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 (106/111)

105.

“아하하… 그게.”

이안의 손안에 있는 책과 자신이 들고 있는 꽃병을 번갈아 보던 눈동자가 부산히 흔들렸다.

‘망할. 누구인지 보고 던질걸.’

서류에 집중하는 바람에 문이 열리자마자 그쪽으로 냅다 책을 던져 버린 게 후회됐다.

그때 이안에게서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리엘 잘했어.”

응? 얘가 내가 던진 책에 머리를 제대로 맞았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혹시나 그의 얼굴에 무언가 맞은 자국이 있나 샅샅히 살펴봤다.

‘뭘 맞은 자국은 없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분명 저 백호의 성격대로라면 책과 꽃병은 투척용 무기가 아니라며 비아냥거리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비밀 통로와 이어진 책장 문을 닫고는 책장에 있는 책들의 위치를 옮길 뿐이었다.

‘분명 뭐가 있는데.’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이안을 찬찬히 훑어봤다.

그리고 발견했다.

그의 한쪽 손에 들려 있는 피 묻은 검을.

누굴 죽인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검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미친.’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 같다.

나는 들고 있던 꽃병을 소리 없이 바닥으로 내려놨다.

원래 호랑이가 검을 들고 있으면 조용히 숨죽이고 있어야 하는데.

아니, 애초에 백호 눈에 띄지도 않는 게 제일 좋았다.

‘어떻게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책을 던졌더니 맞은 사람이 검을 들고 있는 호랑이, 그것도 백호라니.

내가 아무리 루이즈의 지옥 훈련을 받고 그녀에게 검술을 배웠다고 해도 이안의 손톱 때만큼도 못 한 수준. 칼도 없는 나는 아예 가망이 없었다.

냉정하게 상황 판단을 마친 나는 저 칼을 한 번이라도 막을 수 있는 것을 찾아 급하게 두리번거렸다.

‘여기 있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기절해 있는 모르타 가주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차하면 방패로 쓸 생각이었다.

“이안.”

“응. 주인님.”

주인님이라니.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말에 와락 인상을 찌푸릴 뻔했지만,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바라보곤 필사적으로 웃었다.

‘쟤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님이라 부르길 즐기는 것 같은데.’

설마.

“목에 속박구라도 찰까?”

순간적으로 세드리한 저택에서 이안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높였다. 원래 칼을 들고 있는 수인이 왕이었다.

“지금은 단둘밖에 없으니 말씀을 편히 놓으셔도 됩니다. 제가 어찌 이안 님의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검을 가지고 내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그를 보자 한껏 비굴했던 그와의 첫 만남이 생각했다. 그때도 저 백호는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혹시 저 검을 다른 곳에 내려놔 주실 수 있으신가요?”

나는 칼을 들고 있는 백호 앞이라면 더 비굴해질 자신이 있었다. 내가 두 손을 모으고 최대한 처연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추위에 덜덜 떨리는 내 손이 불쌍함을 더해줬다.

“무-울론! 이 세상의 어떤 호랑이들보다, 아니 어떤 수인들보다 마음이 넓으신 얼음의 수호자, 카델리온의 가주님께서 누구보다 충심을 다해 작전을 수행한 저를 죽이시진 않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눈을 도르륵 굴린 내가 추욱 눈꼬리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이안에게서 배운 수법이었다.

“혹시 아…닌가요?”

그러자 칼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눕혀진 칼끝이 모르타 가주의 그… 소중한 부분을 아슬아슬하게 향하고 있었다. 닿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아리엘 네 작품이야?”

“아. 타락한 마음을 가진 자에겐 심신 수양이 필요해 보여서.”

이안이 칼을 내려놓은 것을 확인한 내가 재빨리 말투를 바꿨다.

“그래서, 저 자세로?”

기절해 있는 모르타 가주의 양다리는 M자로 벌어져 있었고 두 손은 얌전히 모아 합장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합장한 손 밑에는 「저는 쓰레기입니다. 저를 쓰레기통에 넣어 주세요.」라고 정갈하게 쓰인 종이가 깔려 있었다.

기절해 있는 모르타 가주의 자세를 빤히 바라본 이안은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렸다.

“성의를 봐서라도 한 번은 쓰레기통에 넣었다가 빼 줘야겠는걸.”

“저 정도의 덩치가 들어갈 만한 쓰레기통이 있을까?”

“그냥 쑤셔 넣으면 어떻게든 들어가게 되어 있어, 아리엘.”

아, 그렇……

‘잠시만 내가 이걸 왜 자연스럽게 납득하고 있지?’

아무래도 호랑이들과 같이 살다 보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내 피가 묻은 손수건들을 이안이 볼 수 없는 각도로 옆으로 민 나는 들고 있던 서류를 그에게 보여 줬다.

“이안, 이거 봐. 히아트 가(家) 가주랑 연관되어 있었…….”

“아리엘 이게 뭐야?”

그가 내 피로 물든 손수건을 집어 올렸다. 앞에 있는 이안의 표정은 어딘가 비틀린 것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로.”

“지금 네 피가 한두 방울도 아니고, 손수건을 흠뻑 적실 만큼 나왔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 이 서류가 더 중요해.”

옛날부터 아팠는데, 피가 그 정도 나왔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내게 있어 춥고 피를 토한 거는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차라리, 앞에 있는 히아트 가(家)와 카지노의 연관성이 담긴 이 종이가 더 중요했다.

히아트를 끝장내지 못하더라도, 가주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찬찬히 그녀를 훑어본 이안이 서류를 치우고 그녀의 앞에 앉았다.

페로몬석을 다 뜯어 사용했는지, 드레스의 어깨 부분이 너덜너덜한 채 어깨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고, 곱게 틀어 올린 하얀 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는 그녀 특유의 박하 향과 피 냄새가 진동했다.

더불어 모르타 가주의 진한 페로몬 냄새까지도.

“아니, 그딴 건 너의 상태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들이야.”

쿨럭!

그가 말을 끝내기 무섭게 아리엘의 입에서 피가 토해졌다. 잠시 인상을 찌푸린 아리엘이 옆에 놓인 손수건으로 급하게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 손수건을 치운 이안이 자신의 것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

“지금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라고?”

잔뜩 억눌려 있는 목소리였다.

그녀가 괜찮아진 것을 확인한 그가 새로운 손수건을 꺼내 붉게 물든 그녀의 입 주위를 닦았다.

지금 아리엘은 부서지기 직전의 유리 같은 상태였다.

그녀의 몸속엔 두 가지 페로몬이 비등비등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였는데, 그녀와 상성이 좋지 않은 모르타 가주의 기운이 들어오면서 그것을 깨트려 버린 것이다.

톱니바퀴처럼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며 돌아가고 있던 그녀의 페로몬들이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페로몬 폭주가 일어나면 살갗부터 터지는 그와 달리, 그녀가 내상만을 입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밖으로, 각혈이란 상태로 표출된 것이고.’

“너는 각혈하는 게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

장갑을 벗은 이안이 유독 붉어진 아리엘의 입술을 꾹 누르며 뇌까렸다.

심사가 잔뜩 꼬인 것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그가 비틀린 웃음을 지어 냈다.

나는 먹이를 압박하는 듯 바짝 수축한 그의 동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허리를 꼿꼿이 폈다. 아까부터 시베리아에 있는 듯이 추웠지만, 이건 무언가를 더 걸친다고 따뜻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럴 때일수록 약해 보이면 안 됐다.

나는 그저, 지금 그의 앞에서 어깨가 오들오들 떨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날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되갚아 주는 게 더 중요하니까.’

평생 바라기만 하던 것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되는데.

“…….”

“지금 네가 어떤 상태냐면,”

아무 대답도 없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온 이안이 조곤조곤하게 속삭였다. 날카로운 빙하처럼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한 목소리였다.

“너의 두 페로몬이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다가 모르타 가주의 페로몬 때문에 와장창 깨져 버린 상태야. 네 몸이 예전과 같은 상태였거나 내가 조금만 늦게 발견했다면 손 쓸 도리가 없었을 거야. 얼마 있지 않아 죽었겠지.”

이안이 자신의 다리 위에 아리엘을 앉혔다. 아리엘의 화려한 치맛자락이 그의 다리를 감쌌다.

그녀의 손에 꼭 붙들려 있던 종이가 떨어졌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내가 직접 너한테 페로몬을 전달하는 방법밖에 없어. 뭔 말하는지 알지?”

잠시 고민하는 듯, 맑은 녹안 위로 눈꺼풀이 두어 번 내려앉더니 그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아리엘의 대답을 받자마자 이안이 아리엘의 붉은 입술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진득하게 닫혀 있던 아리엘의 입술이 열렸다.

‘따뜻해.’

입술을 열자마자 밀려 들어오는 따뜻한 기운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릿발 같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곳에 혼자 있는 기분이었는데, 몸 안으로 무수히 쏟아지는 따스한 기운이 이 추위를 다 녹여 버리는 것 같았다.

‘따뜻해.’

아리엘은 본능적으로 따뜻함을 찾아 이안에게 바짝 붙었다. 이안이 천천히 그녀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아리엘, 네 페로몬도 넘겨줘야지.”

기운을 넘기는 데 집중하고 있어서 그런지, 듣기만 해도 먹먹하게 만드는 진득한 저음이 그의 목에서 울렸다. 평소보다 낮은, 살짝 낯선 목소리에 소름이 쭈뼛 솟았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걸치곤 더욱 깊게 안겨 내 몸의 기운을 끌어내려고 했다.

‘이렇게 하는 건가?’

서릿발 같은 기운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린 내가 혀로 기운을 나르듯이 그에게 넘겼다. 그러다가 실수로 그의 입술을 혀로 툭, 쳤다.

그러자 그의 새파란 눈동자가 사르르 휘어지며 아름다운 초승달을 그려 냈다. 동시에 그의 페로몬이 아리엘의 페로몬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밀려 들어오는 청량한 기운에 더욱 갈급해져서 그녀의 모든 것을 먹어 치우고 싶었다.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차갑게 날 서린 기운도, 그에겐 기껍기만 했다.

더, 더 주세요.

아리엘을 빈틈없이 끌어안은 이안이 재촉하듯이 목을 쓸어내리자 잠깐 움찔했던 그녀가 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기운을 그에게 넘겼다.

그는 그녀가 내어주는 페로몬 속에서 허덕였다.

햇빛이 작열하게 내리쬐는 사막 앞에서 차가운 물을 만난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먹을수록 갈증이 나아지긴커녕, 더욱 심해졌다.

그의 감정에 반응했는지, 그의 페로몬들이 폭발적으로 그녀에게 넘어갔다. 찬찬히 아리엘의 몸 곳곳에 페로몬을 흘려보내고 그 안을 채워 넣는 데 집중한 이안은 그녀의 페로몬이 잠잠해지자 그녀에게서 입을 뗐다.

평소보다 한참이나 많은 양의 페로몬을 사용하느라 그의 상태는 평소와 같이 돌아와 있었다.

새하얀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이안, 너 눈동자에 물기가 맺혀 있는데.”

아리엘이 당황하며 그의 눈가로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그는 자신의 눈가를 닦아 주는 그녀의 손길을 그대로 느끼며 눈매를 접었다.

“너무 좋아서.”

단순하게 긴 입맞춤이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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