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술에 취한 아리엘을 침대에다 눕혀 놓은 이안이 옆에 앉았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아까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안 님, 실례지만 혹시 레스토랑에 같이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곧 부인 될 사람을 놔두고 그 늦은 시간에 그렇게 말하는 다일이 정말 미친 악어인 줄 알았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힘들 것 같은데. 리카 세드리한 영애와 함께 다음에 같이 가시죠. 세드리한 기사단장.”
“아,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세드리한 영애가 그 레스토랑에 있어서요. 보아하니 검은 머리 영애도 같이 나가신 것 같아서.”
“그곳이 어딘가요? 같이 가시죠.”
그리고 그렇게 가게 된 레스토랑의 넓은 방 안은 가관이었다.
“리리. 일어나요.”
“다일……?”
“네. 접니다. 리리.”
쪽.
“어? 다일 입술에 내 입술 닿았다.”
“리리, 이래서 술 마시면 절 곁에 두고 마시,”
“이번엔 쫌 더 길게 닿았다. 더더 길게 닿고 싶은데. 다일 왜 피해? 나 싫어…?”
“하……. 리리 일단 나가요. 리리가 원하는 거 다 해줄 테니까.”
가만히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조용히(?) 다일과 함께 나간 세드리한 영애와,
“아, 수건을 착각했나.”
마담 헤일라에게 받은 꼬까옷을 입고 그를 수건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리엘이 있었다.
‘누가 보면 어떡하려고.’
아리엘이 입고 있는 옷을 확인한 그는 바로 외투를 벗어 아리엘의 어깨 위에 걸쳤다.
쌕쌕 잘 자는 아리엘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아리엘이 이 옷을 입고 돌아다닐 때 몇 명의 수인들이 그녀를 보았을까 생각했다.
‘이건 이 옷을 입고 돌아다닌 아리엘이 아니라 그 모습을 본 수인들의 잘못이지.’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저의 외투를 걸치고 요정같이 옷을 입고 울던 아리엘이 머릿속을 침범했다.
그 모습을 자신만 보았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뻐근하게 만드는 만족감을 주었다.
‘리카 세드리한이랑 다일 로커가 먼저 가서 다행이지.’
그가 피식 웃으며 아리엘 밑에 있는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그러자 아리엘이 꼼지락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붙잡곤 잠에 취한 목소리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안…….”
“응?”
“나 미워하지 마…….”
죽이지도 말고.
잠시 입을 오물거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좀 좋아해 줘……. 내가 잘할게…….”
그 말을 마친 아리엘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고요한 그녀의 숨소리만이 방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
“으아아악!!!!”
희망찬 비명과 함께 맞이하는 아침이었다.
아침부터 이불 박차고 일어난 나는 베개를 힘껏 내리쳤다.
“왜! 호랑이 머리를! 수건으로 착각해서!”
하…… 정말. 술이 웬수지. 웬수야.
어제의 추했던 모습들이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 호랭이다.”
“부들부들한 거 좋아……. 너 좋아…….”
“너, 내가 너보다 몇 개월 더 나이 많은데 왜 누나라고 안 하냐……! 누냐라고 안 하냐고오……! 내가 네 눈치 보고 사느라……. 히끅.”
“아악!”
누나는 무슨! 그때 나는 왜 울었던 건데!!
퍽. 퍼퍽.
이불을 뒤집어쓰고 엎어진 내가 안고 있던 베개를 격하게 때렸다.
“누나, 술 그만 마셔요. 이제 자러 가야지.”
하…… 하필 그 백호는 왜 또 누나라고 불러서.
이안이 눈웃음치며 말을 건네던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다시 생각해 보면 너무……
좋았다.
그래, 우리 솔직해지자.
누구 하나 홀리려고 작정한 것처럼, 경국지색이 눈웃음 살살치면서 저렇게 말하는데, 도대체 그걸 누가 싫어할까.
“하아…….”
도대체 나는 어제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카델리온 호랑이들이 문제인 거야.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과 베개를 날려 보냈다.
“아리엘, 여기 카델리온 가(家) 아닌데.”
아. 맞다. 그렇네.
화려하게 이불을 날려 보낸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 바닥에 떨어진 이불과 베개를 주웠다.
이불을 침대 위에 예쁘게 올려놓은 나는 바닥에서 다시 주워온 베개를 꼭 끌어안고는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아리엘, 훌륭한 공연이었어. 저번에 와인 잔으로 저글링 한 것 다음으로 멋진 공연이었달까.”
이안이 아리엘을 향해 컵을 내밀었다. 그 컵 안에는 감귤색 차가 찰랑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주정뱅이 고양이를 위한 차야. 어제는 크라바트라도 있었으면 크라바트 머리에 두르고 마실 기세던데. 쭉 마셔.”
아리엘이 찻잔을 입에 갖다 대기만 한 것을 본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면, 주치의가 말한 소포라를 넣고 우린 차 줄까?”
그 말에 아리엘이 고민도 하지 않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오. 박하 향 나.”
약간 달달하면서도 톡 쏘는 박하 향이 맴도는 게 은근 기분이 좋았다. 차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은 잔을 본 이안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 아리엘은 소포라를 넣고 우린 차를 더 좋아하는데.”
그 말에 아리엘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써서 먹자마자 토할 정도로 맛없는 갈색 차를 또 먹이겠다고?
먹자마자 뱉어서 다시 먹어야 했던 그 끔찍했던 차의 맛은 잊을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의 예능프로그램에서나 복볼복으로 나올 만한 차 맛이었는데.
그래, 그 차는 전생에 장난삼아 마셨던 고삼차 맛이랑 똑같았다.
아리엘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안, 다시 싸우고 싶어?”
“뭐로 싸우게.”
“주먹다짐……?”
그러자 이안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잠시 머물렀다가 그녀의 얼굴로 옮겨 갔다. 결연의 찬 그녀의 표정을 본 그가 돌연 피식하고 웃었다. 정말 저 손으로 자길 칠 수 있을 것 같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정말 때려 버린다.”
“때려.”
퍽.
“……아야.”
“…….”
“아침부터 술 마신 고양이 보살피고 있는 호랑이나 때리고.”
“호랑,”
옆에 있는 식탁에 접시를 내려놓은 이안이 까져 있는 새우를 포크로 집어 아리엘의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아리엘, 호랑이 때리려면 많이 먹어야지.”
잠시 입을 오물거리던 아리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거 왜 이렇게 맛있,”
입을 벌리자마자 오징어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씹자마자 느껴지는 탱글함에 내 눈이 다시 커졌다.
‘아니, 이거 왜 매콤한 게 맛있냐고!’
여기 와서 매콤한 음식을 거의 처음 먹어 보는 것 같은데.
오징어까지 열심히 씹어 삼킨 아리엘은 이안에게서 포크와 수저를 받기 위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비뚜름히 웃었다.
“아리엘, 적이랑 같이 공생하는 거 아니래.”
“그게 무슨 소리야.”
“포크는 아리엘 인생의 최대 적수잖아.”
“그때는 인간이었다가 갑자기 새끼 고,”
양이로 변해서 그랬던 거고.
입 앞에서 가만히 있는 수저에 내 말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수저에 있는 국물을 받아먹자 칼칼한 맛의 수프가 입안을 감쌌다.
‘대박. 칼칼한데 시원해.’
“잘 먹네. 아리엘.”
‘나 정말 이렇게 살다가 독립하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아닐까.’
“자, 마지막으로 물.”
…왠지 모르게 길들여지는 느낌인데.
그렇게 말하는 족족 이안이 떠먹여 주는 것을 다 받아먹은 나는 가방 안에서 종이비행기 모양으로 접어놓은 종이를 꺼냈다.
“이안.”
“왜?”
반듯하게 접힌 종이비행기를 빳빳이 펴낸 나는 이안에게 종이에 있는 그림을 가리켰다.
“이게 뭐로 보여?”
“의자랑 책상. 의자는 세드리한 저택의 괴랄한 정원과 어울리는 엔틱한 분위기고 테이블은 옆에 있는 파리지옥을 구경하기 쉽게끔 만들어진 심플한 디자인이네.”
아리엘에게서 접시를 빼앗아 저 멀리 있는 책상으로 옮겨 놓은 이안이 비스듬히 웃었다.
“아리엘, 이거 어제부터 11번째 물어보고 있는 거 알아? 혹시 누가 새의 발톱이라도 닮았다고 한 거야?”
“……다시는 술주정을 부리지 않겠습니다. 이안 님.”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들고 있던 종이를 고이 접어 책상 위에 올려놨다.
***
“삐삐삑.”
“비안 웨스트 님, 어디 가시나요?”
“저기에 살고 있는 양 수인 보러.”
저기에 은둔 고수 한 명 살고 계시거든.
“아, 또 돈… 아니 훌륭하신 인재가 있나 보군요!”
미셸을 공주님처럼 안고 있는 클로에가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오르막을 올라가는 것을 본 내가 질린 표정이 되었다.
‘여주인공 정도 되려면 저 정도는 해야 하는 건가.’
클로에의 괴물 같은 체력에 잠깐 감탄한 나는 묵묵히 앞에 있는 오르막을 올라갔다.
‘원래 장인은 이렇게 험난한 곳에 사는 게 맞아?’
말이 뒷산이지, 높이는 널리 알려진 산들 못지않게 높았다. 이른 아침부터 올라가고 있었는데 아직도 도착하지 못한 게 믿기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루이즈의 지옥훈련을 경험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클로에.”
“네?”
“안 힘들어……?”
“옛날에 암ㅅ, 아니 청소하는 곳에서 열심히 구른 덕분에 하나도 안 힘들어요!”
새로 변해서 편하게 날아가는 슈엘라를 부럽게 쳐다본 내가 되물었다.
“암……?”
“뺙.”
뭔가를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슈엘라가 아리엘에게 새 부리를 갖다 대었다. 그러자 클로에가 익숙하게 손날을 들어 올려 파랑새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뺙. 뺙.”
능란한 솜씨로 그것을 피한 파랑새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비안 님, 이번에는 누구를 주우러 가는 중이신가요?”
“미셸 친구 찾으러 가는 중이야.”
나는 기억 속의 원작을 더듬었다.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한 분들이. 어쩐 일로 오셨슈?”
“저택을 하나 설계해줬으면 해서.”
“이제는 그런 거 안 합니더! 제자 기르는 거면 모를까.”
나무아 바나아는 발길을 돌렸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의 태도였다.
“아니면 카델리온 저택을 뜯어고칠까 하고.”
그 얘기에 나무아 바나아의 발이 멈추었다.
우리 집 강아지가 뱀이랑 도망가려고 해서, 잠시 중얼거린 이안이 싱긋 웃었다.
어느새 나무아 바나아의 목에는 예리한 칼날이 드리워져 있었다.』
‘카델리온 하인들이 양다리 어쩌고저쩌고하며 뒷산에 살고 있는 양 수인에 대해 말할 때는 별생각 없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수인이었다.
하여튼 그 이후로 원작의 이안 카델리온은 클로에가 도망치지 못하게끔 저택 구조를 아예 바꿔놓는다.
『클로에는 카델리온 저택에 새로 만들어진 비밀 통로 중 하나에 들어가 바삐 발을 놀렸다.
‘조금만 더 가면…… 더 가면…….’
그녀는 이유 없이 목을 조여오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끝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저택이었다.
정교하고도 치밀한, 건축적으로는 가히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새장 같은 저택.
“클로에. 재밌었어?”
아. 아아.
앞에서 들리는 익숙한 음성에 그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클로에는 이안을 한 번 만났는데, 아무 일도 없었네.
잠시 클로에를 바라보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클로에, 카델리온 가주님은 어떠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