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친황태자파로 넘어오는 듯했던 카일라니 공작가는 네이든이 죽자, 바로 다시 중립 세력으로 돌아섰다.
자존심 상하지만 도노반은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카일라니 공작가의 지지를 이끌어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줄 또 다른 세력인 로웰 후작가와 저울질을 하던 도중 한쪽으로 무게 추가 완전히 기울어졌다.
그러자 도노반은 당시 소공작이었던 아스테리온 카일라니의 약혼녀 빅토리아 로웰을 빼앗아 자신의 두 번째 비로 앉혔다.
그 후 현 황태자파와 카일라니 공작가는 필연적으로 적대 세력으로 마주했다.
“뒤탈 없는 출신이니 몰래 죽여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글쎄, 그게 과연 쉬울까?”
카일라니 공작이 가만히 손 놓고 있지만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봤자 지금처럼 카일라니 공작가만 상대하면 되지 않습니까. 성공하면 우리 쪽 세력을 공작가에 심을 수 있고요.”
알턴의 말에 도노반이 뱀같이 눈을 번뜩이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 * *
새벽녘, 잠에서 깬 록사나가 눈을 깜박거렸다.
화려하고 낯선 천장의 실루엣이 가장 먼저 그녀의 두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무심하게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지금 그녀가 머물고 있는 침실은 공작 부인의 방이었다.
작은 마력 등 하나가 은은하게 침실을 비췄다. 진귀하고 고급스런 것들로 꾸며진 침실은 어제 있었던 아스테리온의 청혼이 꿈이 아니라는 듯 그녀를 일깨웠다.
록사나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투명한 커튼 사이로 희미한 새벽빛이 비치었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 건가…….’
록사나는 오랜만에 부모님의 꿈을 꾸었다. 가끔씩 꿈속에서 만나는 부모님의 얼굴은 늘 흐릿했었다.
‘오늘은 꿈이 무척 선명했어. 꿈이 더 길게 이어졌으면 좋았을 텐데…….’
마음 한구석이 저려 왔다.
록사나는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꿈 내용을 곱씹어 보았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 자신은 무척 어려서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기억하지 못할 텐데……. 너무나도 선명했다.
‘엄마, 아빠……. 나 곧 결혼해요. 그거 알고 내 꿈속에 찾아온 거예요?’
결혼식을 보름 정도 앞두고, 싱숭생숭해하는 자신을 다독여 주려고 꿈에 나타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록사나가 걸고 있던 목걸이의 펜던트 부분을 들어 올렸다.
‘이 목걸이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렴. 정령의 목걸이가 우리 록시를 지켜 줄 거야.’
착용하고 있으면 주인을 지켜 준다던 목걸이. 그리고 지켜 주고 싶은 사람에게 이 목걸이를 건네주면 그 사람을 보호하는 힘이 있다고 했다.
목걸이가 주인을 지켜 준다는 사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록사나 자신도 목걸이의 가호를 받아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그 외에도 몇 가지 비밀이 더 있었다. 가장 큰 비밀은 이 목걸이가 진짜 정령을 만나게 해 주고 이 세계의 지식들을 계승해 주었다는 거다.
처음 정령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 록사나가 설핏 웃었다. 그 미소에는 아련함이 깃들어 있었다.
* * *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두 모녀가 다정하게 한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스카일라 아벨리오가 어린 딸아이의 목에 목걸이 하나를 걸어 주었다.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 록사나가 오통통한 작은 손으로 그것을 잠시 만지작거렸다.
“엄마, 이거 므야?”
“이제 우리 록시 거야.”
“로씨 거?”
“응.”
“와아!”
록사나가 녹음이 가득한 눈을 둥글게 휘었다.
그때였다. 봄이라도 찾아온 것같이 연한 초록색의 빛이 나타나 아이의 몸 전체를 감싸다 사라졌다.
록사나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이내 관심은 다시 목걸이로 향했다.
스카일라가 웃으며 딸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엄마가 우리 록시한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잘 들어 줄 거지?”
“응!”
“옛날 옛날에 한 소녀가 살았어. 그 소녀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단다…….”
부드럽고 청아한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워 갔다.
스카일라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 소녀의 눈에 언젠가부터 정령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녀는 정령과 꾸준히 소통하며 친화력을 쌓았다. 이에 정령과의 계약을 통해 그들의 힘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소녀는 정령과 함께 세상을 돌아다녔다. 정령의 힘을 사용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구해 주기도 했다.
세상을 돌고 돌다 보니 ‘세상의 끝과 시작’이라는 땅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소녀는 신비한 힘을 한 가지 더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른 세계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었다. 소녀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처럼 정말 생생했다.
마음이 따뜻했던 소녀는 이 신비한 힘 역시 약자들을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점차 소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소녀가 하는 일들이 자신들에게 불이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다.
결국 소녀는 나쁜 자들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소녀는 죽기 직전에, 자신이 가진 신비한 힘을 정령에게 맡기며 말했다.
‘훗날 이 힘을 온전히 이어받을 아이가 나타날 거야. 그 아이를 지켜 줘.’
소녀가 죽은 후,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 목걸이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목걸이는 정령에 의해 소녀의 가족에게 대대로 전해졌다.
스카일라의 이야기가 다 끝나자, 록사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너가 주거떠. 어떠케. 흐윽!”
“록시, 괜찮아. 괜찮아.”
스카일라가 록사나를 꼭 끌어안고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지금 우리 록시가 하고 있는 목걸이가 그 소녀의 목걸이야.”
“소너… 킁, 모꺼리?”
록사나가 코 먹은 소리로 물었다.
“응. 소녀는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란다. 별이 되었거든.”
“벼리 되어써?”
록사나가 목걸이를 손에 들고 펜던트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갑자기 아이의 초록색 두 눈이 커졌다.
“엄마, 이거 바, 벼리야! 여기 벼리 이떠! 어기 코오 하고 이떠요!”
목걸이의 보석 속 별 모양을 발견한 록사나가 신이 나서 외쳤다.
죽었다고 여겼던 소녀가 이제는 별이 되어 목걸이 속에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다핸이야!”
조막만 한 손이 펜던트 위를 앙증맞게 쓸어내렸다.
록사나가 엄마에게 물었다.
“로씨도 전녕 만날 쑤 이써요?”
“그럼.”
아벨리오 남작 부부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었다. 정령이 나타날지 말지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남작 부부의 염려가 무색하게도 록사나는 목걸이를 받은 그날 오후, 정말로 정령을 만났다.
어린 딸의 방문을 연 남작 부부의 몸이 바짝 굳었다.
“엄마, 아빠. 이거 바바! 전녕이 와써. 진짜 와써요!”
청량한 정령의 기운이 록사나의 방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록사나의 곁에는 열 살 초반으로 보이는 소년의 모습을 한 정령이 서 있었다.
스카일라가 봤었던 목걸이의 정령이 맞았다.
- 안녕. 오랜만이야, 스카일라.
“…오랜만이에요, 샤일리 님.”
- 20년 만인가?
“네.”
“샤일리 님?”
옆에서 세바스티안이 놀란 눈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낯선 소년이 정령일 거라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아. 샤일리 님, 제 남편 세바스티안 아벨리오예요. 세스, 인사해요. 목걸이의 정령이신 샤일리 님이에요.”
스카일라가 처음 보는 두 사람, 아니, 한 사람과 정령을 서로 소개시켜 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샤일리 님. 저는 스카일라의 남편이자, 록사나의 아빠인 세바스티안 아벨리오입니다.”
- 반가워, 인간. 그런데 로씨가 아니라, 록사나인가?
“록시는 록사나의 애칭입니다.”
세바스티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날부터 정령 샤일리는 록사나의 곁에 눌러앉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곁에서 영원히 함께할 줄 알았던 정령 친구 샤일리는 록사나의 목숨을 지켜 주고 사라져 버렸다.
록사나는 그 사고 이후로 정령의 힘을 거의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신비한 힘인 다른 세계의 지식은 록사나에게 온전히 남아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예전에 샤일리는 말했었다. 다른 세계의 지식인 신비한 힘은 사용자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변화무쌍하다고.
록사나의 엄마인 스카일라 역시 다른 세계와 관련된 신기한 지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을 사용하는 건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지식을 때때로 업무에 활용하기도 했었지만 주로 다른 세계의 요리법을 이용해 요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녀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과 비슷한 식재료를 발견하면 세바스티안과 록사나에게 특별한 요리를 종종 맛보여 주곤 했었다.
* * *
오래되고 긴 회상에서 벗어난 록사나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걷고 창문을 열었다. 상쾌한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스름한 새벽 풍경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 작은 생명체 하나가 들어왔다.
나무 위, 둥지의 가장자리에서 금방이라도 땅으로 떨어질 듯 아기 새가 위태롭게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록사나가 창밖 주변을 살핀 후, 오른손을 살짝 뻗었다. 창밖으로 내밀어진 그녀의 손끝에서 한 줄기의 바람이 뻗어 나갔다.
바람의 도움으로 아기 새의 몸이 안전한 둥지 안쪽으로 쏘옥 들어갔다.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들이 조금 맺혔다. 더워서 그런 게 아니라, 정령의 힘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로 힘들다니. 예전에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너무 쉬워서 일도 아니었는데…….’
록사나는 제게서 정령의 힘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신비한 이세계 지식과 정령의 힘이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는 걸 보면 언젠가는 샤일리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온전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면 이곳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닥쳐왔을 때, 공작 령보다 치안이 불안한 타 영지에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부디 그 전까지 힘을 되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록사나는 또 하나의 간절한 바람을 속으로 읊조렸다.
* * *
오후, 공작가 주치의 알렉이 록사나를 찾아왔다.
공작의 명에 따라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를 진찰하러 온 것이다.
이를 미리 전달받았던 록사나의 표정은 차분했다.
“안녕하십니까, 아벨리오 영애.”
“안녕하세요, 알렉.”
각자 공작가에 몸담고 있었기에 마주한 적이 많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낯설지 않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자리를 잡은 알렉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이어 록사나의 손목을 잡고는 마나를 불어 넣었다.
록사나는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세계의 기억에서 본 한의사가 행하는 진맥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