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인 대신 영주님이 되겠습니다 (1)화 (1/214)

1화 

【 청혼 】

제국력 897년 7월, 카일라니 공작가.

록사나가 평소처럼 공작 성의 후원을 산책했다. 고용인에게 주어지는 휴일을 맞이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록사나는 휴일이 주어질 때마다 밖으로 외출을 나가는 대신 아름다운 공작가의 후원을 거닐며 휴식을 취하곤 했다.

‘날이 점점 더워지네.’

잘 가꾸어진 조경수가 드리우는 그늘 아래를 거닐며 록사나가 점점 더워지는 여름의 열기를 잠시나마 피했다.

자칫하면 길을 잃기 쉬울 만큼 카일라니 공작가의 부지와 후원은 무척 드넓었다.

하지만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 7년 동안 이곳에서 살고 있는 록사나에게는 곳곳이 익숙했다.

넋을 놓고 발길 닿는 대로 얼마나 걸었을까.

순간, 커다란 벽이 다가온 것처럼 누군가 록사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흠칫.

깜짝 놀란 록사나가 몸을 움찔거리며 곧바로 고개를 들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

태양보다 더 찬란한 금발과 청안.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이었다.

록사나는 순간적으로 넋을 잃고 스물세 살의 젊고 아름다운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사이 아스테리온이 다짜고짜 입을 열었다.

“록사나 아벨리오 영애, 나와 결혼해 주겠어?”

인사를 건네기 위해 막 무릎을 굽히려던 록사나의 몸이 굳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그녀의 검은 속눈썹이 몇 번 깜박였다. 이내 초여름을 닮은 녹안이 화등잔만 해졌다.

록사나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네?”

“나와 결혼하자고 했어.”

록사나는 더운 여름 날씨에 자신도 그도 더위를 먹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심장은 두근거렸다.

“…그게 무슨…….”

록사나가 당황해 말을 얼버무렸다.

“내게는 공작 부인이 필요해.”

아스테리온의 목소리는 건조했고, 표정은 차가웠다.

아내가 아닌 공작 부인…….

그 말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한 록사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사람들과의 교류가 적은 록사나도 요즘 세간에 어떤 소문이 도는지 모르지 않았다.

제법 영특한 그녀는 아스테리온이 왜 결혼 이야기를, 그것도 자신에게 꺼냈는지 짐작이 갔다.

그와 대적하고 있는 새 황태자파에서는 공석인 카일라니 공작 부인의 자리에 자신의 세력을 앉히기 위해 시시때때로 작전을 펼쳤다.

요즘 들어서 그 압박은 절정에 달했다.

까닥 잘못하다가는 적대 세력인 황태자파의 사람을 공작 부인으로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중립 세력인 카일라니 공작가 입장에서는 절대 용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아무 권력도 없는 적절한 방패막이가 필요했을 것이다.

문제를 일으켜서도 안 되고 그에게 무엇도 요구하지 않을 그런 적당한 아내 말이다.

마침 그의 주변에 적절한 결혼 대상자가 존재했다. 그러니 아스테리온 입장에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피붙이 하나 없는 몰락한 남작가의 영애, 바로 록사나 말이다.

어디에 의지할 곳 없는 그녀는 카일라니 공작가에서 하녀 일을 하고 있는 처지였다.

‘변변한 뒷배조차 없으니 허수아비 공작 부인으로 딱이네.’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얽히고설키는 가운데에서도 록사나가 재빠르게 표정을 수습했다. 하지만 고민하는 모습까지는 미처 숨기지 못했다.

붉은 장미가 곱게 핀 후원 한복판, 리온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재력과 소드 마스터라는 지위와 명예, 완벽한 외모까지 지닌 카일라니 공작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록사나의 침묵이 길어지자, 아스테리온이 몇 마디 덧붙였다.

“나와 결혼하는 게 영애에게도 이득일 거야.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고, 나중에 이혼하게 되더라도 섭섭지 않은 위자료를 약속하지.”

이혼이 뒤따르는 결혼이라니.

록사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제가 싫다고 하면요.”

“결혼? 아니면 이혼?”

“둘 다요.”

“이혼은 모르겠지만 결혼은 강요할 생각이 없어. 그대가 선택하면 돼.”

저 말은 만일 그녀가 이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하게 된다면 이혼은 피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이 청혼을 거절한다면 그는 어떻게 할까.

다른 여자에게 지금처럼 청혼을 할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아니, 확실하다.

아스테리온의 눈빛은 당장 답을 원하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하기 위해 달싹이던 록사나의 입술이 다물렸다.

갈 곳 없는 그녀였다. 게다가 이만한 혼처는 지금으로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앞으로도 그렇다.

‘훗날 이혼이라는 꼬리표가 붙겠지만…….’

얼마간의 침묵이 흐르고, 고민에 빠져 있던 록사나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청혼을 받아들일게요.”

“잘 결정했어.”

대답이 흡족하다는 듯, 아스테리온이 금빛 눈썹을 아주 살짝 까닥였다.

그 눈부신 순간을 록사나는 놓치지 않았다.

열기를 품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며 그의 금발을 흔들었다. 록사나의 심장이 빠르게 뛰며 가슴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언제부터였을까.

지난 7년간 공작가에 머물며 그를 직접 마주한 횟수는 손에 꼽았다. 스쳐 지나갔던 순간들조차도 아주 적었다.

록사나가 수락한 청혼은 사랑 없이 아스테리온의 필요에 의한 형식적이고 허울뿐인 결혼의 시작을 알렸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그를 이미 가슴에 품게 된 록사나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남자 곁에서 잘 버텨 낼 수 있을까?’

그녀의 대답을 듣자마자 미련 한 톨 없이 멀어져 가는 아스테리온의 차가운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록사나는 자꾸만 욱신거리는 가슴 한구석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 * *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은 결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묵직한 고요함에 감싸여 있던 공작가가 간만에 활기를 띠었다.

한나절 사이에 더욱 바빠진 하녀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신들의 숙소로 발길을 옮겼다.

“우리랑 같은 하녀인데, 하루아침에 공작 부인이 된다는 게 말이 돼?!”

“록사나는 귀족 출신이잖아.”

하녀 줄리의 질투에 옆에서 함께 걷던 데이지가 소심하게 말했다.

“귀족 출신이면 뭐 해. 우리랑 같은 하녀잖아.”

파울라가 줄리의 편을 들었다.

하녀들 사이에서 젊고 잘생기고 유능한 카일라니 공작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오를 수 없는 나무처럼 보이던 그가 몰락 귀족 출신이라고는 하나 하녀 일을 하는 록사나와 결혼한다고 하니 배가 아팠다.

“맞아. 공작님은 왜 하필 록사나하고 결혼하시는 거야? 더 좋은 집안의 영애가 줄을 섰는데.”

“쉿. 누, 누가 들으면 어떡해.”

소심한 성격의 데이지가 말리자, 줄리가 성질을 부렸다.

“내가 못 할 말 했니? 데이지 넌 같은 하녀를 공작 부인으로 모시게 생겼는데, 기분이 안 나빠?”

“난… 나는 잘 모르겠어.”

“하긴, 네가 뭘 알겠니. 어쨌든 난 인정 못 해!”

“나도 그래. 차라리 내가 낫지. 록사나 그 앤 어디 봐 줄 만한 데도 없잖아. 삐쩍 말라서는.”

소심한 데이지와 다르게 파울라와 줄리는 자신들의 본심을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전 약혼녀에 비하면 모든 게 한참 뒤떨어지잖아!”

“맞아. 로웰 후작가는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데 말이야.”

파울라의 말에 줄리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그분은 이미 황태자비가 되셨는걸.”

속삭이는 듯한 데이지의 목소리는 두 사람에게 묻혔다.

말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하녀들이 사라지자, 정원수에 가려진 벤치에 앉아 있던 록사나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일부러 하녀들의 대화를 훔쳐 들은 게 아니었다. 산책 삼아 나왔다가 방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최대한 늦추려고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참이었다.

록사나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국의 꽃이라 불리며 칭송받는 여인이자, 제2 황태자비인 빅토리아 로웰은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의 전 약혼녀였다.

헌신짝처럼 버림받고도 전 약혼녀를 잊지 못하는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

제국 내에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만큼 록사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전 약혼녀와 자신이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한 아스테리온을 생각하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록사나가 자신의 새 침실 쪽을 바라보았다.

청혼을 수락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그녀의 방은 고용인들의 숙소에서 바로 본관 2층으로 옮겨졌다.

그녀가 머물게 될 침실의 창가에서는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하녀들이 불을 켜 두었으리라.

‘상처를 받을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네.’

록사나가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벌써부터 메리지 블루가 시작된 건지 그녀의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잠시 후, 록사나가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새 거처이자, 선대 공작 부인이었던 엘리노어가 사용했던 방으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 * *

리온 제국, 황태자 궁.

“뭐?! 카일라니 공작이 결혼을 한다고?”

황태자 도노반 마르퀴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쳤다.

이에 그의 보좌관인 알턴 자작이 몸을 움츠리며 저자세를 취했다.

“네, 전하. 상대는 카일라니 공작가에서 하녀 일을 하는 록사나 아벨리오라고 합니다. 몰락한 남작가 출신입니다.”

더 큰 불똥이 튈세라 알턴이 재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게 사실이야?”

도노반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알턴이 냉큼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러고는 황태자의 눈치를 살살 보며 자신이 알아낸 사실들을 줄줄이 읊기 시작했다.

“제가 확인해 본 바로는 아벨리오 남작 부부가 사고로 사망한 후, 선대 공작 부인이 홀로 남은 남작 영애를 아기 시녀로 거두었다고 합니다. 선대 공작 부인이 작고한 이후로는 줄곧 하녀 일을 하며 공작가에 계속 머물렀고요. 뒷배 하나 없으니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흐음, 유력 가문이 아니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우리 쪽 사람이 공작 부인 자리를 차지했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알턴의 말이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도노반은 아쉬움에 자신의 턱을 연신 쓰다듬었다.

도노반은 한미한 남작 영애를 공작 부인으로 맞아들이는 아스테리온 카일라니 공작이 자신들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렸으리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뭔가가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잠시뿐이었다.

5년 전 마차 사고로 전 황태자 네이든이 사망한 이후, 황제의 장자인 도노반이 새롭게 황태자의 자리에 올라섰다.

아스테리온 카일라니는 도노반의 이복동생이자 전 황태자였던 네이든의 친우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