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에드윌 로워드 12 거리를 거닐고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한 군데로 모였다.
“어머, 여기 건물이 사라지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오나 봐요.”
“도대체 무슨 건물이 들어올까요?”
“새로운 카페나 레스토랑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누구든 자기 동네에 새로운 무언가가 들어서면 궁금해지는 법.
항상 똑같은 풍경의 거리만 거닐던 귀족들에게 새 건물이 들어선다는 것은 흥미로운 얘깃거리였다.
“도대체 뭘 하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이……?”
“혹시 영식은 뭘 짓는지 아나.”
“아직 들은 정보가 없는데.”
점점 뼈대를 갖춰가는 건물에 날이 갈수록 영애 영식 가리지 않고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몰렸다.
“그럼 이 건물에 뭐가 먼저 들어서는지 내기할까, 자네?”
“이곳에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 들어올 것이라는 것에 난 5골드를 걸지.”
“나는 카페가 들어올 것이라는 것에 5골드.”
정사각형 유리판을 끝도 없이 나르고 있는 인부들을 보고 내기하는 영식들과는 다르게, 영애들은 그 앞의 카페에 앉아 어떤 것이 들어오면 무엇을 할지 추측했다.
“아무래도 새로운 신전을 짓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저렇게 정사각형 유리판이 많이 필요할…….”
“저는 부티크가 들어올 것 같아요.”
“부티크가 들어오면 한 번 같이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그때 한 영애가 박수를 짝, 치며 주위를 환기했다.
“아, 그래서 여러분 리카 세드리한 님의 얘기 들으셨나요…?”
“리카 세드리한 님이 첫 번째 보석의 주인이셨다는 것은 당연히 들었지요!”
그 말에 옆에 있던 소녀가 부채를 촥, 펼쳤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부채의 끝자락이 그것도 모르냐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그거 말고, 결혼식이요. 리카 세드리한 님이 곧 결혼하시잖아요.”
“아, 맞아요. 알음알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다일 로커 님이 결혼식 반지를 펠릭스에서 주문하셨다고…….”
“어머어머.”
“직접 디자인을 그려서 주문했다던가.”
영애들이 발그레하게 분홍빛이 도는 볼을 푹, 숙였다.
“저도……. 그런 사랑이 하고 싶어요…….”
“저도요……. 펠릭스 보석이 정말 예쁘던데……. 물빛 모양이 하트 모양으로 물결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프러포즈를 그런 보석으로 받다니 다일 로커 님은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봐요.”
“그것도 리카 세드리한 님께 받으셨잖아요!”
‘……펠릭스라.’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영애들의 얘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청년이 마시고 있던 차를 탁,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손에 들린 구인 공고를 향해 내려갔다.
‘마침, 독수리 가문에서 뛰쳐나왔으니 먹고 살길도 찾아야 하고.’
달콤쌉싸름한 맛의 차가 입 안을 휘감았다. 구인 공고문을 손에 꼭 쥔 그가 카페 밖으로 나왔다.
***
햇빛이 잘 들어오는 선반 위에 못 보던 식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파리지옥을 선물해준다는 것을 정중히 거절한 나에게 리카 세드리한이 안겨준 선물이다.
꽃을 보는 사람에겐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귀한 꽃이라면서.
흙이 촉촉하다는 것을 확인한 레아가 행운목에서 시선을 뗐다.
“정말, 꽃이 피면 행운이 찾아올까요?”
“글쎄.”
행운목을 곰곰이 바라보던 내가 입을 열었다.
“7년 동안 세심하게 행운목을 돌볼 정도의 사람이면 행운목이 아니어도 행운이 찾아올 것 같아.”
나는 식물을 잘 못 키우지만.
초등학교 때 숙제로 키우던 고구마와 강낭콩이 며칠 되지 않아 시들어버린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생생하다.
고구마랑 강낭콩은 웬만해서는 잘 안 죽는다던데.
“아리엘 님은 저에겐 행운 그 자체이신걸요.”
그러자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마리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저에게도 행운 그 자체랍니다.”
“어머, 선배님께서 그런 로맨틱…한 말을… 웃음과 함께…….”
맨날 살인미소만 짓는 건 아니셨군요, 조용히 중얼거린 아리엘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아 참, 아리엘 님, 그거 아세요?”
“응?”
“이글 가(家)의 아들이 집을 나왔대요!”
“이글 가(家)가… 대머리로 유명한 가문인가?”
언뜻 가나슈에서 이글 가(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항상 하늘을 날아다녀서 대머리가 된 게 아니냐는 말이 있을 정도던데.
‘그쪽에서는 탈모를 치료하는 연구를 가장 열정적으로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를 슈엘라가 한 것 같기도 하고.’
“아리엘, 대머리인 사람은…… 걸러.”
“……?”
“아니, 그 사람이 자기 동생한테 자기 일을 다 떠넘기잖아. 보아하니, 이글 가문에서 그 영식만 머리숱이 풍성하던데. 그러다가 고운 머릿결 다 빠질라.”
“어…? 그건 대머리에 상관없이 그냥 그 형이 쓰레기인 거 아닐까.”
“근데 그 많은 일을 또 빨리 끝내 놓는 둘째 영식은 정말… 내가 더 알차게 부려 먹을 수 있는데.”
둘째가 일을 엄청 빨리한다는 소리도 했던 것 같네. 수인에 대한 칭찬을 잘 하지 않는 슈엘라가 꽤나 오랫동안 칭찬했던 기억이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레아가 내 입에 키위를 집어 넣어줬다.
“네. 심지어 가출한 수인이 대머리로 유명한 독수리 가문에서 유일하게 머리숱이 풍성한 그 둘째 아들인 거죠.”
“……뭐?”
그 말에 키위를 씹고 있던 내 턱이 멈추었다.
“아리엘 님 입 안에 있는 키위 다섯 번만 더 씹으세요.”
그러자 걱정스러운 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꿀꺽.”
나도 모르게 키위를 다섯 번 씹은 뒤 목 뒤로 넘기자 마리가 잘했다는 듯이 살짝 눈꼬리를 휘었다. 키위가 내 목구멍으로 넘어간 것을 확인한 레아가 싱글벙글 웃으면서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근데, 소문에 의하면 펠릭스 상단에 취직하기 위해 지원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있던데요. 요즘 펠릭스 상단이 출신, 배경 보지 않고 사람을 뽑는다고 해서 엄청 화제 되었잖아요.”
“……뭐??”
내가 펠릭스 상단주인데.
일 잘하는 이글 가(家)의 둘째 아들이 펠릭스 상단에 취직하려고 한다고?
눈이 까다로운 슈엘라가 칭찬할 정도면 그를 데려가려고 하는 귀족 가문들이 엄청 많을 게 분명했다.
근데 그런 델 가지 않고 펠릭스 상단에 지원하려고 하다니…….
아리엘이 미심쩍은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레아…?”
“글쎄, 카페에서 독수리 가문의 둘째 아들이 펠릭스 상단의 구인 공고를 손에 쥐고 있었대요!”
먼데이 신문을 들고 있던 내가 눈을 도르륵 굴려 내가 들고 있던 신문을 쳐다봤다. 마침, 신문에는 펠릭스 상단의 채용 방식에 대한 기사를 다루고 있는 면이 앞에 와 있었다.
『<특보! 파격적인 펠릭스 상단의 두 번째 행보….>』
‘아니, 이게 이렇게 화제가 될 만한 주제였어?’
『지난 월요일, 펠릭스 상단 대표, 클로에 플로리아는 인재들을 모집한다고 대대적으로 밝혔다. 딱히 신분 제한이 없는 지원서는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지원서에서도 지원자의 사진, 출신 등을 제외하는 대신에 직무 경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하도록 되어 있으며…….』
어느덧 신문에 몰입한 내가 빠르게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어?’
얘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먼데이 신문>을 바라봤다.
『<에드윌 로워드 12, 도대체 무슨 건물이…?>』
“아리엘 님, 안경을 하나 주문해 놓을까요?”
신문에 코를 박을 듯이 가까이하고 신문을 보자 마리가 살짝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제야 나는 보고 있던 신문을 멀리 떨어뜨리고 이어 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에드윌 로워드 12의 코너 건물 하나가 통째로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에드윌 로워드 31보다 에드윌 로워드 12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질 정도…(중략)… 전문가인 티스아 말에 따르면, 건물 벽에 균열이 일어나고 바닥이 살짝 함몰되는 현상으로 보아 주저앉을 위험이 커 철거했을…….』
그 내용을 본 내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저거 우리 상단이 인수한 건물이잖아.’
저게 왜 벌써 기사가 나는데?
생각한 것보다 관심을 받는 시기가 너무 일렀다.
‘…건물이 철거된 게 기사까지 날 일인가.’
“아무래도 이런 기사까지 날 정도로 펠릭스 상단이 장안의 화제이긴 하죠. 새로운 광물이 발견된 것은 수인사를 통틀어서 페로몬을 담을 수 있는 돌 이후, 처음이니까요.”
대수롭지 않게 말한 레아가 정확히 내가 읽고 있던 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건물은 굳이 철거 안 했어도 제가 부술 수 있었을 텐데……. 아마 아리엘 님이 너무 귀엽다고 느낄 때마다 때리면 무너지지 않을까요?”
아니, 괜찮아.
굳이 대신해서 부숴줄 필요 없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과 함께 내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레아. 네가 그런 이유로 부순 목각 인형만 스무 개가 넘는데. 그것도 아리엘을 처음 만난 달에만 부순 목각 인형이.”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
“오늘은 술 안 마셨네? 아리엘?”
“한 번밖에 마신 적이 없…….”
“아리엘 님께서 술을 드셨나요?”
남부로 내려가지 않고 남아 있었던 마리가 설마, 하는 눈빛으로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이안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주사가 우,”
“이안! 이거 먹어.”
나는 이안의 입속으로 키위를 넣어 주며 그의 말을 막았다.
“아. 내가 먹었던 포크였다.”
그 옆의 포크로 줬었어야 했는데.
망연자실한 내 중얼거림을 들은 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포크로 키위를 하나 더 입속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나를 집요하게 쳐다보며 붉은 혀로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키위 맛있네. 아리엘.”
어딘가 이상해지는 기분과 함께 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나는 세상에서 제일 순수한 수인이다.
급히 시선을 바깥 창문으로 돌린 내가 시냇물이 흐르는 상상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때, 뒤에 있던 마리의 남색 눈이 살짝 커짐과 동시에 레아가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리 님, 두 분이 너무 잘 어울리셔요…….”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
북부의 마물들을 쓸어버리고 난 후의 목소리와 상당히 흡사한 목소리였다.
“둘이 결혼하신다면…….”
“아리엘 님께서 훨씬 아깝습니다.”
그녀의 상태가 상당히 걱정된 마리가 레아를 툭툭 치곤 이안을 향해 말했다.
“아리엘 님을 만난 첫 달, 레아가 부수셨던 목각 인형은 정확히, 스물두 개입니다.”
“어머, 그건 저 혼자만 부순 게 아니라, 마리 님께서 부수신 거랍니다. 정확히 반반씩 부쉈지요.”
어느덧 정신이 돌아온 레아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마리, 너도 부순 거였어…?’
마리는 안 그랬을 것 같았는데.
살짝 커진 아리엘의 눈을 본 마리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레아. 그런 얘기는 하지 마십시오.”
“둘 다 사이좋게 목각 인형을 부숴놨으니, 각자 시말서 스물두 장씩 쓰게 하면 되겠네.”
그러자 어디선가 튀어나온 앨런이 안경을 벗어서 안경알을 닦았다.
“그러는 이안 님께서는 집무실 창문을…….”
“앨런, 마침 내 손에 포크가 있는데.”
“반성하겠습니다. 이안 님.”
그러자 옆에서 레아의 손안에 있던 다른 포크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솔직히 아리엘 님께서 귀여우신 건… 인정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머리에 꽃을 꽂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수풀에 숨어서 봤을 때는 하…….”
마리가 레아의 손에 들려 있던 포크를 뺏어서 다시 곧게 폈다.
“아리엘 님께선 심장에 해로우시긴 하지만, 그날 레아가 있던 땅바닥이 구덩이가 파여 있던 건 알고 계신가요?”
“그래서 설산에 마….”
마리와 앨런을 힐끗 쳐다본 레아가 빙그레 웃었다.
“법을 부리러 갔죠.”
“둘 다 나가. 앨런 너도.”
“예? 이안 님, 전 지금 왔습니다만…….”
집무실에서 뛰어온 전속 부하를 이렇게 내치시다뇨. 저도 아리엘 님이 보고 싶습니다, 앨런이 울상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집무실 책상에 결제해 놓은 서류 올려놨어.”
“하하, 지금 가야겠군요, 근데 지금 일은 급하지 않은,”
까지 말한 앨런이 이안의 표정을 보곤 들고 있던 손바닥만 한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노트를 훑어본 앨런이 말했다.
“일정이 적혀 있는 거 보니 급한 건이군요. 휴가 내려고 했었는데 말이죠. 한 1년 정도.”
“앨런, 내도 상관없는데.”
“제가 카델리온에서 떨어질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평생 붙어 있을 겁니다. 평생.”
그 말까지 마친 앨런이 이안에게 경례를 하며 마지막으로 방 안에서 나갔다.
“평생 충성할 테니 월급을 올려 주신다면 그 은혜를 항상 생각하며 두 배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렇게 이안과 아리엘만 남은 방 안.
펄럭펄럭 종이가 몇 번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아원 회계 장부를 보던 아리엘의 입에서 한 마디가 튀어나왔다.
“미친…… 정신 나간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