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히아트 가주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혈관들이 투명하게 비치기 시작했다.
“크헉.”
피부 위로 떠오른 핏줄들이 밑에서부터 점점 까매졌다. 검붉은 피들이 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하…….”
가는 숨소리만 내뱉은 히아트 가주가 자신의 목을 부으며 끅끅거렸다. 손톱으로 돌바닥을 긁는 소리만이 적막으로 휩싸인 공간을 울렸다.
‘못 살리겠네.’
이안은 무감각한 눈으로 그것을 지켜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바닥을 긁어 대는 소리가 멈췄다. 이안은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앞에 놓인 시체를 응시했다.
“…….”
“…코브라의 맹독입니다. 뱀의 짓이군요.”
뒤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던 앨런이 앞으로 나왔다. 그의 손이 히아트 가주의 몸을 열심히 뒤척이고 있었다.
“실험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나서, 까만색 핏줄이 올라오고, 피를 토해 내는 것을 보니 확실합니다. 서부 아쉴라의 종족인 코브라들은 독을 조절할 수 있으니까요.”
그들이 서부를 장악하는 데 큰 공이 되어 주었던 것 중 하나.
독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은 아쉴라 가문의 고유 능력이었다.
그들에게 한 번 충성을 맹세한 자들은 죽거나, 그들에게 끝까지 매달리거나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었으니까.
“서부의 아쉴라까지…….”
잠시 가라앉은 눈으로 시체를 살펴보던 앨런이 몸을 일으켰다.
방금까지의 심각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가벼운 표정만이 그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모르타, 히아트, 아쉴라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가문이 얽혀 있는 겁니까. 차츰 이 일에 손대고 나서 몰려올 일거리가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만.”
“실험, 실험이라…….”
앨런의 말은 듣지도 않은 이안이 조용히 뇌까렸다.
푸른 눈이 차츰 생각에 잠기며 가라앉았다.
여태까지 아리엘의 석연치 않았던 점이 그의 머릿속에 하나둘, 스쳐 지나갔다.
유독 의무실을 무서워하고, 디저트를 제외한 음식 자체를 먹으려고 하지 않던 모습.
페로몬 얘기만 나오면 눈이 살짝 흔들리고, 넝마가 된 백호 상태의 모습이었던 그를 보고도 놀라지 않던 것까지도.
‘그런 것을 매번 보았으니 보았으니까 상관없었던 거겠지.’
자신의 살이 찢기고 터지는데 남이 그런다고 해서 놀랄까.
무언가 맞지 않았던 것이 하나둘씩 연결되어 맞물렸다.
그리고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랬으니까.
퍼즐이 맞춰지듯 딱딱 떨어지는 생각들에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이안 님?”
“왜.”
“다섯 번 말하셔도 들으시지 못하시길래 걱정했습니다. 혹시나, 하고요.”
앨런이 자신의 가슴 위에 한 손을 올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척했다. 그리곤 정갈하게 놓인 시체의 머리칼을 휘어잡아서 들어 올렸다.
“주군, 저건 어떻게 처리할까요?”
“그냥, 마물 밥으로 던져 버리든가.”
“네. 마물들을 불러 놓고 한가운데에 던져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앨런이 과하게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부복하며 물러갔다.
***
“지금쯤 저희 아버지가 돌아가셨겠군요.”
느긋하게 차를 한입 머금은 녹스 히아트가 밖을 바라봤다.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밀색 머리칼 위로 부스스 흩어졌다.
“아쉴라 가주의 예상이 틀리면 안 될 텐데…….”
그의 테이블 위에는 만장일치로 녹스 히아트를 가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문서가 놓여 있었다.
“셀레스틴, 전 히아트 가주를 버리자고 제시한 것도 그쪽이었죠.”
“단지 저는 히아트에 더 유리한 방안을 제시했을 뿐이에요. 녹스.”
둘도 없는 화목한 커플이라는 소문과는 달리, 그들의 사이는 무척이나 사무적이었다.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만난 것이었으니까.
셀레스틴이 찻잔을 입 근처로 가져다 댔다.
“덕분에 좋은 결과를 얻었잖아요?”
히아트 가주가 살아 있었다면 몇 년이나 늦춰질 일이었다.
“당신이 전 히아트 가주를 버린 덕분에. 어차피 당신은 아버지를 버리려고 했던 거 아니었나요?”
그 말을 들은 녹스 히아트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그건 맞지. 하필 일 처리를 느슨하게 하셔서.”
더 큰 이익을 위해 희생하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새로운 히아트 가주가 된 그가 혀를 한 번 찼다. 그리곤 부드럽게 웃으며 앞에 있는 여자를 쳐다봤다.
“셀레스틴, 나는 당신의 이런 영특한 점이 참 좋아요.”
그러니, 실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 거예요.
뒤의 말은 내뱉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그 말이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지는 셀레스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가족도 버릴 수 있는 냉혈한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숨기고 연기할 수 있는 사람.
셀레스틴 시몬드는 무엇보다 녹스 히아트의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과 무척 닮은 그 점이.
흠잡을 데 없는 자세로 찻잔을 내려놓은 셀레스틴 시몬드가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도 당신이 좋아요. 새로운 히아트의 가주님.”
발그레 물든 뺨에는 설렘이 묻어나 있었다. 셀레스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종이 들어오기 위해 양해를 구하는 소리가 들렸다.
***
톡. 토독.
아무런 미동 없이 책상 위로 손가락 하나만을 두드리던 이안이 서서히 눈을 떴다.
“앨런.”
“예.”
“우리 아리엘에게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는 걸까.”
“…….”
앨런 또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입술만 달싹이던 그의 보좌관을 뒤로한 이안은 히아트 가주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 내용을 떠올렸다.
“네가 생각하는 그녀의 모든 것은 거짓이야.”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고 한 말일까.
“아리엘은 불량품이다. 실험에 실패한 불량품.”
어떤 효용 가치를 가졌기에 그들이 저렇게 안달이 난 걸까.
그녀 하나에 여우와 뱀이 달려들 만큼.
‘도대체 무엇이? 어떤 점이?’
뱀이 자신의 행적을 드러낼 정도로 그렇게 중요하단 건가.
온갖 의문이 이안을 휩싸았다.
“실험과 불량품이라…….”
이안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머릿속에서 예전에 그레이스 가(家) 가주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까진, 그들이 무얼 하는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아이들의 경로를 추적했더니,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이동했습니다. 하나는 페로몬이 있는 일반 아이들의 무리였고,”
“다른 하나는.”
“검은색 머리나 녹색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옮기는 무리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만약에 아리엘처럼 실험을 위한 무리였다면.
“그리고 이 둘 다 추적하는 도중 경로가 끊겼죠.”
그것도 서부의 아쉴라가 개입한 것이라면 말이 맞아떨어졌다.
마르코스의 가주가 그들을 찾지 못했던 것도, 그렇게 대규모의 실종사건이 일어났던 것도.
주로 독을 다루거나 은닉하는 법을 익히는 뱀 종족들에게는 밥 먹듯이 쉬운 일이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대규모 수인 실종사건도 서부가 벌인 짓이려나.’
그렇게 되면 일이 참 커질 텐데.
고민에 잠겨 있던 이안이 의자를 드르륵 밀며 일어났다.
해가 한가운데에 떠 있는 것을 보니, 낮잠을 자고 일어난 그의 고양이를 보러 갈 시간이었다.
***
“에드윌 로워드 12에서 열심히 짓고 있던 건물이 펠릭스 건물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어요.”
“먼데이 신문에서 그 매장이 오픈하는 시간을 알려 줘서 한숨도 못 잤지 뭐예요! 게다가 광장에 있는 시계탑의 종이 다시 울리다니요!”
사람들이 건물 앞에 모여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광장에 있는 시계탑만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그 근처에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은 벌써 인산인해였다.
펠릭스 상단이 위치해 있는 중앙광장 또한 북적거렸다.
“여러분, 광장의 시계탑은 멈춰져 있지 않았나요? 근데 시계탑 종소리가 울릴 때라니…….”
“어머, 그것도 모르셨어요? 펠릭스 상단에서 고장 난 시계탑을 수리하는 돈을 내놓은 데다가 나무아 바나아 님까지 찾아오셨잖아요!”
“나무아 바나아 님이 왜요?”
“광장 시계탑을 지은 사람이 나무아 바나아 님이세요!”
나무아 바나아는 <귀족들의 기본 교양서>에 나올 정도로 엄청난 사람이었다.
건축에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수인.
그리고 <귀족들의 기본 교양서>는 자다가 잠꼬대로도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외운 귀족들이 많아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기본적인 교양을 가지고 잘난 척을 하는 것은 그들의 필수 덕목이었으니까.
“아! 그랬었죠!”
“그래서 광장의 시계탑의 형태학적 미가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호사가들이 떠들어 댔잖아요.”
중앙 도시 측의 간곡한 요청으로 시계탑 하나를 지은 나무아 바나아는 10여 년 전,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1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면서 시계는 자연히 멈추어 버렸다.
하필 큰 예술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시계탑이어서, 중앙 도시는 철거도 손을 댈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펠릭스 상단에서 큰 거금을 내며 시계탑의 시계를 고쳐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처음엔 중앙 도시에서 그것을 거절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 펠릭스 상단은 나무아 바나아를 그들의 눈앞에 데려왔다.
그들의 요구는 딱 하나였다.
시계탑이 고쳐지고 나서 정오 시간에 시계탑의 종을 울리도록 하는 것.
잠적했던 나무아 바나아를 자신들의 눈앞에서 마주한 그들은 그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상단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시계탑이 고쳐지자 화제는 자연스레 그의 건축계 복귀가 주를 이루었다.
“나무아 바나아 님이 건축계로 복귀하실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시계탑도 다시 고쳐졌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 매장이 건축의 거장인 나무아 바나아와 미셸이라는 신예 건축가의 합작이라면서요? 외관만 슬쩍 봤을 때는 아주…….”
한 귀족이 매장을 향해 눈을 돌릴 때였다.
댕-댕-댕.
어딘가 청명한 소리가 그 근처에서부터 귓가를 타고 그들의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펠릭스 매장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아리엘의 피와 땀이 담겨 있는 결과물이 세상 밖으로 나올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