가 떨어졌다.

“갖고 떠나라.”

당장에라도 몸을 두 동강 낼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하인이 망설이는 것을 지켜봤던 아스테리온은 그에게 새롭게 살 기회를 주었다.

겁에 질려 있었으면서도 잘못된 주인을 말리고자 노력한 행동과 명을 수행하는 걸 꺼려 했던 태도가 그의 목숨을 살린 것이다.

하인은 직감적으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예, 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본능적으로 움켜쥐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꾸 주저앉으려는 몸을 겨우 일으켰다.

“가, 감사합니다.”

하인이 허겁지겁 몸을 돌려 달아났다. 자신에게 돈주머니까지 쥐여 주며 놓아주는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잠시라도 생각해 볼 겨를조차 없었다.

두 사람만 남은 좁은 골목에는 스산한 기운과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아스테리온이 기절해 있는 니코 자작에게 다가가 망설임 없이 두툼한 손을 마구 짓밟았다.

“으으윽!”

극심한 고통을 느낀 니코 자작이 번쩍 정신을 차렸다.

“누, 누구냐! 나는 니코 자작이다! 네가 귀족을 해하고도 감히 살아남기를 바라느냐?!”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를 내며 니코 자작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거대한 산 같은 남자의 모습을 본 그의 비대한 몸이 움찔거리며 담벼락에 딱 달라붙었다.

망토의 후드로 가려져 있어서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니코 자작은 괴한을 뚫고 달아날 자신이 없었다. 공포가 엄습했다.

으득!

괴한에게서 들려오는 소름 돋는 소리에 니코 자작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

“도, 돈을 원한다면 여기 있다.”

니코 자작이 피가 낭자한 손으로 허겁지겁 허리춤을 뒤적이더니 덜덜 떨며 돈주머니를 풀러 앞으로 내밀었다.

이에 괴한이 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돈주머니 대신 니코 자작의 멱살을 잡았다. 비대한 몸이 솜털처럼 위로 들어 올려졌다.

“으어어헉!”

“네놈은 이제 그토록 좋아하던 더러운 짓거리를 다시는 하지 못하게 될 거야.”

괴한이 짓씹으며 말했다.

퍽퍽. 퍽. 퍼버벅.

으악!

골목 안에 타격음이 울리며 비명 소리가 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비명 소리는 점점 흐느낌으로 변했고, 어느 순간에는 그조차 뚝 끊겼다.

다음 날, 니코 자작가에 황궁 수비대가 들이닥쳤다. 니코 자작은 바로 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의 몸이 성치 않다는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처사였다.

이후, 그동안 니코 자작이 저질러 온 각종 비리들이 하나둘씩 폭로되었다.

불법적인 사업은 물론, 고용인들을 지속적으로 학대하고 착취한 것과 더불어 그 밖의 변태적인 행적들이 낱낱이 까발려졌다.

채권자들이 몰려왔고, 결국 니코 자작가는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며 폭삭 망했다.

니코 자작은 운 좋게도 사형은 면했으나 평생 동안 감옥에서 썩어야 했다.

익명의 제보자에 의해 밝혀진 니코 자작의 극악무도한 만행으로 인해 사교계는 한동안 시끄러워졌다.

* * *

‘괜히 살려 뒀나?’

아스테리온은 니코 자작에 대한 처사가 더러운 눈과 입에 록사나를 올린 대가치고는 너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냥 죽이는 건 너무 자비로워.’

니코 자작은 평생토록 죗값을 받아야 했다.

당시의 기억을 갈무리한 아스테리온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공작 부인 정도는 되어야 공작가가 움직일 거라고 했던가.

니코 자작을 손봐 준 이후부터 그 말이 아스테리온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 * *

그때는 정말 운 좋게 자신이 더러운 오물 덩어리 니코 자작을 처리할 수 있었지만, 만약 그가 없는 곳에서 다른 놈들이 눈독을 들인다면……!

구역질 나고 소름 끼치게 역겨웠다. 이러한 생각만으로도 그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한동안 아스테리온은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사실 답은 아주 간단했다.

록사나 아벨리오가 록사나 카일라니가 되면 그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손쉬운 해결법에도 아스테리온은 선뜻 행동에 옮길 수가 없었다.

자신과 카일라니 공작가를 적대하는 세력은 많았고, 여러 가지 상황들이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으니까.

‘네이든처럼 잘못되게 할 수는 없어!’

친우였던 전 황태자 커플의 마지막을 떠올리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갔다. 결코 그들과 같은 결말을 만들 수는 없었다.

아스테리온은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하고 보다 더 나은 방법을 찾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고뇌의 시간은 한 번의 마주침으로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정원에서 페리도트빛 싱그러운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아스테리온 카일라니는 록사나 아벨리오에게 청혼을 하고 있었다.

‘난 너와는 다르게 반드시 지켜 내고 말 거야.’

멀리 떠난 옛 친우를 떠올리며 아스테리온이 속으로 되뇌었다.

집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느라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아스테리온이 자신의 개인 침실에 들어섰다.

침대에 누웠지만 수많은 상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그러다 심연으로 차츰 가라앉아 가던 순간,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상체를 일으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온몸의 기운이 순식간에 한 자루의 검처럼 날카롭게 벼려졌다.

‘손님이 오셨으니 맞아야겠지.’

그동안 바쁜 그를 대신해 기사단이 처리했었는데 오늘 밤은 발걸음이라도 해야겠다.

* * *

구름이 달을 가린 어두컴컴한 밤, 오늘도 어김없이 카일라니 공작저에 검은 그림자들이 숨어들었다.

어둠 속에 녹아드는 그들은 기척조차 내지 않고, 외성과 내성을 넘어 본관으로 향했다.

명망 높은 카일라니의 허술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은 정원의 조경수에 몸을 완전히 감추었다.

컥!

때를 맞추듯 어둠 속 곳곳에서 외마디 비명이 울렸다. 그 비명 소리는 그림자들이 몸을 감춘 정원 내에서 들렸다.

잠시 후, 정원에 숨어 있던 이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의 손과 어깨에는 커다란 검은 형체들이 들려 있었다.

“보고하라.”

카일라니 기사단의 부단장 헥터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에 기사단의 3조장인 마크가 앞으로 나섰다.

“침입자는 총 일곱 명으로 다섯 명이 사살되었고, 두 명은 기절시킨 상태입니다.”

“수고했다. 지하 감옥으로 옮겨라.”

“네!”

기사들이 썰물처럼 정원을 빠져나갔다.

헥터는 불 꺼진 본관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주군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과 정보부는 결혼식을 전후로 해서 적들의 침입이 집요해질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이에 대비해서 공작가의 정보부와 기사단은 서로 임무를 나누어 각각 첩자와 암살자들을 맡았다.

아니나 다를까, 카일라니 공작이 결혼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거의 매일 첩자와 암살자들이 숨어들었다.

그동안 공작가 고용인들에게 접근하려던 첩자들을 걸러내고 쳐 낸 수만 해도 열 손가락을 넘어섰다.

그나마 이번 침입은 일주일 만에 이루어진 공격이었다.

‘이제 좀 한동안은 잠잠해지겠지.’

그렇다고 저택의 보안과 경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헥터의 발걸음이 곧장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그의 주군에게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지하 감옥의 관리자 사무실에 아스테리온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암살자 처리 상황에 대한 헥터의 보고가 이어진 후, 두 사람은 심문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이미 사로잡힌 두 명의 암살자가 끌려와 있었다.

극강도의 심문이 시작되었고, 이를 버티지 못한 한 명의 숨이 끊어져 버렸다.

“너만 남았군.”

아스테리온이 심문실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그의 몸에서 뻗어져 나온 날카로운 기운이 암살자를 찍어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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