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창문을 열고 힘껏 사자후를 내지른 나는 그 자리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미쳤어……. 정말…….”
도대체 왜 이안이 계속 생각나는 건데.
계속해서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백호의 얼굴 때문에 문서가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필이면 생각나는 것도 다…….’
양 볼이 하도 화끈거리다 보니 손이 차갑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책상 위에서 나를 기다리는 죄 많은 문서들을 보니 그나마 진정이 되었다.
‘그나저나 오늘이 며칠째지?’
날을 지새운 지 한 삼 일됐나.
내 눈가에 있던 다크서클은 볼을 점령한 지 오래였다.
자가 복제라도 하는지 문서들은 봐도 봐도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틈만 나면 허공에 떠다니는 백호의 모습 때문에 내 효율이 조금, 아니 꽤 줄어든 탓도 있었지만.
아니 그래도, 삼일 밤을 새웠는데 겨우 반을 한 건 너무 하지 않나?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을 저질러야지, 이 정도 양이 나오는 거지.
‘무슨 까도 까도 계속 나와.’
자기들이 양파야 뭐야.
아.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것도 매력인 건가?
“아리엘.”
입술에서 느껴지는 말캉한 감촉과 함께 내 몸을 덮는 어둡고 따뜻한…….
“아악!!”
아니, 그 매력 아니라고. 머릿속에서 없어져라. 쫌!
이안의 얼굴이 둥둥 떠다니기 무섭게 나는 그 얼굴을 가로질러서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혼자 베개를 들고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얼굴을 향해 마구 휘저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베개에 얼굴을 묻곤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어버지라고…….(없어지라고)”
난 너희가 환상인 걸 안다고. 근데 왜 안 없어지는데.
마지막 시도야. 이거까지 했는데 안 없어지면 그냥 포기할래.
내가 떠다니는 환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왜 하필 입술 쪽으로 손이 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환상이니깐.
‘이러면 보통 금방 없어지던데.’
그의 입술에 엄지손가락을 갖다 댄 내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엄지손가락에서 말랑한 감촉이 느껴졌다.
‘왜 말랑하지?’
하하. 요즘 환상은 촉각도 느껴지나.
‘아니면 이게 말로만 듣던 자각몽?’
거의 자는 줄도 모르는 상태에 있으면 꿀 수 있다던데.
정말 잠을 너무 안 잤나.
“아리엘 다 만졌어?‘
“으아아악!”
“왜, 더 만져도 되는데.”
아니, 그게 환상인 줄 알았다고.
환상을 없애려고 그랬다고.
“그게, 아ㄴ,”
“너무하네. 방금 전까지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내 곳곳을 쓸고 만졌으면서.”
쨍그랑!
경악으로 가득한 마리의 눈이 평소보다 두세 배 더 커져 있었다. 그녀는 이 방에 있는 그 누구보다 가장 뚜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태껏 봤던 그녀의 표정 중 가장 선명한 표정이었다.
“……아리엘 님?”
싸늘하다.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드레스 입고 세상을 다 가지신 표정으로 뽀짝뽀짝 저택을 활보하고 다니시는 고양이셨는데…….”
마리가 세상 다 잃은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았다.
“스물다섯 시간 주무시고 햇빛이 너무 밝다고 하시며 앞발로 눈 비비는 모습까지 제 기억에 선명한데…….”
“지금은 무고한 호랑이를 유혹해 놓고 나 몰라라 하는 중이지.”
이안이 처연한 눈매를 가장하자 앨런이 옆에서 거들었다.
“이래서 고양이 키워도 다 부질없다고 하는군요.”
어느새 정신을 되찾은 마리가 화들짝 놀라더니 자신이 깨뜨린 접시를 얼른 치우고 물러났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아니야! 마리!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그거 아니라고!!
이대로 가지 마.
결국 마리를 붙잡지 못한 내가 망연자실하게 문을 바라보았다.
“아리엘 님, 이안 님의 몸은 정말 차갑기만 하십니까?”
“따뜻했는데.”
“오호라, 따뜻하셨군요?”
앨런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안경을 추켜올렸지만 애석하게도 아리엘은 그것을 보지 못했다.
“저에겐 피도 눈물도 없으시면서. 주군 서운합니다. 그렇게 혈기왕성한 분이셨다뇨.”
……?
나 뭔가 이상한 말한 것 같은데.
그러나 낌새를 눈치챌 틈도 없이 이안이 곧바로 눈꼬리를 휘며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아리엘도 좋았어?”
“좋…….”
미친. 나 방금, 뭐라고 한 거야.
아니, 뭐가 좋은데!
따뜻하다고? 좋다고?
‘좋은 건 사실이긴 했지만…….’
사람이 잠을 못 자니까 뇌에 필터링이 없어지나 보다.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매끄럽게 끌어 올린 그의 붉은 입꼬리가 시야에 가득 찼다.
누가 물을 끼얹은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내가 내 볼을 짝 소리 나게 때렸다.
순간 미간을 찌푸린 이안이 내 볼에 자신의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살짝 붉어진 볼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아리엘 자학 행위는 안돼.”
“그런 거 한 적 없어.”
퉁명스럽게 말은 내뱉은 내가 이불을 뒤집어쓴 뒤, 얼굴만 내놓곤 눈을 질끈 감았다.
“……나 잘 거야. 말 걸지 마.”
그래, 이건 다 잠이 부족해서 생긴 현상이다.
눈을 감고 얼마 안 돼서 푸흡, 하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이 두어 번 느껴졌다.
간질간질한 가슴께를 무시한 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어서 잠이 오길 바라면서.
***
“상단주님이시다!”
“안녕하십니까. 상단주님!”
“상단주님, 좋은 점심입니다!”
왜 이렇게 반기는 거지?
보통 까마득한 직장 상사, 아니 회사 사장이 지나가면 별로 안 좋아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래서 일부러 조용히 들어왔는데.
되려 직원들이 자기 일을 하다 말고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반겼다.
“주님, 와 주셨군요!”
상단주라고 똑바로 말해 줄래. 클로에.
유유히 그들 사이로 걸어 나와 나를 향해 다가온 클로에가 눈을 빛냈다.
그리곤 박수를 한 번 치며 시끄러운 분위기를 환기했다.
“여러분, 이분이 바로 저희 상단의 상단주님이십니다!”
와아아아!
우렁찬 박수 소리가 흘러나왔다.
클로에가 나를 어떤 이미지로 만들어 놓았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비안 님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왜 한 마디 하라는 건데.
눈치 없이 평화로운 일자리에 습격한 회장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쉽지만 가장 어려운 게 한 마디 하기인데.
새로운 사람들과 모인 곳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첫 마디는 항상 난감했다. 자기소개하기는 너무 진부하고 그렇다고 이상한 말 하면 어색한 적막이 흐르면서 갑자기 분위기 싸늘해지니.
게다가 지금은 상단주라는 지위에 알맞은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이 기분.
말을 고르고 고르던 내가 입을 열었다.
“밥 먹었어?”
“네!”
“네. 먹었습니다.”
직원들이 눈을 반짝이며 빛냈다.
사람은 밥심이지.
일할 땐 밥심으로 일해야 한다.
“점심시간에는 일하지 말고. 쉬든가 놀든가 자든가 해.”
“일하는 게 재밌어서 괜찮습니다!”
“맞아요.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일하는 건 처음이거든요.”
네?
일하는 게 재밌다고요?
아니면 이전에 고달픈 사회생활을 한 걸까.
“성과에 따른 추가 보상이라니! 일을 하면 할수록 돈이 들어오는 기분입니다.”
얘네는 왜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처럼 변해 버린 걸까.
‘클로에 도대체 어떤 애들을 뽑아 놓은 거야…….’
내가 아연한 눈으로 옆에 있는 클로에를 쳐다봤다. 능청스럽게 그 모습을 무시한 클로에는 발랄하게 말했다.
“당부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아.
가장 중요한 얘기가 생각났다.
목소리를 두어 번 가다듬은 내가 입을 열었다.
“우선 첫째, 세금은 똑바로 다 내. 탈수기에다가 넣고 탈탈 털어도 아무것도 안 나오도록.”
“상단주님, 탈수기가……?”
아. 여기는 탈수기가 없지.
실수했다.
“……물질의 물을 쫙쫙 빼내는 도구에다가 이름을 붙인 거야.”
“그런 도구까지 발명하시다니.”
클로에. 그거 아니야.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구현하고 이용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존경 어린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여기서 상단들이 견제할 때 제일 먼저 쓰는 수법이 거래처를 끊는 것과 세무 조사 의뢰야. 조그만 거 가지고 탈세 의혹을 씌우는 게 가장 전형적인 수법이기도 하고.”
만족스러운 사무실의 정경과 매우 열정적인 직원들을 쓱 훑어봤다.
다른 상단들의 눈에는 상당히 거슬리겠지.
“우리는 다른 상단들의 아니꼬운 시선들을 상당히 많이 받을 예정이야. 이제껏 없던, 새로운 길을 걸어갈 예정이니까. 탈탈 털어서 먼지 안 나는 곳이 어디 있겠니.”
말을 마친 내가 잠시 침묵했다.
“그래도 우리는 먼지 나면 안 돼. 절대로.”
사소한 걸 가지고 희대의 악덕 상단 같이 만드는 것이 상단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니까.
거기까지 말을 마친 나는 빙그레 웃었다.
“펠릭스의 일원이 된 것을 환영하고, 앞으로 이 상단 잘 부탁해.”
***
상단 사무실에 박혀 있는 나는 오늘도 문서를 넘기고 있었다. 이안은 내가 나갈 때마다 놀러 나간 줄 알던데. 상당히 억울한 일이었다.
‘정말 하늘 아래 문서밖에 없는 더러운 세상.’
히아트 가(家)와 관련된 서류에 깔려 죽을 뻔하다가 겨우 빠져나왔는데, 이번에는 상단 일이라니.
어떻게 일을 좋아할 수가.
책상에 엎드려 늘어진 내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클로에 도대체 어떤 수인들을 뽑아 놓은 거야…….”
“아리엘 님이 말씀하신 대로 지원자들의 출신이나 성별, 인종, 신체 조건, 가족관계 등을 다 가리고 그 자리에 직무와 관련된 경험을 설명할 수 있도록 바꾼 다음에 뽑았습니다.”
클로에가 주먹을 불끈 쥐며 행복한 듯이 말했다.
“덕분에 다른 곳에서 알아보지 못한 인재들을 긁어 올 수 있었어요! 상단에 대한 소속감이나 충성심도 엄청나고요!”
그걸 노린 건 맞긴 한데, 클로에 그 말이 아니잖아.
“그니까 어떻게 일을 좋아할 수가 있냐고…….”
“모두 다 성과급 덕분입니다. 영업, 판매 부서에서는 어떻게 하면 물건을 더 팔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으니까요. 기본급과 성과급으로 나누어서 8대 2의 비율로 나누어 주다니, 정말 상상치도 못한 방법이었습니다!”
“매장에서 영업을 담당하는 직원들에게도 해당하는 사안인 거 알지?”
원래 인센티브 제도는 매장에서 영업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만 쓸 계획이었다.
펠릭스를 더 효과적이고 파격적으로 홍보하기 위해 다른 팀에도 성과급 제도를 도입하긴 했지만.
“네, 다들 만족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매장 공사는 다 잘 됐고?”
“얇은 유리판을 겹겹이 쌓아 스카프를 두른 모양처럼 매장이 형성되었습니다.”
딱 원하던 느낌의 외형이었다.
“그러면 내부는?”
“내부 또한 깔끔하지만, 파격적으로 디자인된 것 같습니다. 미셸의 생각들이 이곳저곳에 담겨 있더라고요.”
클로에가 문서를 탁탁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나무아 바나아 님과 새로운 신예 건축가와의 협업이라 그런지, 귀족 사회 반응도 뜨거웠고요. 현재 3명 이상의 귀족 수인이 모이면 에드윌 로워드 12거리에 있는 건물이 언급된다고 합니다.”
딱 좋은 반응이었다.
비슷한 스타일의 건축물 사이에 있는 파격적인 건물.
잘하면 에드윌 로워드 12를 상징하는 건물로 이름 날릴 수도 있겠지.
“저도 가 봤는데 정말 예쁘더라고요! 역시 아리엘 님은…….”
예쁜 거 하면 이안인데.
저택에 있는 백호 한 마리가 정말 예뻤다.
보석같이 보이는 눈동자에다가 햇빛에 부스스 흩어지는 은발, 그리고 붉은 입술까지…….
‘……왜 계속 이쪽으로 생각이 흘러가는 거지.’
정말, 요즘 뭐만 하려고 하면 호랑이 생각으로 가득 차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
백호가 머릿속을 점령한 느낌이야.
“……런 계획입니다. 어떤가요?”
“나, 이안 카델리온 좋아하나 봐…….”
클로에의 말을 듣지 못하고 앞에 있는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아리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