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6. (107/111)

106.

“이안, 근데 누가 들어왔으면 어쩌려고.”

생각해 보니 아무리 의료 목적이라고 해도, 다른 수인이 본다면 충분히 오해할 만한 장면이었다.

“못 들어와. 들어올 때 비밀 통로로 문 잠가 놔서.”

아. 책을 옮긴 게 그걸 위한 것이었어?

발갛게 물든 그의 눈가를 닦아 주던 내가 멈칫하며 손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그가 내 손목을 가져가 입술로 내리찍었다. 끼고 있던 장갑은 언제 던져 놓았는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상태였다.

‘쟤…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분명 원작에서는 누군가 자신의 맨살에 스치는 것도 싫어했는데. 수인들과 실수로라도 닿지 않기 위해서 턱 끝까지 옷을 다 잠그고 항상 장갑까지 끼고 다니는 것으로 묘사되었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안은 왜 입맞춤을 하고 너무 좋아서 울려는 것처럼 보일까?

애초에 저 성격에 입맞춤한 것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의료 목적이라도.

‘원작이 정말 쓰레기가 된 건지, 쟤가 원작 노선을 탈피한 건지.’

클로에를 만나고서도 다른 사람 불러오라고 하며 곱게 그녀를 돌려보내는 것이나 나랑 이런 짓을 한 거나 이 정도면 원작에 폭주 기관차가 들이박은 게 아닐까. 그랬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멍하니 앞에 있는 수인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똑같은 하얀 머리와 유리알 같은 푸른 눈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잠시만 쟤 지금 푸른 눈에다가 흰색 머리인 상태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곳에서는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이어야 하는 건데.

“이안. 너,”

내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눈매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눈이랑 머리? 아.”

당황스러워하는 그녀의 표정을 구경하던 그가 짓궂게 눈을 휘었다.

“아리엘 아까 주인님이라고 부를 때의 모습이 더 좋았던 거야? 혹시 그런 취향이면 맞ㅊ,”

“아니.”

“그럼 지금의 모습이 더 좋아? 어차피 두 모습으로 입 맞…….”

조용히 해! 좋아서 울려고 했던 애가 뭐라는 거야.

기겁한 내가 황급히 그의 입을 두 손으로 막으며 속삭였다.

“너는 좋아서 울었잖아.”

“응, 좋았는데.”

그가 내 두 손을 내리며 눈꼬리를 접었다.

“왜, 한 번 더 하고 싶어?”

그러고 보니 당장 다시 입술을 맞닿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와 내가 가까이 붙어 있었다.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거리를 두고 그의 눈동자와 내 눈동자가 맞닿았다.

“…변태 호랑이.”

“이런, 그걸 지금 안 거야?”

미친.

그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거센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자기가 이상한 걸 인정하는 사람은 이길 방법이 없는데.’

황급히 허리를 뒤로 쭉 뺀 내가 그로부터 멀어지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멀어지긴 커녕, 되려 더 가까워지기만 했다. 나는 시선을 내려 허리를 단단하게 붙들고 있는 팔을 바라보았다. 단단한 팔이 내 허리를 빈틈없이 휘감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갈색 빛깔이 드는 돌을 꺼내 아득 깨문 이안이 아리엘의 목을 향해 얼굴을 묻었다.

그의 페로몬으로 흠뻑 덮여 있는 그녀를 보니 가슴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만족감이 끓어올랐다.

불쾌한 것의 잔재가 미세하게 남아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자신의 페로몬으로 다 뒤덮어 놨는데도 나는 향이라니.

모르타 가주가 어지간히 작정한 게 아니고서야.

쯧, 혀를 찬 이안이 눈앞에 있는 하얀 어깨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하긴, 그녀의 어깨에 달린 페로몬석들이 모두 사용됐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아리엘 너한테서 이상한 새끼 냄새나.”

“페로몬석 때문이야.”

그나마 존재하던 내 페로몬도 다 네 페로몬으로 뒤덮였을 판국에, 무슨 이상한 냄새야.

“아닌 거 알잖아.”

모르타 가주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이안이 그녀의 목을 살짝 물었다가 놓자, 그녀의 몸이 순간적으로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낮게 웃은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다 죽이면 될 거라 생각한 게 실수였어.”

그녀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뗀 그가 장갑을 다시 끼곤, 모르타 가주가 누워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때, 바닥에서 무언가 벌떡 일어났다.

“주, 죽일 거야!”

방금까지 기절해 있던 수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목소리였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동공과 함께 검을 쥐고 있는 모르타 가주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걸 보는 이안이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가 고개를 까닥이자마자 모르타 가주가 들고 있던 검이 아리엘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바꿨다.

챙그랑!

모르타 가주가 들고 있는 검의 손잡이 부분을 발로 차 버린 그가 싸늘하게 웃었다.

공기 자체를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감에 모르타의 가주가 벌벌거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열심히 참았어. 아리엘. 그치?”

그가 자신의 밑에서 공포심으로 두 눈을 가득 채운 채 벌벌 떨기만 하는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먼지만도 못한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옅은 경멸이 서려 있었다.

“북부는 칼 하나 못 드는 애송이를 영주로 앉히진 않는데. 이건 도대체 무슨 일일까.”

퍼억!

이안이 해맑게 웃으며 앞에 있는 수인을 걷어찼다.

“일어나. 어차피 네가 소리 질러도 아무도 안 와. 나, 죽인다며. 시도는 해봐야지.”

조곤조곤 속삭이는 목소리에 모르타 가주의 옷이 식은땀으로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쿨럭, 명치에서부터 올라오는 피를 내뱉은 모르타 가주가 힘겹게 일어났다.

“날 봐.”

그가 모르타 가주의 얼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모르타 가주 앞에 있는 핏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숨 막히는 기운이 폐부를 옥죄었다. 따끔거리는 걸 넘어서서 자신을 그대로 파내는 것 같은 살기에 그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날 죽이려면 내가 뭐 하려고 하는지 봐야지. 안 그래?”

어떻게 상대를 보지 않고 죽일 수 있겠어.

무섭도록 싸늘한 목소리가 다정함을 연기하고 있었다.

곧 이어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이안은 자신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필사적으로 바닥에 기어 다니는 모르타 가주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이런. 벌써 죽으면 안 되지. 특별히 칼도 안 썼는데.”

“끄…으….”

우욱.

모르타 가주가 다시 피를 내뱉자 이안의 표정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걷히며 말투가 바뀌었다.

“이런. 아리엘 님이 좋아하시는 옷인데. 피가 튀었잖아요. 짜증 나게.”

어느새 기절한 듯, 잠잠해진 모르타 가주를 지나친 이안이 아리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가자. 졸리면 안아 줄까?”

“아니. 안 졸려.”

정상적인 수인이라면 방금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고도 졸릴 리가 없었다.

있던 잠도 다 달아날 판이었다.

“칼을 쓰면 돼지 멱따는 소리 때문에 주인님 잠이 달아날까 봐 사용하지도 않았는데요.”

자연스럽게 아리엘을 안아 들고 사장실 문을 연 그가 자연스럽게 호칭을 바꾸었다. 난장판이 된 사장실과는 달리, 카지노는 아직까진 평화로웠다.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

그때였다.

카지노를 밝히고 있는 마정석들이 저 멀리서부터 하나둘씩 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카지노 안에 어둠이 뒤덮었다.

“이제는 우리가…….”

저 멀리서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또 만나자는 말이 이리 무섭게 들리다니. 그것도 능력이었다.

분명 원래는 되게 경쾌하고 발랄한 곡이었는데.

‘…레아다.’

노래 한 음 한 음이 끝날 때마다 곳곳에서 내뱉지 못하고 삼켜지는 비명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이게 무슨 공포 영화도 아니고.’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나를 안고 있는 이안의 셔츠를 손에 꽉 쥐었다.

“무서워?”

“아니.”

말과는 다르게 그의 셔츠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꽉 붙잡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작은 손에 이안이 그녀의 눈에 무언가를 둘렀다.

눈 위에서 만져지는 보들보들한 촉감에 내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뿐이었다.

손가락으로 내 콧대를 따라가며 쓸어내리는 것 같은 촉감이 있던 뒤로,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안 되겠다.”

고운 손이 내 머리 위에 내려앉아 빠른 손길로 눈을 두르고 있던 무언가를 해체해 버렸다.

멍하니 서 있는 아리엘의 눈덩이 위로 손을 올린 이안이 큰 궤적을 그리며 칼을 휘둘렀다.

“커헉.”

그러자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누가 처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정체는 그에게 기척을 죽이고 다가오던 이곳 직원이었다.

문제는 무기를 들고 그에게 달려드는 이가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었지만.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내가 서 있는 곳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찰박찰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 때문에 이런 소리가 나는지는 알고 싶지 않아졌다.

가만히 서 있는 상태로 다가오는 이들만 깔끔하게 처리하고 자리를 이동하려고 하는 이안을 붙잡았다.

“이안, 이거 돈 쓸어 담고 가야지.”

“그럼요. 주인님.”

이곳 환전소에 있는 금액만 해도 무시 못 할 금액이었다.

이안이 수하들에게 환전소에 있는 돈들을 싹 털라고 지시한 것을 본 나의 어깨가 느슨해졌다.

갈 땐 가더라도 다 털어먹고 가야지.

‘분명 못할 것 같았는데, 드디어 끝났어.’

다 끝났다.

긴장감에 굳어 있던 몸이 슬슬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벌어지는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자, 이안이 나를 고쳐 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반항을 포기하곤 얌전히 그에게 기대 웅얼거렸다.

“이안. 넌 누구의 소유도 아니니까, 주인님 같은, 그런 말 하지 마.”

“주인이 아리엘이면 괜찮을 것 같은데.”

“아, 이거 돈은 반반씩 나누는 거다?”

서로 각자 다른 말을 하며 언제나와 똑같이 마차 안으로 들어간 것은 덤이었다.

***

거울로 자신의 단정한 용모를 감상한 앨런이 거울을 내려놓았다. 언제나처럼 얼굴 위에는 안경이 걸쳐져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운 흔적은 예민한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게 했다.

“히아트 가(家) 수장은 잡았어?”

“아니요. 못 잡았습니다.”

“앨런 요즘 한 발짝씩 늦는 것 같은데. 내 착각인 건가?”

느슨하게 고개를 기울인 이안이 차가운 눈동자로 앨런을 바라보았다. 앨런이 곧바로 이안에게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고개 들어.”

보폭을 넓힌 이안의 걸음을 앨런이 따라갔다.

“히아트 가(家) 수장의 행보를 추적한 결과, 아직까지 북부에 남아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붙잡도록. 이번 주가 지나기 전까지, 다 처리해.”

그 말을 들은 앨런은 당장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해 보기 시작했다. 에인트가 잘 돌아가는지 확인하는 것부터, 이번 카지노 수사로 벌어들인 금액 확인하기, 카지노와 연관된 가문들 다 탈탈 털어 내서 쳐내기…….

이마저도 아리엘이 히아트 가(家)와 관련된 문서를 싹 다 긁어모아 가고 남은 양이었다.

요 며칠간 퇴근을 못 할 것 같다는 절망적인 사실을 예측한 앨런이 입을 열었다.

“아. 이안 님, 이번 카지노 터는 것을 수행하면서 이상한 점을 하나 느꼈습니다.”

“뭔데.”

“카지노 안에 있던 마물이 누군가에게 조종받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택 안에서 고라니 울음소리 같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