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당신은 체력이 너무 약해. 이것도 좀 먹어 봐. 맛도 좋지만 체력을 높이는 데 그 효능이 탁월하다니까.”
“…….”
어디서 구해 왔는지 이 세계에서는 처음으로 보는 인삼 같은 것이 꿀에 절여져 식사 메뉴로 올라왔다.
그것을 포크로 찍은 아스테리온이 그녀에게 내밀었다.
록사나가 입을 벌리자, 그녀의 입 안에 조심스럽게 넣어 주었다.
달달하면서도 쌉쌀한 맛이다. 인삼이 맞는 것 같다.
“잘 먹는군. 다른 이들은 입맛에 안 맞는다고 먹기 어려워한다던데.”
아스테리온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를 안을 때와 평상시의 온도 차가 극명하게 갈렸다. 온탕과 냉탕이 아니라 펄펄 끓는 온천수와 빙하를 넘나드는 것 같았다.
* * *
록사나는 침대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4일째 되는 날 아침부터 그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처음 아스테리온을 찾은 것은 보좌관이었고 그다음은 기사단장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찾는 사람들이 다섯 손가락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결국 중년의 집사 칼리드가 공작 부부의 침실로 향하는 응접실 문을 넘어섰다.
은밀한 침실 문 앞에 자리한 칼리드가 알렸다.
“공작님, 업무가 상당히 밀려 있습니다.”
딱 한 문장만 말하고는 무언 시위를 벌였다.
그날은 결혼식 이후, 공작 부부가 방에 틀어박힌 지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칼리드의 압박은 조용하지만 강했다.
그날 오후,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이 침실에서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업무로 복귀했다.
그가 공작 부부 침실을 나서자마자, 록사나가 지친 몸을 일으켰다.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녀는 옷만 겨우 꿰어 입고 공작 부인의 방으로 곧장 도망쳤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록사나는 공작 부부의 침실로 연결된 문을 가장 먼저 걸어 잠갔다. 그 문의 열쇠는 공작 부인에게만 있었다.
물론 아스테리온이 열고자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튼튼한 문이라도 종이처럼 찢겨져 나갈 것이다.
그녀는 일주일 넘게 공작 부부의 침실 문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록사나는 칼리드를 그녀의 든든한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당분간은 공작님이 제 침실에 발걸음 하시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녀는 결혼식 때보다 훨씬 여윈 얼굴로 말했다.
이 한마디만으로도 충분했다. 칼리드는 공작 부인의 방 앞에 하녀들을 두 명씩 짝지어 세운 뒤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게 했다.
또한 칼리드는 아스테리온의 움직임을 늘 예의 주시했다. 그가 공작 부인의 방 쪽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곧바로 움직였다.
아무리 공작가의 최고 권력자이자, 주인인 아스테리온이라도 칼리드가 버티고 서 있으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밀린 업무도 많아서 고작 30분을 넘기지 못하고 공작 부인의 방문 앞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공작 부부 사이에 소소한 기 싸움이 벌어졌지만, 공작가는 평소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아무것도 안 하니까 편하고 좋네.’
록사나에게는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도 없었다. 공작 부인이지만, 그에 따른 실무 권한이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작가 내부의 업무는 집사와 하녀장이 관리하고 처리했다. 록사나가 공작 부인이 되었어도 마찬가지다.
5일째 되는 날부터 록사나는 깨어 있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녀의 취침 패턴은 자연스럽게 결혼하기 전으로 차츰 돌아갔다.
‘너무 늘어져 있었나? 이제 슬슬 지루해.’
록사나가 침대에 누운 상태로 발코니 쪽을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의 응접실과 침실에는 넓은 발코니가 하나씩 딸려 있었다. 티 테이블과 장의자가 놓여 있어 편하게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록사나는 답답한 방을 나가 그녀가 좋아하는 후원에서 산책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신방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했던 시간들을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직은 고용인들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자신이 머무는 방문 앞에서 근무를 서는 하녀들과 식사와 청소를 위해 드나드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했지만.
“데이지, 서재에서 이 책을 가져와 줘.”
“네, 마님.”
데이지가 책 목록이 적힌 종이를 건네받았다.
“스테파니는 차를 준비해 주고.”
“네.”
하녀들이 공작 부인의 응접실을 나섰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책과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록사나는 후원 방향으로 나 있는 발코니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음속에 쌓여 있던 답답함과 무거움이 조금 덜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름의 막바지, 한낮의 바깥은 여전히 더웠다. 그래도 해가 하늘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시간 때쯤부터 열기 가득했던 바람의 온도가 미묘하게 변해 갔다.
요 며칠 자신이 공작 부인이 되었다는 게 잘 실감 나지 않았었는데, 방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 * *
록사나가 열세 살 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
갈 곳 없는 어린 록사나는 아스테리온의 모친이자 선대 공작 부인인 엘리노어에게 거두어졌다.
낯선 공간, 낯선 사람들.
처음 공작가에 발을 들인 록사나에게는 아름답고 웅장한 공작 성일지라도 무척 두렵고 낯선 세상, 그 자체였다.
어린 록사나는 부모를 잃은 슬픔에 빠져 허덕였고,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엘리노어는 그런 어린 소녀에게 아기 시녀라는 자리를 내주었다. 공작가에서 의지할 곳 없는 록사나가 있을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또한 엘리노어는 항시 록사나를 곁에 두고는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는 법들도 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밤마다 악몽을 꾼다는 걸 알게 된 처음 두세 달간은 록사나를 직접 재워 주기도 했었다.
엘리노어는 늘 그녀를 가장 아끼는 조카처럼 챙겨 주며 여러 가지 배움의 기회를 주었다.
덕분에 공작 부인의 아기 시녀로 지냈던 첫 2년 동안의 록사나는 슬프면서도 행복했었다.
그러나 몸이 약했던 엘리노어는 록사나가 열다섯 살이었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넓은 공작 성에서 록사나는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살길을 찾는다면 충분히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록사나는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었던 카일라니 공작가를 당장 떠나고 싶지 않았다.
선대 공작 부인의 사후에 공녀가 없는 공작가에서 시녀들은 설 자리가 없었다.
록사나를 제외한 모든 시녀들이 두둑한 퇴직금을 받고 공작 성을 떠났다.
열다섯 살의 록사나는 추천장을 받더라도 다시 접하게 될 낯선 세상이 두려웠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 주었던 엘리노어와의 추억이 깃든 공간 안에서 계속 머무르고 싶었다.
다행히 선대 공작도 지금의 공작인 아스테리온도 그녀를 공작 성에서 내쫓지 않았다.
그녀는 제가 있을 자리를 다시 찾듯 시녀가 아닌 하녀들이 하는 일을 하며 카일라니 공작 성에서 살았다.
* * *
산책을 나갔던 록사나가 본관으로 돌아왔다.
공작 부인의 방 앞에 도착하자, 칼리드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가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무슨 일 있어요?”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인 없는 방에 객이 들었다.
“그의 업무는 다 끝난 건가요?”
아스테리온이 밀린 업무를 다 끝냈냐는 물음이었다. 칼리드가 그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네.”
록사나에게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아스테리온은 2주 분량의 일을 일주일 만에 해치워 버렸다.
그러는 동안 그는 꽁지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맹렬한 기세를 내뿜었었다.
머문 시간은 짧았지만, 틈틈이 공작 부인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방에 발도 들이지 못하고, 문 앞에서 돌아서야 했지만 말이다.
록사나가 침실에 딸린 응접실로 들어섰다. 그녀를 본 아스테리온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슬며시 자리에 앉았다.
록사나는 건너편 소파에 가서 자리했다.
아스테리온이 손수 차를 따라 그녀 앞에 따뜻한 찻잔을 놓아주었다.
‘뭐 하자는 수작이지? 호락호락하게 넘어가면 절대 안 되는데!’
그녀가 아는 아스테리온 카일라니는 누군가에게 차를 손수 따라 줄 정도로 친절한 남자가 절대 아니었다.
아내니까 행동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그 의도가 순수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나랑 보낸 밤이 끝내줬나?’
록사나는 자신의 의심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그녀와 결혼한 첫날부터 함께 뜨거운 밤을 보냈다. 지금 이러는 것도 다시 그녀와 밤을 보내기 위해 잘 보이려고 하는 행동일 것이다.
아스테리온의 의도하지 않은 미인계와 그의 사소한 친절이 더해지니 마음이 순간 말랑말랑해질 뻔했다.
지난번처럼 앞으로 그와 밤을 보냈다가는 그녀의 몸만 축나고 말리라.
반면 아스테리온의 가슴속은 점점 새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만약 록사나가 그와의 밤을 거절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스테리온은 등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가 첫날밤부터 그녀를 심하게 밀어붙이고, 좀 밝히기는 했지만. 그건 그녀의 치료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러면서 사심을 가득 채우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록사나의 치료를 위해서는 그녀와의 밤을 꼭 쟁취해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록사나를 보고 있자니 절로 긴장이 되었다.
아스테리온은 손에 찬 땀을 자연스럽게 스윽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록사나는 모를 각오를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굳게 다졌다.
이어 록사나도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으며, 차를 들고 적당히 목을 축였다.
“어디를 다녀왔길래 이렇게 늦게 오는 거지?”
“산책이요. 설마 공작 성 내에서도 보고하고 다녀야 하는 건가요?”
“흠흠. 그건 아니야.”
아스테리온이 헛기침을 했다.
“무슨 일이세요?”
“그, 오늘도 안 올 거야?”
록사나는 옳다구나 싶었다.
“그동안 공작님이 바빴잖아요. 누구 덕분에 제 몸이 축나서 회복할 시간도 필요했고요.”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할 법도 한데, 그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제 바쁜 거는 어느 정도 끝났어. 그리고 그대도 무척 좋아 보이는군.”
탁!
록사나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래서 오늘 밤부터 다시 동침하자고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스테리온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건 고민 좀 해 봐야겠어요.”
록사나가 밑밥을 깔았다. 아스테리온은 뭔 소리냐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공작님한테만 좋은 거 같아요.”
록사나의 말에 아스테리온이 아까부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스테리온.”
“네?”
대뜸 아스테리온이 스스로의 이름을 말하자, 록사나가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