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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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아리엘을 본 헤일라가 그대로 굳었다.

“……실례지만 혹시 성함이 아리엘, 이신가요? 영애?”

어? 이걸 이렇게 알아본다고?

당황스러웠던 나는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리카 세드리한을 바라봤다. 떨떠름한 목소리가 리카 세드리한에게서 흘러나왔다.

“맞아.”

“안녕하세요, 마담. 아리엘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오…….”

그러자 마담이 갑자기 손수건을 들고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100번 넘게 그려왔던 인간이었을 때의 모습보다 훨씬 아름다우세요.”

“근데 마담이 아리엘을 어떻게 알아?”

리카 세드리한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마담 헤일라를 바라봤다.

“아, 예전에 아리엘 님의 옷을 만들어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그때도 귀엽고 예쁘시고 혼자서 다 해 드셨었는데… 후…….”

“아. 우리 아리엘이 좀 예쁘긴 하지.”

“혹시 아리엘 님이 카델리온 저택에서 세드리한 저택으로 이사가시셨나요?”

“곧 그럴 예정이라서.”

그녀의 말에 리카 세르디한이 시원하게 눈꼬리를 접었다. 그녀가 그렇게 휘영청 눈을 휘며 웃은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 모습을 본 나는 또 그대로 굳었다.

‘와……. 바로 앞에 태양이 있나?’

그때였다.

마담 헤일라의 눈이 별이라도 쏟아지듯이 반짝거리는 것은.

“정말, 리카 님도 엄청난 눈을 갖추셨군요!”

아까의 눈은 동지를 보는 눈빛이었던 걸까.

“어떻게 아리엘 님 같은 수인을 안 사랑하고 생활할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미래 남편도 잘 뒀지. 정말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예쁘고 잘생겼잖아? 얼굴만 보면 화가 스르륵 풀린다고. 물론, 아리엘은 남편과 다르게 예쁘지만.”

그러자 리카 세르디한이 적극적으로 맞장구쳤다. 중간중간 자기 남편 자랑도 넣는 것이 확실히 보통은 아니었다.

“정말 제가 몇 번이나 영상구를 만지작거렸는지 모르겠어요…. 아쉽게도 영상구의 영상은 딱 한 번만 재생되니…….”

“어머, 나도 보고 싶은데.”

“정말, 아리엘 님을 만날 날을 생각하면서 옷을 만드는 게 삶의 낙이었다니까요. 물론, 세드리한 님을 위한 옷도 만들었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혼이 빠진 채로 이리저리 이끌리다 정신 차려 보니 어떤 방 안에 들어와 앉아 있는 상태였다.

‘VVIP를 위한 방인가…?’

꽤나 넓고 깔끔한 방이었다.

‘바로 옆에 널찍하게 옷 갈아입는 곳도 있고.’

짝!

그때 헤일라가 박수를 치자, 행거가 줄줄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만, 이 광경 어딘가 너무 익숙한데.’

평기일 파티 전, 카델리온 가(家)에서 지겹도록 옷을 갈아입었을 때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이러다가 이 방을 다 채우겠어.’

계속해서 들어오는 행거에 내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었다.

…인형 놀이를 당하기 직전, 인형의 기분이 이런 기분일까.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스쳐 지나갔다.

그 많은 행거를 다 들여놓은 헤일라가 엄숙하게 말했다.

“모두 아리엘 님이 입어 주셨으면 해서 만든 옷이니, 돈은 필요 없답니다. 그냥 입어 주시고 가져가기만 해 주세요. 자주 입어 주시면 더더욱 좋고요.”

“그거 좋은 마음가짐이네. 마담. 그러면 자, 아리엘, 뭐부터 입어 볼래?”

리카 세르디한이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옷을 보고 있었다. 자신을 위한 옷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였다.

“으음, 이게 좋으려나.”

“근데 마담, 여기 있는 모든 옷을 입었다가는 며칠을 여기서 날을 새야 할 것 같은데…요…….”

다시는 세르디한 저택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럼 스무 개만 입어 보자.”

“네??”

“그럼, 이거부터 입어 볼까?”

“네……?”

리카 세드리한이 흰색 드레스를 가리키자, 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분주하게 드레스를 집어 들어 나를 정중하게 끌고 들어갔다. 정신 차려 보니, 나는 어느새 드레스 안에다가 다리를 넣는 중이었다.

“잠시만요. 끈으로 뒷부분을 한 번 조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 정리가 끝나자, 다른 직원이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처음 만나는 친구들에게나 지을 법한 예의 어색한 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 스무 개도 적은 것 같은데요. 아리엘 님의 자태를 제 눈에 오랫동안 담아 놔야지 내일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흐음……. 허리선이 살짝 높게 되어 있어서 서서히 그 밑단으로 퍼지는 형태네.”

“근데 뭔가 2% 부족한 것 같지 않나요?”

“그럼 다른 것도 한번 봐 보자.”

그 후, 이리저리 직원들의 손에 이끌려 인형처럼 벗겨지고 입혀지고를 반복한 나는 이제 영혼 빠진 동태의 눈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도대체 이게 몇 벌째더라.

‘분명 스무 벌만 입어본다고 하지 않았나.’

정확히 스물두 벌째부터 세는 걸 포기해서 잘 모르겠다.

“근데 이건 약간 아리엘의 미모가 안 사는 것 같은데.”

“어머, 그런 것 같군요.”

“오늘 최대한 예쁜 옷차림으로 돌아다니기로 했단 말이야. 흐음…….”

“그럼 마지막으로 이건 어떨까요? 예전에 뮤즈께서 인간이 되신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렸던 디자인의 드레스랍니다.”

‘……마지막??’

끝을 알리는 말에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던 내가 생기를 되찾았다.

그래. 이것만 입으면 된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옷 갈아입는 데 최선을 다해 협조했다.

‘정말 먼, 먼 여정이었어. 후.’

드디어 마지막 드레스를 입고 나갔다. 말린 동태와 친구 하기 직전 같았던 눈은 어느덧 생기가 되살아나 있었다.

리카 세드리한과 마담 헤일라는 옅은 연둣빛이 감도는 드레스를 입고 있는 아리엘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

“정말… 요정이시군요. 역시, 제가 숨을 쉬는 이유…….”

가슴부터 전신까지 자연스럽게 흐르는 라인의 드레스는 여리여리하고 소녀다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오프 숄더 드레스에다가 자그마한 비즈를 박아 놓은 시스루의 느낌이 나는 볼레로와 같이하니…….”

“신비로우면서도 러블리하게 느껴지는데. 고급스럽기도 하고.”

“맞아요. 우아하면서도 귀엽고 러블리하네요.”

“숲이 생각나게 하는 레이스 페턴이 하늘하늘한 느낌을 줘서 아리엘의 청초함이 잘 돋보이기도 하고.”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이야기였다.

‘…우와. 드레스 진짜 예쁘다.’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요구 사항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실제로 있구나.

“아리엘, 이거 입고 술 마시러 나가자.”

어느새 새로운 드레스를 갈아입고 나온 리카 세드리한이 손을 붙잡았다.

***

남부의 몇 안 되는 3층 건물에 있는 레스토랑은 매우 널찍하고 고급스러웠다. 게다가 맛도 있는지, 그 넓은 곳이 수인들로 거의 다 차 있었다.

‘사람이 많으면 거의 다 맛집이던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자, 저 멀리서 지점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늘 이용하시는 방으로 안내해 드리면 될까요?”

“아니. 오늘은 다른 방 괜찮을까?”

“아, 오늘은 다일 로커 님과 함께가 아니신가요?”

“어. 오늘은 옆의 영애랑 데이트하려고. 술이나 마시게.”

“아하하, 그러시군요. 그럼 제일 넓은 방 중 하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리카 세드리한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던 지점장이 앞에 있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창밖으로 노을이 지고 있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리카 세드리한은 자리에 앉으며 메뉴판도 보지 않고 익숙하게 주문했다.

“메뉴판에 첫 번째로 나와 있는 코스 두 개에다가, 와인은…….”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여기서 파는 거 종류별로 하나씩 다 줘.”

그 순간 리카 세드리한을 바라보는 아리엘의 눈빛이 존경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아리엘을 보며 씩 웃었다.

“원래 맛있는 건 많이, 종류별로 먹는 거야. 하는 김에 누가 더 많이 마시는지 나랑 내기할래?”

“너무 좋죠.”

아리엘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전생에 꽤나 마셨었는데.’

입가엔 사악한 미소가 걸린 채였다.

‘제일 끝에 있는 방으로 드리길 잘했군……. 그나저나, 리카 세드리한 님이 취하시면, 다일 님께 연락을 드려야 하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점장은 몇 시간 후 미래를 위한 대비책을 생각하며 조용히 방안을 나갔다.

식사가 끝난 방 안에서는 벌써 와인 몇 병이 바닥에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다.

“우와아…… 파도 소리.”

“네? 리카 님, 파도 소리가 들려요? 이상하다아……. 유리로 막혀 있는데.”

아리엘이 파도 소리를 듣기 위해 두리번거리자 웅얼거리던 리카 세드리한이 씩 웃었다.

“안 들려. 그런 의미로,”

“짠.”

‘우와…. 눈매 끝이 뾰족하게 올라간 언니가 휘영청 웃으니까 진짜 예쁘다……. 게다가, 붉은 눈이랑 어울려 고혹한 느낌을 더 살리는 드레스도 그렇고.’

이거 완전 심장을 저격하는데.

아리엘은 눈앞의 리카 세드리한을 바라보며 새로운 와인병을 따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새 와인병을 가져간 그녀가 와인 잔에 와인을 콸콸 따르고 있었다.

“리카 영애… 이거……. 이렇게 히끅. 많이 따르는 거 아니지 않아요…?”

“너… 진짜 주량 세구나? 웬만한 수인이랑 하면 나도 안 지는 데에……. 너 포함해서 이번 해에만 두 명을 못 이겼어….”

“우와…. 행복하다!! 기분이 좋아요! 기분이 날아가요!”

아리엘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폴짝 뛰고는 빈 와인병을 바닥에다가 내려놓았다. 바닥에 벌써 7병이 넘는 와인병이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병들이 굴러다니는 것을 풀린 눈으로 보던 리카 세드리한이 배시시 눈꼬리를 접었다.

“맞아……. 아닌데, 어차피 와인은 목구멍 뒤로 넘어가면 다 똑같아.”

“그으쵸. 제가 와인을 좀 잘 마시죠…. 왜 이안은 술을 안 주는지…….”

“이상하다…. 아리엘, 세상이 왜 위로 올라가지…?”

“마시고 죽어요. 부어~!”

둘이 대화가 이어지는 게 신기할 정도로 어딘가 이상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방 안의 문이 열렸다.

“아리엘, 마시고 죽으면 어떡해.”

“어? 호랑이다.”

아리엘이 하얀 머리 수인을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진짜인가.”

그러더니 자기 눈을 비볐다.

“아닌가? 환상인가?”

아……. 수건을 착각했나, 라고 중얼거리던 아리엘이 앞에 있는 하얀 빛을 향해 손을 뻗자 이안이 고개를 숙여 머리를 갖다 댔다.

“부들부들한 거 좋아…. 너 좋아….”

아리엘이 이안의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쓰다듬고는 꼭 껴안았다.

“아리엘, 술 얼마큼 마셨어?”

“별로 안 마셨어! 하늘이 붉을 때 들어왔는걸.”

창밖으로 캄캄한 밤하늘을 확인한 이안이 비뚜름히 웃었다.

“저 병은 다 뭐야? 아리엘?”

“…….”

“주정뱅이 고양이.”

이안이 자신의 재킷을 아리엘의 어깨 위에 덮어 줬다. 한 손에는 와인 잔을, 한 손에는 그의 재킷을 꼭 쥔 아리엘이 문득 억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호랭아. 생각해 보니 억울해. 내가 너보다 나이 많잖아.”

“근데?”

아리엘의 옆에 앉은 이안이 턱을 괴고 아리엘을 바라봤다. 그러자 무언가 결심한 듯 와인 한 잔을 쭉 들이켠 아리엘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너, 내가 너보다 몇 개월 더 나이 많은데 왜 누나라고 안 하냐…! 누나라고 안 하냐고오…! 내가 네 눈치 보고 사느라…. 히끅…….”

닭똥 같은 눈물이 아리엘의 뺨을 타고 내려가자 눈물을 닦아주던 이안이 피식 웃었다.

“아리엘, 누나라고 불러 줘?”

“응!! 한번 해 봐. 나도 백호한테 누나, 라는 소리 좀 듣자.”

이거 완전 두고두고 우려먹을 수 있는 이야기 아니야. 흐흐.

어느새 눈물을 그친 아리엘이 씩 웃었다.

그러자 이안이 와인 잔을 뺏으며 눈을 곱게 휘었다.

“누나, 술 그만 마셔요. 이제 자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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