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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3)화 (3/214)

3화 

“음.”

사십 대에 접어든 알렉의 이마 주름이 깊어졌다. 그는 록사나의 맥을 읽는 데 정신을 집중했다.

아벨리오 영애는 다른 또래에 비해 많이 말랐지만 건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속 기운의 흐름이 왠지 이상했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많든 적든 마나의 기운을 몸속에 품고 태어나는데, 그 마나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하면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어디가 안 좋은 건가요?”

록사나가 예의상 먼저 물었다. 별달리 아픈 곳이 없었지만 알렉이 말없이 진찰만 하고 있으니 궁금증이 일었다.

알렉은 몸속 기운이 잠시 뒤틀린 거라고 생각하며 록사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결혼식이 점점 다가오면서 혹 스트레스를 받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딱히요. 공작가에서 알아서 다 준비해 주고 있어서 제가 신경 쓸 게 거의 없어요.”

“간혹 심리적 압박이나 불안감도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답니다.”

알렉의 지적에 록사나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조그맣게 웃음 지었다. 어색한 웃음이었다.

자신의 일 외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알렉이라고 할지라도 공작가 예비 내외의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겉으로는 결혼식을 앞두고 들뜬 것처럼 보였지만 록사나에 대한 시기 질투가 난무했다.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처방을 내린 알렉의 진찰은 다음 날에도 한 번 더 이루어졌다.

알렉은 다급하게 공작에게 알현을 요청했다.

* * *

“뭐라고 했지? 다시 한번 말해 봐.”

아스테리온의 입에서 냉기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앞에 있는 알렉의 몸이 작게 움찔거렸지만 그의 눈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주치의가 진단을 잘못한 게 아닐까?’

알렉은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실력자 의원이었다.

그럼에도 의심스러웠다.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게 틀림없다고 믿고 싶었다.

아스테리온이 서슬 퍼런 두 눈으로 죽일 듯이 노려보자, 소심한 알렉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벨리오 영애께서는 부, 불치병에 가까운 병을 앓고 계십니다.”

쇠망치가 머리를 내려친 기분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보다 더 커다란 충격을 받은 아스테리온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의 푸른 눈이 북해처럼 시리게 얼어붙었다. 그와 동시에 집무실에 한참 동안 무거운 공기와 침묵이 내려앉았다.

차갑고 무심하기로 소문난 공작이 저렇듯 크게 반응하는 것을 보며 알렉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가 많이 아픈 상황이니 놀라실 수밖에.’

보통 사람들은 정신적 스트레스나 육체적 피로가 누적되면 몸의 기운이 뒤틀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증상들은 대개 휴식과 안정을 어느 정도 취하고 나면 정상으로 돌아오곤 한다.

그런데 첫 진찰 때부터 아벨리오 영애의 마나 흐름은 보통 사람과 아주 미묘하게 달랐다.

처음엔 그저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들이 으레 겪는 스트레스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진찰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아스테리온은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추슬렀다. 무겁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이 사실을 그녀에게 말하지는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저도 긴가민가하여 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모두 살펴보고 공작님께 제일 먼저 보고드리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 사실을 모두에게 함구하게.”

“환자 본인에게도 말입니까?”

알렉이 살짝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

의원은 치료 여부를 떠나 환자 본인에게 사실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스테리온의 눈가가 한껏 일그러졌다가 순식간에 제자리를 되찾았다.

자신도 지금 이렇게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데, 본인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전한단 말인가.

‘어떻게든 낫게 하면 돼. 적어도 그때까지는…….’

누군가 그를 겁쟁이라고 손가락질한데도 아스테리온은 절대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알아서 마음고생할 필요는 없으니까.”

뭔가 생략된 듯 억눌린 말과 함께 아스테리온의 기세가 날카로운 칼처럼 벼려졌다.

알렉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예, 예. 물론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가는 당장에라도 자신의 목이 꺾일 것 같아 등골이 서늘해졌다.

“병과 치료법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보게.”

아스테리온의 지시에 알렉이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 영애께서 앓고 계신 병은 ‘엘프 절맥증’이라고 합니다. 몸의 흐름과 자연의 기운이 충돌하며 생기는 병으로 아주 오랜 옛날 엘프들 중에서도 극소수가 앓았었다고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병으로…….”

알렉이 엘프 절맥증의 증상과 병을 앓는 이들의 최후까지 줄줄이 읊었을 때쯤, 아스테리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서운 기운이 최고조에 달했다.

“잘해야 반신불수고, 아니면 죽는다고?”

죽음의 세계의 사자보다도 무서운 목소리였다.

“예.”

“자네는 분명 불치병에 가까운 병이라고 했지. 그 말은 불치병이 아니라는 얘기지 않은가?”

간절함과 일말의 희망이 아스테리온의 목소리에서 짙게 배어 나왔다.

“그것이 말입니다. 딱 한 차례 엘프 절맥증 치료에 성공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기는 한데 치료제를 만드는 게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재료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알렉이 계속되는 긴장감에 연신 얼굴의 식은땀을 훔쳐 냈다.

아스테리온은 단호했다.

“재료를 구해 줄 테니 무조건 치료 약을 만들어 내.”

심판을 내리는 철퇴 같은 목소리가 알렉의 귀에 곧바로 내리꽂혔다.

“공작님, 재료도 문제지만 제가 본 서적에서는 치료제 배합법이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용기를 쥐어짜 낸 것이 무색하게도 아스테리온의 파란 눈에는 살기가 한껏 깃들어 있었다.

알렉이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다. 살아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그때였다. 하늘이 돕는 건지 그의 머릿속을 번뜩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아! 지혜의 방에서라면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카일라니 공작가 내에 있는 지혜의 방은 고대 서적들과 진귀한 서적들을 모아 놓은 거대한 서재로 오직 공작가의 직계만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다.

“출입을 허락하지. 일주일 안에 찾아내라.”

아스테리온의 망설임 없는 허락에 알렉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내가 지혜의 방에 들어갈 수 있게 되다니!’

순간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치료제 배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어쩌나, 몹시 걱정되기는 했다.

하지만 쉽게 구할 수 없는 진귀한 의학 서적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알렉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일주일 안에 찾아낸다면 추가로 일주일을 더 지혜의 방에 드나들 수 있도록 해 주지. 그리고 시간을 더 앞당긴다면 앞당긴 일자만큼 하루에 일주일씩 추가로 늘어날 거야. 또한 삼대가 먹고살 걱정 없을 만한 보너스 또한 지급될 걸세.”

의원으로서 알렉의 숨겨진 집착과 탐구욕을 한눈에 알아본 아스테리온이 말을 덧붙였다.

알렉이 우는 듯 웃는 듯 일그러진 표정을 한 채 미친 듯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예비 신부인 록사나의 목숨에 비하면 아스테리온이 내세운 조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간 내에 배합법을 찾아내고 제대로 된 치료제를 만들어서 록사나의 엘프 절맥증을 고쳐 낸다면 아스테리온은 어마어마한 재물과 함께 알렉이 평생 동안 지혜의 방을 드나들 수 있게 해 줄 수도 있었다.

반면 알렉은 배합법을 찾는다 해도 치료제를 만들 수 있을지 염려되었다.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그 사실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재료를 다 구하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지.’

특히 한 가지 재료가 무척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은 알렉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직접 재료 목록을 보셨으니 공작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잠시 후, 공작의 지엄한 명을 받든 알렉이 서둘러 집무실을 떠나 곧바로 지혜의 방으로 향했다.

아스테리온의 커다란 상체가 집무실 책상 위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심장이 통째로 뜯겨 나가는 것 같은 아픔에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정신은 록사나의 병에 대해 듣던 순간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그녀가 아프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의 얼굴이 고통으로 얼룩졌다.

모든 게 꿈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생생히 느껴지는 통증이 현실임을 일깨웠다.

아스테리온은 지금 이 순간 록사나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며 자신의 마음을 꾹꾹 억눌렀다.

지금 이 상태로 록사나에게 달려간다면 황태자를 필두로 한 그의 적들이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들어 그녀를 물어뜯고 말 것이다. 절대 안 된다. 절대.

그동안 아스테리온은 록사나를 향한 애틋하고 절절한 마음을 꼭꼭 잘 숨겨 왔다. 앞으로도 냉담한 척 그럴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이건 아스테리온이 그녀를 지켜 내는 방식이었다.

그녀를 자신의 옆에 세워도 이제는 온전히 지켜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다. 하늘은 그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록사나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반드시 그녀를 완치시키면 돼! 그러면 돼.’

혹여 치료제에 소드 마스터인 그의 심장이 재료로 들어간다고 해도 기꺼이 가슴을 갈라 내놓으리라.

* * *

지혜의 방에 들어간 지 5일째 되는 날.

알렉은 엘프 절맥증에 대한 치료제 배합법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동안 숙식을 모두 그곳에서 해결하며 단 한 걸음도 밖으로 내딛지 않았다.

공작이 말한 기한이 다가올수록 알렉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하지만 그의 불타는 집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찾았다!”

벌떡 일어선 그의 두 눈이 광기로 반짝였다.

두꺼운 고서를 품에 껴안은 알렉이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쾅!

문을 거세게 열어젖힌 알렉이 공작의 집무실을 향해 내달렸다.

복도 끝에서부터 달려오는 알렉의 모습을 확인한 기사 한 명이 집무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기사는 사전에 공작에게 지시받았던 명을 착실하게 이행했다.

“공작님, 주치의 알렉 카인즈가 옵니다.”

기사가 문을 열자, 그 사이로 알렉이 달려 들어갔다.

“헉헉헉.”

거친 숨을 쉼 없이 몰아쉬는 알렉을 아스테리온이 일어나 맞이했다.

그가 먼저 소파에 앉자, 알렉도 맞은편에 자리했다.

전혀 씻지 못해 떡이 진 머리와 꾀죄죄한 얼굴이 그동안 그의 노고를 말해 주었다.

집사 칼리드가 두 사람 사이에 찻잔을 내려놓을 때쯤,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알렉의 숨은 안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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