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도대체 앞에 있는 수인은 이안과 내가 무얼 했다고 생각하는 걸까.
못 볼 꼴을 봤다는 표정을 보니 문득 억울해졌다.
정말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연두색 눈동자에 저 수인은 뭘 생각하는 거지, 라는 것이 빤히 보이는 듯했다.
어느새 그를 노려보던 눈초리를 지우고 그녀 옆에 단정한 얼굴로 앉은 이안 카델리온이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를 시전하고 있었다.
졸지에 자신만 이상한 수인이 된 것 같은 루카스가 복잡한 기분을 웃음으로 감추었다.
“하하, 그러시군요. 저는 세르디한의 후계자, 루카스 세르디한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아리엘입니다.”
아리엘이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인사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어딘가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동생에게 무려 10억 골드나 뜯긴 오빠의 얼굴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물론 세르디한 가문의 재정에는 손톱만큼도 영향을 끼치지 않을 테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돈이었다. 게다가 이미 펠릭스 상단으로 흘러간 돈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 10억 골드 제가 알차게 잘 쓰고 있어요.’
나는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며 손을 내밀었다.
아리엘의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하려던 루카스가 멈칫했다.
그녀가 제 것이라 주장하듯이 이안 카델리온의 페로몬이 진득이 묻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질척한 그의 소유욕을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듯한 모습에 루카스가 질린 표정을 하곤 이안을 쳐다보았다.
‘페로몬을 쓰는 것도 싫어하는 애가 이딴 짓을 벌이냐.’
그를 향한 질타는 덤이었다.
이안은 눈꼬리를 어여쁘게 휘며 꺼지라는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그는 모른 척 앞에서 손 내밀고 있는 아리엘을 바라봤다.
“아, 제가 땀이 조금 나서, 손잡기는 곤란할 것 같군요.”
하지만 불쌍하게도 앞에 있는 수인은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새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안쓰러운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평생 남자 사귈 일은 없겠네.’
완벽하게 딴 사람인 것처럼 외형을 바꿀 수 있는 카멜레온 수인의 페로몬을 가지지 않는 이상 애초에 누군갈 사귀기란 어려울 것이다.
아마 그녀가 다른 수인이랑 사귀는 순간 그 수인은 안타까운 사고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터이니.
정확히 말하면 이안 카델리온이 다 처리한 거겠지만.
‘쟤는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야.’
그리곤 뻔뻔하게 장례식에 같이 가서 영애를 위로하고 있겠지.
‘페로몬 제거 향수라도 하나 챙겨 줘야 하나.’
루카스와 아리엘이 서로를 향해 안타까운 눈빛을 주고받는 동안 이안이 달칵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할 말만 빨리하고 얼른 꺼지라는 이야기였다.
그제야 루카스가 아리엘에게서 시선을 옮겨 그를 쳐다보았다. 힐끗, 아리엘을 쳐다본 루카스가 느릿하게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세르디한과 카델리온 가문 사이의 일이니 말하기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빨리 끝내.”
이안의 낮은 경고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해사하게 웃었다.
“혹시 정원을 구경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별거 없는 삭막한 북부의 정원보다는 남부의 정원이 훨씬 더 볼 게 많을 겁니다.”
“북부에 별로 와 보지도 않은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은데. 루카스.”
“특히, 춥기만 한 카델리온 저택과는 달리, 세르디한 저택은 다른 저택과 다른 것으로 유명하지요.”
루카스는 앞에 있는 이안 카델리온의 말을 무시했다. 문을 열자마자 보였던 눈꼴사납던 일을 벌인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만약 방에 가고 싶다면 앞에 대기하고 있는 집사가 알려 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들이 따로 나누는 이야기를 굳이 듣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안이 퍽 아쉬운 낯을 했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은 아리엘이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그래, 세상에는 들어도 되는 것이 있고 듣지 말아야 할 정보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녀는 겨우 얻은 목숨줄을 스스로 싹둑 잘라 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삐삐삑-”
‘아름다운 새소리와 앞에 있는 푸른 잔디들.’
그리고 햇볕을 바로 쬐며 앉아 있는 나까지.
‘얼굴이 실시간으로 까매지는 느낌이군.’
“삐삑삐삐삐삑.”
“왜, 내 그림에 불만 있어?”
삑삑대는 소리를 필사적으로 무시하던 내가 고개를 돌려 어깨 위에 앉아 있는 새를 바라봤다.
그러자 파랑새가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내 그림을 향해 발짓했다.
날갯짓도 아니고 발짓이라니.
묘하게 자존심에 금이 갔다.
“내 그림이 새 발짓을 받을 정도로 하찮지는 않은데.”
“삐삑!”
“누가 봐도 완벽한 티 테이블과 의자잖아.”
그러자 새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하늘 위를 가리키며 자신의 발을 쭉 뻗었다.
“네 언니 새 발이랑 똑같다고?”
“삐삑!”
“아, 네 오빠 새 발?”
내 위에 있는 새의 오빠를 떠올린 내가 입을 열었다.
“슈엘라가 네 오빠 발에 뭐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인간으로 치면 무좀 같은 거랬는데.”
그러자 어깨에 앉아 있는 새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자기 친구랑 똑같았다. 이래서 친구 같은 건 키우는 거 아니랬는데.
“야, 새발아.”
슈엘라와 지내는 새들 중 유독 발이 제일 예뻐 이름이 새발이다. 물론, 내가 지어 준 것이 아니라 슈엘라가 지은 것이었다.
“삑!!!”
그거 내 이름 아니라고, 라는 반응을 온몸으로 뿜어내기에 내가 한마디 했다.
“그럼 파멸의 주둥아리 할래?”
“…….”
“줄여서 파주, 어때?”
“…….”
급격하게 얌전해진 새의 반응에 내가 씩 웃었다.
“아니면 세끼 다 챙겨 먹으라는 줄임말로 세끼.”
“뺙…….”
쟤 왜 불쌍한 척하냐.
분명 방금까지 내 머리를 한껏 헝클어트릴 기세로 날개를 들어 올리던데. 울적해진 새의 표정에 내가 인심 쓰듯이 한 마디 더 붙였다.
“대신 네 오빠는 이세끼, 언니는 일세끼로 해 줄게. 그러면 오빠한테 이세끼라고 부를 수 있어. 어때?”
“삐삑!”
그러자 옆에 있던 새가 격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남매간에 원수지간인 건 어딜 가든 똑같은 걸까.
“대신, 넌 특별하니까 삼시세끼말고, 세끼로 해 줄게.”
“……뺙.”
그러자 심각하게 자기 날개로 한쪽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하던 새가 고개를 내저었다.
“봐, 새발이 낫지? 새발아?”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고.
“삐삐삑!!!”
“근데 내가 네 생명의 은인인 건 알아?”
“삑?”
언제 내 어깨에서 위로 올라간 건지, 정수리에서 새 소리가 들려왔다.
“너 나 아니었으면, 미친, 아니 성격 이상한 백호한테 죽었을걸.”
쟤가 내 손등을 물어서 내가 이안에게 잡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면 저렇게 못 뺙뺙 거릴 텐데.
‘…한 번 백호한테 보내 버릴까?’
“근데 새발아, 그 백호가 이 머리 공들여서 해 준 건데. 거기서 나오는 게 좋지 않을까.”
이리저리 엉키킨 머리를 호랑이가 하나하나 빗질한 다음, 양 갈래로 나누어 동그랗게 말아 묶어 준 거였다.
“뺙.”
“어허, 뺙뺙대지 말고.”
“뺙.”
이건 어쩌라고 인 건가.
내 머리 위 똥 머리 사이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을 새를 생각하니 백호한테 한 번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 아리엘 혹시 새의 부리를 그린 거예요?”
그때 리카 세드리한이 얼굴을 확 내밀었다.
그녀가 말을 걸기가 무섭게 내 머리 위에서 느껴지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아하하…….”
새의 부리가 아니라 테이블인데요.
“어머. 방금 아리엘 머리 위에 서 있던 새의 부리랑 똑같이 생겼다. 조금만 늦게 날아갔어도 세드리한 정원에서 기르려고 했는데.”
“하하…….”
걔는 자기 오빠 발 닮았다고 하던데요.
‘왜 다들 못 알아보는 거지? 정말 잘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방망이인가? 하녀들이 빨래할 때 내리치는…….”
어느새 내 앞에 쪼그려 앉은 리카 세드리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면, 한 그림 안에 다양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 거야? 아리엘?”
진지하지 마.
진지하지 말라고.
저 그림의 정체를 맞추기 위해 골똘히 고민하는 모습에 가슴이 쓰라린 이유는 무엇일까.
“티 테이블과 의자…인데요…….”
“아…….”
내 소중한 그림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다음 생엔 그림 잘 그리는 나에게 그려지렴.
결국 그림 그리기를 포기한 나는 그림을 곱게 접어 가방 안에 넣었다.
“괜찮아 아리엘, 세상에는 그림 말고도 재밌는 게 많잖아.”
왜, 그 말에 더 비참해지는 걸까. 하하.
리카 세드리한이 내 어깨 근처에서 손을 방황하다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엘,”
“……?”
“우리 놀러 갈까? 아까 그림 때문에 미안한 것도 있으니 내가 살게.”
아니, 언니.
이러면 너무,
‘좋죠.’
아주 좋습니다.
오늘부터 언니 삼을게요.
진작에 그림에 대한 건 기억 저편으로 날려 버린 내가 그녀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작게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원래 가끔 여자들끼리의 데이트도 필요한 법이지.”
“맞아요!”
“그럴 때 있잖아? 잔뜩 힘줘서 꾸미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놀고 싶을 때.”
리카 세드리한이 아리엘에게 일어나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리엘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 그녀가 아리엘과 맞잡은 손을 쳐다봤다.
“지금 딱 내가 그런 기분이거든.”
리카 세드리한이 손을 잡고 자연스레 어딘가로 이끌었다.
“사실, 북부보다는 남부가 훨씬 더 살기 좋단다. 호랑이한테서 탈출하고 싶으면 우리 집에 얹혀살아도 돼.”
근데 그 집에서 얹혀살면 제 명에 못 살 것 같은데요…….
‘특이한 동식물들을 많이 키운다더니, 진짜 사실이었어.’
입을 떡하니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파리지옥들을 힐끗 눈짓으로 인사하며 그것들이 있는 곳에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어이쿠.’
파리지옥이 자신의 입안으로 돌진한 파리를 맛있게 소화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참, 아름다운 식물들이 많네요…….”
“뭐 갖고 싶은 거라도 있어? 원한다면 친교를 맺자는 의미로 하나 줄게.”
아니요…….
애매한 미소를 지은 내가 침을 꼴깍 삼켰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리카 세드리한은 내가 방금까지 보고 있던 파리지옥을 가리켰다.
“아리엘 이거 유심히 보던데 이거 갖고 싶어? 이게 의외로 인기가 많네.”
“……인기요?”
이게? 이 파리지옥이?
도대체 어떤 영애가 파리지옥을 자신의 정원에서 키우겠다며 가져가는 걸까.
‘도대체 그런 걸 가져가는 미래가 범상치 않은 영애가 누구인 거지.’
나는 가늘어진 눈초리로 저 식물을 살폈다. 옆에서 리카 세드리한의 흐뭇한 목소리가 들렸다.
“참, 다들 보는 눈은 있어서. 펠릭스 대표도 저번에 와서 이 식물 가져가더라. 파리 잡을 때 유용할 것 같다면서.”
“하하하…….”
클로에였구나.
클로에, 사무실에서 파리지옥 키우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강아지와 고양이가 싸우면 어떤 꼴이 나는지 보여주지.
어느덧 저택의 마구간에서 리카 세드리한이 백마 한 마리를 능숙하게 쓰다듬으며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같이 말을 타고 밖으로 놀러 나가실까요? 레이디.”
***
“우와…….”
중앙도시의 새로운 모습에 아리엘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꽤나 높은 건물이 주로 위치했던 중앙도시와는 달리, 남부는 주로 낮은 층으로 이루어진 건물들만 있었다. 해가 지면 정말 예쁠 것 같은 풍경이었다.
파티 갈 때보다도 훨씬 힘을 줘서 꾸민듯한 몇몇 사람들도 있었고, 편한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있었다.
‘확실히 중앙도시랑은 달라서 그런가, 매력 있어.’
앞이 탁 트여있어서 그런지, 길가를 돌아다니는데도 전혀 답답함이 들지 않았다.
“아리엘, 노는 것에 있어 서는 이 세 가지는 꼭 필수적인 절차라고 할 수 있어.”
“……?”
“먹는 것, 수다 떠는 것, 그리고,”
벌써 어느 상점 앞에 다다른 리카가 문손잡이를 잡고 밀었다. 종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딸랑, 울렸다.
“어서 오세요. 세드리한 영애.”
리카가 익숙하게 매장 안쪽으로 이끌며 말했다.
“ 돈 지랄이지. 아리엘.”
그리고 우리를 반기는 수인을 본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었다.
‘마담 헤일라……?’
네가 왜 거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