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 (99/111)

98.

잠시 미묘한 표정이 된 클로에가 이마를 팍 찌푸리더니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제일 마주하기 싫은 부류의 수인이었어요. 절대,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어머, 클로에. 손날로 새를 그렇게 때려대는 개도 무서워할 만한 수인이라는 거야?”

어느새 사람으로 변해 옷까지 차려입은 슈엘라가 머리끈을 입으로 물곤 푸른 물빛 머리를 손으로 쓸어올렸다. 깔끔하게 머리를 위로 묶어 올린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두어 번 만졌다.

“세간에서는 얼굴에서 빛이 나고 정중한데 친절하기까지 하다는 평이 지배적이던데. 뭐라 했지, 한 번이라도 말을 섞으면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나.”

“슈엘라, 그런 형편없는 정보만 모아서 어떻게 정보를 다루는 역할을 하겠어요?”

“억울하면 네가 좀만 <가나슈>에 일찍 가지 그랬어. 머리카락 한 올까지 탈탈 털어서 자기들 정보 가져다주고 돈까지 많이 주니까, 길드장으로 삼겠다고 하던데.”

슈엘라, 너는 가나슈 애들 집안 배경이랑 저택에 있는 수저가 몇 개인지까지 다 알아왔잖아.

얼마 전, 새발이로부터 슈엘라의 쪽지를 받은 내가 얼마나 경악했는지 모르겠다.

원작에서도 슈엘라가 비슷한 방식으로 제대로 된 길드장과 돈이 필요했던 <가나슈>의 정보길드의 윗자리에 앉긴 했지만.

‘걔네 집안 수저까지 알아 왔다는 원작의 말이 비유가 아닐 줄은…….’

“클로에, 그래서 이안 카델리온은 어땠는데?”

“그냥…….”

클로에의 눈동자가 생각에 잠겼다.

“위험한 수인이에요. 감이라고 해야 하나. 만만히 볼 수인은 더더욱 아니고요. 제가 진짜 상단주가 아니라는 걸 알고도 일부러 가만히 있던 정도면…….”

그녀의 눈동자가 단단해졌다.

“비안 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다시는 만나기 싫어요.”

그때 클로에에게 안겨 있던 미셸이 부스스 눈을 떴다.

“으음… 어? 저 대저택은 뭐예요…?”

오. 도착했다.

‘조금만 더 가야 했으면 때려치우고 하산할 뻔했어.’

아리엘이 고개를 올려 앞에 있는 저택을 봤다.

앞에 있는 저택은 저택보다는 성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었다. 당장이라도 창문을 열고 공주가 노래를 부를 것 같았다.

“네 친구가 될 사람이 사는 집.”

“혹시 저 공주님을 친구로 사귀는 건가요? 후원자님?”

미셸이 들뜬 목소리와 함께 저택을 두드렸다. 그러자 대문 사이로 막대 지팡이가 툭 튀어나왔다.

“예끼! 이놈들아! 나는 원래 호신술 알려주는 수인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후원자님, 제 친구가…….”

문 사이로 튀어나온 걸걸하고 쉰 목소리에 미셸이 황망히 중얼거렸다.

***

옛날의 나무아 바나아는 꿈이 있었다.

‘나 같은 제자들을 기르겠어.’

자신의 능력만으로 팔십여 년의 삶을 살아온 그는 터 좋아 보이는 산에다가 땅을 사고 전 재산을 쏟아부어 집을 지었다. 1층에만 7개가 넘는 방, 그 위로 굳건하고도 섬세하게 지어진 3층 저택.

‘1층에 제자들을 머무르게 하면 되겠군.’

온갖 풍파에도 건축할 때만큼은 섬세했던 그의 인생을 담은 저택이었다.

그러나, 굳은 마음을 먹고 저택 문을 개방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에잉 다들 할 게 없나.’

저택을 다 짓고 나서 일주일에 세 번씩 산적이나 강도가 저택에 잠깐씩 쳐들어오는 것 말고는 너무나 심심한 일상이었다.

“똑똑.”

“누구슈?”

“가르침을 청하러 왔습니다. 단순한 지팡이 하나로 이 일대를 평정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적 없다!”

그렇게 시작된 가르침은 건축과 점점 멀어져갔다.

산에서 나물을 캐고 장작을 패는 하루가 반복됐다. 그는 그 넓은 저택을 관리하며 하루를 혼자 쓸쓸하게 보냈다. 가끔 오는 호랑이 수인들도 텅 비어버린 그의 마음을 달래주기엔 부족했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꼬.’

초기의 반짝이는 꿈을 잃어버린 그는 이제 열려 있던 저택의 문을 굳게 닫으려고 했다.

“건축 배우러 왔는데요!”

갑자기 들린 그 한 마디만 아니었다면.

“……들어오게!”

그 말에 아리엘을 제외한 나머지 수인들의 눈빛이 오고 갔다.

‘이렇게 간단한 거였나요? 혹시 모르니, 나뭇가지라도 꺾어…….’

‘초반에 저택 문 사이로 튀어나온 지팡이는 뭐고?’

‘진짜 제 친구 사귀러 가는 거 맞나요…?’

“크흠, 안 들어오나?”

어딘가 멋쩍은 목소리와 함께 저택의 문이 활짝 열렸다.

“네! 들어갈게요! 나무아 바나아 님!”

아리엘의 힘찬 목소리와 함께 눈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수인들이 걸어 들어갔다.

***

“헉, 나무아 바나아 님이시라고요? 후원자님? 그, 그 건축계의 거장? 건축계의 역사를 뒤집어 놓았다는!”

나무아 바나아를 앞에서 본 미셸이 화들짝 놀라 눈이 커졌다. 나무아 바나아가 더 해보라는 듯이 입꼬리를 삐죽 올린채 새하얗게 내린 수염을 쓸어내렸다.

“이름만 남기고 항상 홀연히 떠나신다는 신비주의 건축계의 거장. 나무아 바나아. 양 수인으로 15세에 귀족가문에서 당당히 뛰쳐나와 혼자의 힘으로 스스로 건축계의 정상에 우뚝 서 있으신.”

“허허, 칭찬은 앉아서 이어가는 게 어떻겠수?”

“네! 카델리온 저택에 있는 전설적인 보석함부터, 새로 만들어진 카델리온의 서재, 세드리한의 아몬드홀, 이다스의 새 저택까지. 제 우상이 되시는 분을 이렇게 만날 수 있다니!”

의자에 몸을 맡기고 속사포로 이야기를 마친 미셸이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나무아 바나아를 바라봤다. 두 손에는 나무아 바나아가 쥐여준 고구마를 꼭 쥔 채였다.

“그래서, 저 꼬마 친구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이걸 보면.”

아리엘이 미셸이 그린 도안을 주섬주섬 꺼냈다. 그것을 받아 본 나무아 바나아의 눈이 일순 커졌다 다시 돌아왔다.

“이 정도면 괜찮네. 그래서 뭘, 어떻게 하면 되겠수?”

말과는 다르게 나무아 바나아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미셸을 어떻게 굴릴지에 대한 계획이 착착 정립되어 가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아리엘이 가방 안에서 종이비행기를 하나둘씩 꺼냈다.

“자. 이게 뭐로 보여? 미셸?”

어느새 종이비행기를 다 피고 그것들을 이어붙인 아리엘이 물었다. 아리엘이 가리킨 부분에는 맹금류의 발톱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나무아 바나아가 또 눈을 빛냈다.

“의자로군. 나쁘지 않네.”

“맙소사! 이런 디자인의 의자는 처음 봤어요! 이렇게 폭신하고 편할 수 있는 의자라니…….”

그리고 미셸의 감탄사 뒤에 클로에와 슈엘라의 수군거림이 뒤따랐다.

“용맹한 용의 발톱인 줄 알았는데…….”

“클로에, 나는 용맹한 용의 발톱이 아니라 썩은 고구마인 줄 알았어.”

“슈엘라, 비안 님이 썩은 고구마를 그리실 리가 없잖아요……!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봐요. 아리엘 님은 항상 깊은 뜻을 가지고 계신다고요. 평범한 돌산이 그냥 광산으로 뿅, 변…….”

그래. 앞에 있는 건축가들만 알아보면 됐지.

그 수군거림을 필사적으로 무시한 아리엘이 미셸과 나무아 바나아에게 자신의 요구 사항을 말했다.

“이런 느낌의 가구들이 담길만한 알맞은 인테리어가 필요해요. 한쪽은 꽤나 연식이 있고, 상태가 안 좋은 건물이라 부수고 다시 짓고, 지금 보여드리는 건물 자체를 다시 짓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아하, 그니까 지금 보고 있는 거는 부수지 않을 건물이고, 그리고 쉼과 일이 명확한 곳을 만들고 싶은 느낌인 것 같은데?”

“역시, 정확하십니다. 나무아 바나아 님.”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무아 바나아를 향해 아부하자, 뒤에 있던 슈엘라와 클로에가 수군거렸다.

“클로에, 저기는 지옥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연금술사의 사무실 같은데…….”

“조용히 하세요. 슈엘라 님. 비안 웨스트 님이 말씀하고 계시잖아요.”

종이를 들고 뚫어져라 쳐다보더던 미셸이 아리엘을 향해 질문했다.

“후원자 님, 이렇게 하신 까닭은…….”

“잠깐의 시간이라도 깊은 휴식을 취하는 게 좋잖아?”

자더라도 푹 자자는 게 나의 지론이었다. 내가 종이에 그려진 가구들을 가리키자 미셸의 반짝거리는 눈이 뒤따라왔다.

“아, 그러니까 나무아 바나아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최대한 편안한 가구들을 생각해서 가져오셨다는 거죠?”

“맞아. 그거야.”

“그럼, 이런 해먹이나 작게 줄인 침대를 놓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이건 서서 일할 수 있는 책상인가요?”

“맞아.”

온종일 앉아 있다 보면 허리와 목이 피로해지기 마련이었다.

‘스탠딩 책상이 짱이지.’

졸음도 몰아내고, 다리의 피로감도 풀어 줄 수 있고.

“그리고 이건…….”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 아, 개인 공간도 몇 개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고립되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조그마한 방 느낌으로. 그리고 당연히 그냥 책상과 의자도 필요할 것 같고.”

“아! 자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으신 거죠? 말랑말랑해지는 그런 느낌이요!”

“정확해!”

반짝거리는 미셸의 눈을 아리엘이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둘을 나무아 바나아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놈도 재능이 있구만. 그림 실력이 조금 독특하긴 하지만, 고동색 머리의 생각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없는 생각이야.’

어쩜 이리 복덩이들만 굴러왔을꼬.

‘저게 꼬마로부터 나올 수 있는 집중력인가.’

나무아 바나아가 가만히 앉아 고민하는 미셸을 가만히 바라봤다. 흰 수염 밑에는 저 아이를 얼른 데려와 키우고 싶다는 열망이 뚝뚝 떨어지는 듯했다.

“혹시 새로운 종이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그토록 선망하던 나무아 바나아는 안중에도 없이 연필을 들고 곰곰이 고민하던 미셸이 벌떡 일어났다. 재미있는 장난을 앞둔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종이를 받은 미셸은 바닥에 빠르게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니까……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조그마한 손으로 재빨리 그림을 그려 낸 미셸이 힐끔 아리엘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싫어하시면 어떡하지?’

미셸이 마음속으로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게 이 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양식의 디자인이었다.

그 그림을 쳐다보고 있던 아리엘이 곰곰이 고민했다.

‘우리 미셸은 천재가 넘어선 게 아닐까.’

어린아이가 순식간에 이렇게까지 그릴 수 있다니. 게다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보통 건물과 달리, 특이하게 거의 모든 벽이 유리 같은 벽으로 되어 있었다. 천장은 빛이 들어올 수 있는 유리로 디자인되어 있었고, 계단은 중앙을 기점으로 해서 둥그런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다.

“미셸 완벽해. 사무실은 이런 느낌으로 가자. 직원들이 부담을 갖지 않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곳으로. 그리고 거기에는 ‘공간’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거 알지?”

그 말에 미셸의 두 눈이 흔들렸다.

‘제일 중요한 부분에 나를 맡겨 주셨어.’

어딘가 가슴이 벅차올라 왔다.

앞에 있는 후원자님이 자신을 데려가기 전, 고아원의 원장은 항상 미셸을 다른 아이들과 비교했다. 그리고 말만 원장이 아니지, 그들을 항상 교육하는 원장의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미셸! 언제 그런 거만 그리려고 하니!”

“다른 아이들과 같이 최대한 사실과 비슷한 그림체로 사람이나 그리라고 했지! 그런 쓸데없는 거 말고!”

그리고 미셸은 자신이 그리고 만드는 것들이 쓸데없는 것이라고 치부될 때마다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도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의 그림에는 자부심이 가득했지만, 때때로는 그녀는 자기 자신을 의심했다.

이걸 하는 게 맞는 걸까? 이게 정말 쓸모없는 짓인 걸까?

‘그래, 나는 쓸데없는 걸 하는 게 아니야.’

밑에 있는 그림을 한 번 다시 본 미셸은 환히 웃었다.

“네!”

그러자 아리엘이 사악한 웃음을 지으며 한마디 꺼냈다.

“그러면 미셸, 이제 우리 매장을 어떻게 설계할지 짜야지. 너의 부족한 점은 앞에 있는 세기의 천재로 꼽히시는 건축가님이 도와주실 거란다.”

이 건물이 세워진 이후로, 절대 미셸의 이름이 사람들의 뇌에서 까먹지 않도록 만들 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