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참 멀리도 왔다.’
나는 긴장된 눈을 숨기며 앞에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쇠창살 안으로 얼굴이 부은 남자가 실실 웃고 있었다.
“왜, 당신도 나에게 궁금한 것이 있소?”
피식 앞에 있는 상대를 향해 비웃는 그의 뺨은 아직도 퉁퉁 부어 있었다.
저번에 이안이 때린 곳이었다.
“어쩌나,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네.”
그래도 한 가문의 수장이라고 뺨 말고 다른 곳은 멀쩡해 보였다. 예전의 히아트 가(家)의 가주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도 없는 행색이었지만.
“어차피 어떻게 하지도 못할 텐데, 그냥 이곳에서 빼내 주면 내가 잘 봐주지. 아무리 카델리온 가(家)라고 하더라도 히아트의 수장을 마음대로 이렇게 가둘 수는 없는 법. 난 필시 나가게 될 걸세.”
무슨 뻔뻔함인 거지?
비열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리는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기가 차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나가게 될 거, 자네가 열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가?”
“…….”
“왜, 아니면 뭐가 필요한가? 금, 은, 보화? 권력?”
‘응, 이상한 개소리는 여기까지.’
이 정도면 많이 참아 준 거 아닐까.
나는 헛소리를 지껄이고도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봤다. 예전에는 거대하게만 보이던 사람이 우스울 정도로 작아 보였다.
오히려 바짝 긴장했던 게 허탈하기까지 했다.
어릴 적의 나는 뭘 그리 무서워했던 걸까.
창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나는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횡령, 사기, 납치, 폭행, 수인 불법 매매, 탈세,”
창살 가까이 허리를 숙이곤 갈색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북부 마물 불법 운송까지. 많이도 해 드시셨더라고요?”
“하하, 무슨 얘길 하는 건가? 나는 모르는 일인데.”
히아트 가주가 상황을 천연덕스럽게 넘겼다.
“카지노 사장과 나는 아무 관련이 없다네.”
그러나 날카로워지지 않는 갈색 눈동자는 숨겨지지 않았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거겠지.’
히아트 가문은 다른 가문들이랑 다르니까.
수장 자리에서 내려왔다고 하더라도 일개 귀족 가문들이랑 히아트가를 비교할 수 없는 법.
그 앞에 쭈그려 앉은 나는 갈색 눈동자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앞에 있는 가주의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이 정도는 돼야지 적어도 한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건가.’
갈색 눈동자에 담겨 있는 그 오만함을 와장창 박살 내 버리고 싶었다.
“수인을 가지고 실험까지 했으면서.”
입 밖으로 차가운 목소리가 뚝 떨어졌다. 다분히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아직도 제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너, 너……!!”
그제야 히아트 가주의 눈동자가 확 커지더니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지만 내뱉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당신이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검은 고양이잖아. 맨날 날 가지고 칼로 째고 찌르고 별별 짓을 다 했으면서.”
자신이 갖고 놀던 수인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너는 분명 인간화를 못…!”
“어떻게 그렇게 호언장담할 수 있는 거지?”
“…….”
“이미 인간 모습으로 멀쩡히 네 앞에 있는데. 왜, 아! 인간화를 못 하게 일부러 막아 놓기라도 했나?”
날카로운 말투로 이안이 하듯이 비아냥거리자, 히아트 가주의 눈이 당혹스러움으로 빛났다.
‘정답인가 보네.’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확인 사살당하니 기분이 밑으로 파고들어 내려갔다.
‘이래서 이안이 빡치면 웃는 거구나.’
자꾸만 입 밖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건 네 가문을 위해 응당 겪어야 할,”
“응당 겪어야 할 뭐?”
“당연히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오로지 네 가문을 위한 일.”
이 정도 되니까 화가 나는 것을 넘어서서 어이가 없었다. 머리가 식어가는 느낌과 함께 내 목소리라 믿기 힘든 차가운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내 가문을 위한 일이 아니라, 너네의 더러운 이익을 위한 일이겠지. 너희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정해져 있는, 필요한 희생이었다네. 아리엘.”
하? 이제 내 이름까지도 막 부르네.
도대체 내 이름은 어떻게 알길래, 예전 셀레스틴 시몬드도 불러 대고 눈앞에 있는 히아트의 가주도 불러 대는 것일까.
그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 텐데.
나는 내 검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딴 식으로 네가 저지른 일을 합리화하지 마.”
“대의를 위해 너 하나를 바치는 건 응당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너네 가문을 위해서? 아. 이제는 가문도 없겠구나.”
비아냥거린 내가 가방을 열어 종이를 꺼내 앞에 있는 남자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가문의 가신들과 식솔들의 만장일치로, 히아트 가문에 거대한 누를 끼친바, 벨렉 히아트, 현재 히아트 가주를 가문에서 파면시킨다.”
그의 눈에서 희망이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다.
‘이걸 위해서 며칠 밤을 새웠는지.’
눈알이 빠져라 서류만 들여다봤다.
이걸 위해서.
‘그래도 그렇지, 카지노 하나 털렸다고 아버지를 버리는 아들도 참 이상한 것 같단 말이야.’
마치 일부러 버리려고 작정했던 것처럼.
그렇지 않고서야 카델리온 가에서 손해 배상 청구서와 항의서, 그리고 히아트 가주를 파면시켜 달라는 요청에 며칠도 지나지 않아 답변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 하하.”
믿고 있던 기대가 부서진 히아트의 가주가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가리고 큰 소리를 내며 웃던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동자에 서려 있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광기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렇군.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잊고 있었어. 그분은 충분히 날 버리고도 남으실 분인데.”
그 눈동자 밑에 있던 공포와 절망감, 그리고 두려움이 한데 섞여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몇 년 전 시몬드 가에서 내가 항상 짓고 있었던 눈빛이었다.
웃다가 울기까지 했는지 눈가가 충혈된 히아트 가주가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자네, 내가 뭐 하나 알려 줄까?”
“어떤 건데.”
어차피 카델리온 저택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될 수인.
나는 어서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닥였다.
“널 좋아하는 수인은 이 세상에 없다네. 단 하나도. 특히나 네가 가족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었던 그들은 더더욱 너를 증오할 수밖에 없네. 넌 그들이 누려야 할 영광을 모조리 망쳐 버렸거든.”
그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켰다.
“정말, 모조리.”
밑에서부터 무언가 와르르 무너지는 느낌과 함께 텅 빈,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거, 참, 듣기 좋은 말이네.”
내가 그 빌어먹을 인간들의 앞길을 살짝이라도 망쳐 놓았다니.
내가 상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리를 일어났다.
“근데 그거 알아?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해도 내게는 아무 타격이 가지 않는 거?”
말을 끝마친 내가 밖으로 나가는 문을 밀었다.
***
뻐억!
이안이 서늘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봤다.
바닥에는 히아트 가주가 흘린 피가 웅덩이져 있었다.
“차라리 죽이지… 그래?”
쿨럭, 한 번 피를 내뱉은 그가 입가를 닦았다.
“알고 있는 모든 걸 불고 나서 죽어야지. 벨렉 히아트.”
“안, 타깝게도 그건 못, 말… 한다네.”
“그럼 어쩔 수 없네.”
이안이 저 옆에서 검을 가지고 왔다.
무감각한 눈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리고 그와 함께 서늘한 칼날이 다리를 꿰뚫었다.
아무런 신음도 내지 않은 히아트 가주의 입술이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근데 그거 알아?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해도 내게는 아무 타격이 가지 않는 거?”
넝마가 된 히아트 가주의 머릿속에서 얼마 전에 자신을 빈정대고 지나간 고양이 새끼가 한 마리 떠올랐다.
시몬드 가주가 그렇게나 증오했던 고양이 새끼가.
‘왜 그렇게 증오했는지 알겠군.’
자신만만했던 그 표정. 여유로운 그녀의 분위기.
아니, 그녀의 모든 모습이 시몬드 일가의 열등감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래. 나만 이렇게 끝나는 것은 억울하지.’
그리고 그녀를 짓밟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카, 델리온 가주. 내…가 재밌는 거 하나 알려 줄까?”
히아트 가주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그마저도 잘 올라가지 않아 얼굴에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의 인생을 망치고 싶었다.
“당신이 데리고 있는 검은 고양이 말일세. 내가 그 고양이의 비밀을 알려 주지.”
“듣고 싶지 않은데.”
“단지 네가 그녀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이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자, 히아트 가주가 이죽대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 새, 끼 고양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적어도 너보다는 많이 알고 있겠지.”
“네가 생각하는 그녀의 모든 것은 거짓이야.”
말을 들은 이안이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렸다.
“그건 내가 판단하는 거야.”
“그녀의 일을 알고도 그렇게 나올지 모르겠군. 도대체 뭘 믿고 그러는 건데?”
“그녀를 믿으니까.”
아리엘의 일은 그녀에게서 직접 듣고 싶었다.
‘쯧. 말할 생각이 없는데 말해 버렸네.’
이안이 화사하게 웃으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우습……군. 참 거만…해.”
“됐고, 배후나 말해. 마물,”
그러나 그 말을 무시한 히아트의 가주가 그를 바라보며 비열하게 웃었다. 실핏줄이 맺혀 있는 눈가가 누군가의 인생을 망치고 싶다는 흉한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아리엘은 불량품이다. 실험에 실패한 불량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