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 (103/111)

102.

그의 귓바퀴에 흩어지는 숨결을 느끼고 있던 이안이 만족한 듯 웃었다.

“그럼요. 주인님.”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곤 아리엘을 올려다봤다. 가죽장갑을 낀 곧은 손이 까만 레이스 장갑 끝 쪽으로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뱀처럼 그녀의 팔을 엄지손가락으로 쓸던 그가 그녀의 손등이 드러날 때까지 천천히 장갑을 벗겨 내었다.

그녀가 끼고 있는 검은 장갑과는 다른 새하얀 피부가 대비됐다.

아무것도 물들지 않은 도화지 같은 하얀 손등에 그가 자신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청량한 아리엘의 기운이 그의 입술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얀?”

네가 이러고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어딘가 발가락이 곱아드는 느낌에 아리엘이 그를 불렀다.

“주인님. 계속하셔야죠. 베팅.”

먹고 싶다. 계속해서 들어오는 청량한 기운에 이안이 그녀의 손등을 깨물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시원한 박하 향기가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이안은 자신의 흔적으로 붉게 물든 아리엘의 손등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새하얀 도화지에 가장 먼저 색칠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 밑에서부터 느껴지는 충만감에 붉게 물든 손등을 느릿하게 매만진 그가 아리엘의 손가락에 걸려 있던 레이스 장갑을 천천히 올려주었다.

“얼마큼 베팅하시겠습니까.”

한쪽 팔이 이안에게서 자유를 되찾자마자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여기에 올인하도록 하지.”

올인.

저 많은 칩을 한 번에 다 넣겠다는 말에 카지노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눈이 살짝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온 딜러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게임은 간단합니다. 제가 마구잡이로 흔든 이 통 안에 있을 주사위 3개의 맨 윗면 숫자를 맞추시면 됩니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딜러가 통을 흔들고 가만히 내려놨다.

“그럼 이 통의 가장 윗면에 보일 것 같은 주사위 번호를 하나씩 말해 주십시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6.”

“첫 번째 제일 왼쪽 주사위 숫자, 6.”

아리엘이 말하자 딜러가 종이에 아리엘이 말한 숫자를 기록했다.

“6.”

“두 번째 가운데 주사위 숫자, 6.”

아리엘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토독토독 두드렸다.

돈을 빨리 잃으려고 한꺼번에 배팅한 것은 맞지만 이렇게 되니 잃기가 싫어졌다.

1억 골드를 한순간에 잃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6’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스쳐 가는 숫자를 나는 그대로 말했다.

“6.”

“네. 마지막 오른쪽 주사위 숫자 6 부르셨습니다.”

마지막 숫자를 종이에 적은 딜러가 주사위 통의 뚜껑을 천천히 오픈했다. 카지노 안에 있는 모든 수인들의 시선이 그리로 모였다. 자그마치 1억 골드가 걸린 판이었으니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 왼쪽 주사위 숫자, 6.”

고저 없는 목소리의 딜러가 가운데 주사위가 들어 있는 통의 뚜껑을 또 열었다.

“두 번째 가운데 주사위 숫자, 6.”

“이러다가 진짜 다 맞히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이 확률이 얼마인데! 여기다가 올인하는 건 자살행위와도 같은 거 잘 알지 않소.”

“이걸 다 맞히면… 그것도 능력인데.”

가운데 숫자까지 발표되자 카지노 안이 술렁였다. 카드를 들고 게임을 하던 수인들은 어느덧 카드를 내려놓고 아리엘이 있는 테이블을 흥미진진하게 쳐다봤다.

달칵.

마지막 주사위가 든 통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술렁거림을 비집고 나오자 카지노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동시에 벽 쪽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경비원들도 바쁘게 왔다 갔다 거렸다.

주사위가 들어 있는 뚜껑을 힐끗 본 딜러가 통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지막 주사위 숫자, 6.”

“와악!! 진짜 됐네, 됐어.”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분명 올인은 자살행위라고 하지 않았나!!”

“거참, 나도 저걸 해 볼 걸 그랬나.”

차분한 딜러의 목소리와 함께 곳곳에서 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 베팅으로 획득하신 칩은 이 종이를 들고 환전소로 가시면 추가로 받아오실 수 있습니다.”

“그렇군요.”

무심하게 앞에 놓인 종이를 손에 챙긴 아리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테이블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굳어 있던 수많은 수인이 그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오늘의 잭팟, 축하하네!!!”

“거기, 아가씨, 도대체 숫자는 어떻게 맞춘겨?”

“혹시 그 칩, 나에게 줄 생각 없소??”

“거기 딜러, 나도 한 번 맞춰 보지!!”

잭팟이 터진 아리엘의 기운을 받기 위해 원래 플레이하던 테이블을 버리고 그녀가 앉아 있었던 테이블로 이동한 수인들도 꽤 있었다. 순식간에 그녀가 있던 테이블이 북적북적해졌다.

“2억 골드 상당의 칩입니다.”

인파를 가로질러 환전해 온 나는 다른 수인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척, 다른 테이블을 향해 가로질러 갔다.

‘이 정도로는 안 오나.’

3억 골드 상당의 칩을 소유하면 올 만한 것 같은데.

‘…무엇보다 이안도 있고.’

뒤에 있는 이안이 붉은 눈을 접어 싱긋 웃었다. 평소의 모습이 금욕적인 느낌이 들었다면, 지금은 부드러운 원단의 검은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그고 있음에도 꽤나…… 색정적인 느낌이었다.

실제로 이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의 붉은 눈과 마주치자마자 몸을 파드득 떨고 바삐 움직이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름다운 노예를 탐하는 카지노라면 들어오자마자 주인에게서 강탈해 그를 데려가려고 할 것 같은데.

그를 힐끗 쳐다본 아리엘이 걸음을 멈추곤 앞에 있는 테이블을 향해 새로 환전한 칩이 들어 있는 가방을 올려놨다.

그녀가 가방을 열자 한참 카드 게임을 하고 있던 이가 미묘한 웃음을 머금으며 반겼다.

“참 통이 큰 아가씨구만.”

아리엘은 말도 없이 칩 하나를 그쪽으로 내밀었다. 게임을 끊어서 미안하다는 의미와 함께 앞으로의 게임에서 잘 봐달라는 의미였다.

“옆에 있는 수인은 아가씨의 것인가?”

“…….”

그녀가 내민 코인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온 수인이 주섬주섬 옷 속에서 무언갈 찾더니 씨익 웃었다.

“이렇게 된 거 좋은 정보 알려 주지. 자. 여기가 보통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오직, 노예가 있는 이들만 갈 수 있는 곳이지.”

“그렇군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릴 뻔한 아리엘이 매끄럽게 붉은 입매를 끌어 올렸다.

“아가씨는 노예를 데려왔으니 갈 수 있을 거야. 아가씨가 데려온 노예는 최상급 중 최상급인 것 같은데, 잘 간수하는 게 좋을걸.”

그녀의 손에 검은 종이를 쥐여 준 남자가 시가를 베어 물었다. 검은 종이를 엄지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던 아리엘이 싱긋 웃었다.

“귀한 조언 감사드립니다. 허나, 제 것은 제가 잘 챙기지요. 조언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칩 하나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라고.”

낄낄대며 웃은 수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떠났다.

자리에 앉은 아리엘이 황금색 글자로 마투사, 라고 쓰인 꺼먼 종이를 바라보았다. 글자 옆에는 사람이 칼을 들고 괴수를 찌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갈 거야 주인님?”

당연히 가야지.

이걸 잡기 위해서 저 호랑이가 이러고 있는 건데.

그럼 안 갈 거냐는 듯, 그를 빤히 올려다보자 즐거움이 서려 있는 그의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설마 쟤 이걸 즐기고 있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그걸 노리고…….

‘나사 빠진 백호라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떼는 순간, 저 앞에서 정장을 입은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새까만 눈동자가 인상 깊은 수인이었다.

“잭팟을 터뜨린 분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

힐끗, 이안을 한 번 쳐다본 그녀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작게 말했다.

“고객님이 더 즐겁게 즐길 수 있는 곳을 아는데, 안내해 드릴까요?”

“그래. 안내하도록 해.”

분명 이번에 딴 돈과 더불어 갖고 온 돈까지 홀랑 벗겨 먹으려는 속셈이겠지.

‘아, 뒷골 당겨.’

내가 고개를 추켜들며 뻣뻣이 굳은 입매를 오만하게 끌어 올렸다. 파티장에서 이후로, 까만 눈동자를 처음 봐서 그런지 레이스 장갑 안에 있는 손이 차가워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모아 쥐고 앞으로 나아가는 여자를 따라갔다.

여자를 따라 위층으로 한 층 올라간 뒤 쭉 안으로 들어가자, 누가 봐도 돈을 꽤 바른 것으로 보이는 문이 있었다.

문을 열자 보이는 풍경은 꽤나 가관이었다.

“자, 무슨 카드를 고를까 말하렴.”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후, 하고 시가 연기를 내뿜는 여자나,

“카드를 오픈하시겠습니까?”

“오픈.”

와인을 넘치도록 따른 채 얼굴이 귀 끝까지 붉어진 남자.

“얼마큼 베팅할까. 이 정도?”

“흐응……. 그 정도가 좋을 것 같네요.”

자신의 무릎 위에 다른 이를 올려놓고 게임을 진행하는 수인까지.

모두의 옆에 칩이 두둑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아 꽤나 큰 금액의 베팅을 하는 것 같았다.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이게 맞는 걸까.

아, 집 가고 싶다.

‘그냥 들어가서 다 쓸어버리면…….’

막상 중요한 문서들은 못 갖고 가겠지. 촛불이나 벽난로에 태워 버릴 테니까.

아. 인생이 왜 이러지.

잠시 현타가 진하게 온 아리엘이 가만히 서 있자 문손잡이를 붙잡고 있는 경호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객님?”

그때 허리를 숙인 이안이 뒤쪽에서 그녀에게 속삭였다.

“주인, 있다가는 이것보다 더한 광경을 봐야 할 텐데. 지금부터 굳으면 어떡해.”

그래, 지금은 저기로 들어가야 한다. 가기 싫더라도.

뭐든 피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내가 벌인 일이니 끝까지 수습해야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방 안을 향해 내딛자, 뒤의 문이 닫히고 직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테이블 맨 왼쪽에 새로운 자리가 만들어졌다. 만들어진 자리에는 3인용 같은 1인용 소파가 있었고 바로 옆에는 푹신해 보이는 방석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

설마 이안보고 저기에 앉으라는 건 아니겠지?

싸한 기운이 목 끝까지 타고 올라왔다.

“저쪽에 가서 앉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노예는 이쪽에 놓으시면 되고요.”

직원이 방석을 가리키자 이안이 깊은 눈웃음을 머금으며 방석으로 다가갔다.

‘안 돼.’

안 된다. 저렇게 둬서는 절대 안 된다.

쟤네 저러다가는 곱게 죽지 못할 텐데. 편히 목숨만 끊어지는 거면 모를까, 내 눈앞에서 누군가 조각조각 분리되는 것은 아직 힘들었다.

이안이 그곳에 앉기 전에, 내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다른 의자는 없는 건가?”

“노예는 원래 그 방…….”

“그 얘기 말고. 나는 다른 의자가 더 없냐고 물었는데.”

잠시 아득해진 눈동자로 옆에 놓인 의자를 바라본 내가 잠시 고민했다.

‘도대체 쟤네는 어떻게 죽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왜 저 수인들은 곱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도 힘든 길을 가는 걸까.

“내…것을 귀히 대해 줬으면 좋겠는데.”

“여기 있습니다.”

더욱더 서늘해진 아리엘의 목소리에 시종이 괜찮은 의자로 재빨리 바꿨다.

의자를 확인한 내가 힐끗 이안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는 포만감에 찬 맹수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쟤 왜 저래.’

왜 또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어. 앨런에게 야근을 명령하고 자기는 퇴근할 때의 표정이었다.

도대체 어떤 스위치가 눌린 거지.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은 내가 급하게 입을 뗐다.

“딜러.”

“네. 고객님, 게임 룰을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눈치 빠른 딜러가 차르륵 카드를 펼쳤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 카드 숫자의 합이 21이면 이기고 21을 넘기면 지는, 아주 간단한 게임입니다. 이때 J, Q, K는 10으로, A는 1이나 11 편한 대로 계산하시면 됩니다.”

딜러가 펼쳐놓은 카드에서 동일한 두 숫자의 카드를 꺼냈다.

“만약 동일한 카드가 두 장 나왔을 경우 검지와 중지를 바닥에 대고 가위 모양으로 피면서 스피릿이라고 하시면 카드를 쪼개서 각각 플레이하실 수 있습니다.”

설명을 마친 딜러가 카드를 하나로 모았다.

“마지막으로 플레이어분들은 게임을 플레이하시는 동안 카드를 더 받으실 수 있습니다.”

차르륵, 카드들이 딜러의 손에서 내려갔다.

“카드를 두 장 더 받고 싶으실 경우, 테이블을 두 번 두들기며 히트를 외쳐주시고, 한 장만 받고 싶으실 때는 더블다운을, 마지막으로 더 받고 싶지 않으시면 손바닥을 테이블 바닥으로 한 상태에서 흔들어 주시면 됩니다.”

모여진 카드를 셔플한 딜러가 플레이어들에게 카드를 나누어 주었다.

“그럼, 게임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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