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 (105/111)

104.

한편, 직원을 따라간 이안은 계속해서 뒤쪽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화려한 카지노에 음침함까지 느껴지는 공간이라니.

아까 있던 장소와 무척이나 대비되었다.

마침내, 어두컴컴한 계단 끝에 다다르자 녹슨 철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힐끗 뒤를 향해 시선을 돌렸던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관계자를 바라봤다.

철컥.

직원이 빠르게 그의 팔을 뒤로 포박했다. 팔목에 수갑을 채우기가 무섭게 직원이 팔과 다리를 밧줄로 동여맸다.

입꼬리를 올린 이안이 피식, 비웃었다.

땅바닥에서 굴러다니는 더러운 쓰레기를 바라보듯 그를 바라보는 직원을 향해 이안이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을 테니, 하던 거 마저 하세요.”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잠시 번뜩였다.

그 눈동자와 마주치자 왠지 모를 꺼림칙함이 직원의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이건 천한 노예를 처리해야 하는 불쾌감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느낀 공포와 위화감을 단순한 불쾌함으로 치부한 직원은 바닥에다가 침을 뱉었다.

“들어가!”

밧줄이 팽팽하게 잘 묶여 있는 것을 확인한 그가 이안을 창살 안으로퍽, 밀쳤다.

직원이 밀치는 대로 순순히 밀려난 이안이 그대로 돌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앉으면 될까요?”

끼이익. 쾅!!

“하하. 이거는 좀, 기분이 더러운데.”

무시하듯 큰 소리를 내며 닫힌 문에 오래전 기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그 사람들은 이곳에 없는데 말이야.

어릴 적 그를 괴롭힌 사람들은 그가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 당시 별관에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연관된 수인들이 없으니 떠오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입가를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랜만에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오르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대수롭지 않게 묶여 있는 밧줄을 모조리 푼 이안이 다리를 툭툭 털면서 일어났다.

좁은 창을 통해 미세하게 들어오는 달빛에 비치고 있는 창살이 방 안의 공간을 구분 지었다.

‘한 칸당 성인 남성 세명이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공간정도 되려나.’

각 칸 마다 수인들이 갇혀있는 것 같고.

모두 하나같이 짐승에게 긁힌 것 같은 흉터로 가득했다.

그리고 창살 맞은 편에 있는 검.

‘아.’

아리엘이 받았던 그 까만색 종이쪼가리.

그것에 검을 들고 있는 수인과 익숙한 북부설원의 마물이 그려져 있었다.

마투사 초대장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그가 비뚜름히 웃었다.

‘이곳이 검투사들이 대기하는 곳이라면 이딴 우스운 광경도 말이 되지.’

어둑한 공간을 다시 휘익 둘러보자 다른 이들의 시선이 그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진득하게 따라붙는 시선들을 무시한 그가 입을 열었다.

“앨런.”

“네.”

그의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 나온 앨런이 방 안에 있는 칼을 집었다. 칼을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에는 그가 항상 들고 다니던 노트가 펼쳐져 있었다.

콰앙!

단순한 동작 한 번으로 쇠창살을 부순 앨런이 비스듬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 소음은 이곳에서 매일 있는 일이라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요. 이런 곳은 빌어먹게도 방음이 좋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평소와 달리, 안경을 쓰고 있지 않은 눈이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도배한 앨런이 언제나 그렇듯,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이것도 풀어주지 그래.”

이안이 수갑을 차고 있는 손을 앨런 쪽으로 내밀었다.

“혼자 끊으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아리엘이 좋아하는 몸에 붉은 자국이 생기잖아.”

“어차피 곧 안 되어 없어질 텐데요.”

“내 몸에 자국을 남길 수 있는 건 아리엘밖에 없어.”

일부러 페로몬을 억눌러 딱지가 내려앉도록 한 중지를 이안이 앨런에게 내밀었다.

얼마 전, 낮잠을 방해받은 고양이 상태의 아리엘이 할퀸 부분이었다.

“영광의 상처군요.”

근데 기분이 묘하게 나쁜 이유는 왜일까요.

접혀 있는 손가락 사이로 자신에게 내민 중지를 바라보자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앨런은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가볍게 이안의 수갑을 끊어냈다. 이곳을 훑어보는 그의 표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딱딱하게 굳어갔다.

“주군, 여기는 제가 처리해도 될까요?”

빙글빙글 웃는 표정으로 돌아온 고동색 눈이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앨런을 응시했다. 허락을 기다리던 앨런이 한 마디 툭 내던졌다.

“그냥, 어릴 때가 생각나서요.”

앨런이 날카롭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짓씹었다.

“짜증 나게.”

그가 노트를 찢어서 자신의 주군에게 건넸다.

“명하신 대로, 임무는 완수했습니다.”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은 상태였던 평상시와 달리, 그가 찢은 종이 위에는 카지노 내부의 단면이 층별로 나누어져 세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곳에 있는 방들과 비밀통로, 경호원의 위치까지 전부 다.

“임무가 끝나고 이런 귀찮은 일을 자발적으로 떠맡을 줄은 몰랐지만요. 제가 일을 자원하다니, 오늘은 게으른 사자가 부지런해지는 날이 될 겁니다.”

“사자가 부지런해지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차라리 아리엘이 채소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더 현실적이겠어.”

“그건 아마, 북부의 카델리온이 멸망한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일 것 같습니다만.”

그 말에 동의하는 듯, 앞에 있는 검을 두어 번 만진 뒤 맨 오른쪽에 있는 것을 집은 이안이 피식 웃으며 방안을 나섰다.

자신의 주군이 방 안을 나가는 동시에 앨런이 노트를 덮었다.

‘찢어 버릴까.’

아무 표정 없이 노트를 바라보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가끔씩 가장 소중한 모든 것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곧 호흡을 가다듬은 그가 노트를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자, 여러분.”

앨런이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며 손뼉을 두어 번 쳤다.

“원하는 소원 딱 두 가지만 말해 보세요. 일단 들어는 보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모든 수인들의 시선이 앨런 쪽으로 몰렸다. 마냥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시선들이었다. 어떤 이들은 선명한 적대와 경멸을 담은 채 그를 바라보기도 했다.

앨런은 그 익숙한 시선들을 자연스럽게 받아 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한 가지를 안 알려 주었군요. 만약 적당한 소원이 나오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여기서 다 죽습니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맨몸으로 경기장에 있는 마물에게 맞서 살아남은 이들.

살고 싶은 의지가 분명한 이들일뿐더러 검을 다루는 실력도 분명했다.

‘카델리온에 데려가서 에인트로 훈련하면 많은 도움이 될 텐데.’

앨런은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빙그레 웃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 있던 그들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저 통로로 이어진 경기장에 있는 마물들을 죽여 주세요.”

“마물들 좀 죽여 줘!!!”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없애 주시길 바랍니다.”

“내 소원은 네가 죽는 거다! 멍청아!!”

그 순간 가만히 듣기만 하던 앨런이 고개를 들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검 하나를 더 잡았다. 그리곤 방금 그 말을 한 사람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경멸과 혐오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릴 때부터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저는 마음이 넓으니 다시 한번 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무슨 소원을 가지고 계신가요?”

양손에 검을 하나씩 든 앨런이 앞에 있는 수인을 향해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노란 눈동자에 적대감이 번들거렸다.

“네가, 죽는 거라고요.”

“이런.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미움받는 건 언제나 슬프네요. 왜 적대감을 가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콰앙!

철창을 부순 앨런이 곧바로 앞의 수인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너희의 일은 카델리온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다. 설사, 그게 소중한 사람을 너희의 손으로 죽이는 일이든지 뭐든지 간에.”

카델리온에서 가질 수 없으면 도리어 카델리온을 귀찮게 만드는 것들로 변할 테니 다 죽여 버리는 게 편했다.

“제가 목을 베어 목숨을 거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에 감사히 생각하세요.”

여유로운 목소리로 죽어 가는 수인을 향해 조곤조곤 속삭여 준 앨런이 그의 몸에 박힌 검을 뽑았다.

순식간에 그 공간이 숨 막히는 적막으로 휩싸였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소원 받습니다.”

앨런은 아무 말 없이 피 묻은 검을 끌고 검투장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 섰다.

“…저희를 꺼내 주세요.”

꽤나 오랫동안 이어지던 적막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에 앨런이 싱긋 웃었다.

“그러죠. 근데 이곳에 나와도 돌아갈 곳이 있으신 분?”

“…….”

“좋네요. 그럼 이곳에 있는 분들은 저희 쪽으로 같이 가는 것으로 하죠.”

내일은 이안 님께 아리엘 님이랑 놀러 가자고 해야지.

천장에서 다른 에인트들이 착지하는 것을 본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검투장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

한 손에 검을 쥔 이안은 형편없는 검의 상태에 혀를 차며 아리엘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향했다.

“네가 왜…….”

앨런이 그려 준 지도상에 있는 비밀 통로 앞으로 다가가자, 그를 발견한 직원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푹.

이안이 망설임 없이 옆구리에 검을 찔러 넣었다. 소리를 지르려고 악을 쓰려던 입은 이안의 손에 막힌 채였다.

“다른 사람이 듣잖아. 조용히 하고 있어.”

더러운 침이 가죽 장갑에 묻는 것을 본 이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처리해. 죽이진 말고. 쟤는 나중에 내가 죽일 거니까.”

뒤쪽에서 그에게 허리를 숙인 수인이 카지노 바깥에서 주워 온 커다란 돌을 입에 물리곤 손수건을 그에게 건넸다.

손수건으로 장갑을 꼼꼼히 닦은 이안이 옆에 있는 수인에게 그것을 건네며 사라졌다.

‘아리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비밀 통로를 걸어가고 있는 이안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안에 있던 불안감이 점점 커졌다. 손끝이 조금씩 싸하게 굳어 갔다.

‘카지노에 괜히 데려왔나.’

아리엘을 안전한 저택 안에만 놔뒀어야 하는데. 그랬어야 해.

‘저택 안에서 호화로운 이불로 감싼 채 맛있는 것만 잔뜩 주고, 그녀를 위협하는 적은…….’

자신이 제거하면 되는데.

하지만 아리엘은 절대 그를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처음 카델리온 저택에 왔을 때도 개구멍을 찾아 헤매던 것도 모자라, 지금의 그녀는 외출권까지 당당하게 따 놓은 상태였으니.

“죽여도 내가 죽일 거야.”

가족들에게 직접 복수하겠다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단단한 연두색 눈동자까지도.

‘차라리 그럴 거면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 주는 게 낫지.’

그래, 옳은 선택이었다.

아리엘은 북부의 백호에게도 달려드는 대단한 검은 고양이었지만, 고아원에서 자신의 한쪽 팔을 내줬던 것처럼 어떨 때는 대범하게 자신을 포기했으니까.

이안은 그게 싫었다.

아리엘이 무언가를 위해 너무나도 쉽게 자신을 포기하는 것.

그녀는 사지 멀쩡하게 왕왕거리며 벌떡 일어나 그의 머리에 베개를 던질 때가 가장 빛나 보였다.

자신의 것을 잃지 않고 상대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직접 보여주는 것이 카델리온의 교육법이었다.

물론, 이것보다는 더욱 과격하지만.

굳은 표정의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앞만을 바라보며 올라갔다.

앞에 있는 문을 옆으로 밀자, 환한 방 안이 보임과 동시에 두꺼운 책이 그에게 날아왔다.

날아오는 두꺼운 책을 잡은 그의 시야에 가득 찬 건…….

“…이안이었어?”

책에 이어 꽃병을 던지려고 하는 자세로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리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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