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 (95/111)

94.

“어머, 뭔가 까먹은 것이 있는 것 같네. 아리엘, 나는 먼저 가볼게.”

‘…가지 말아주세요.’

너 가면 저 호랑이랑 나만 남잖아. 저, 위험한 기운이란 기운은 다 내뿜고 있는 백호랑.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가 독이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옆에 이안이 있어 차마 말로는 전하지 못하고 물끄러미 쳐다보자 내 눈을 피한 그녀가 응접실에서 나갔다.

리카 세드리한이 응접실에서 나가자, 가만히 있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아리엘.”

심상치 않은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퍼졌다.

하지만 그걸 자각하지도 못했는지 아리엘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앞에 있는 음료수를 입에 가져다 댔다.

음료수가 그녀의 목으로 넘어가는 것을 본 이안이 작게 웃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아리엘은 겁 많은 고양이였다.

가끔씩 정말 무모하게 보일 정도로 겁이 없을 뿐.

저렇게까지 긴장할 정도이면서 어떻게 자기 팔을 두 번씩이나 내줄 생각을 하는지.

그녀는 모든 것이 읽힐 듯이 투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알기 어려운 존재였다.

가끔은 무얼 생각하는지 감조차도 잡히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머리통을 열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여전히 대나무인 양 꼿꼿이 앉아 있는 그녀의 옆에 이안이 가서 앉았다. 소파의 다른 한쪽이 꺼지면서 그를 받아냈다.

그는 안주머니에 있던 빗을 꺼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묶여 있는 머리를 풀고는 까만색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잠시 움찔했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이안. 머리 안 빗겨 줘도 되는데.”

“응?”

“나도 머리 잘 빗어.”

이안이 순순히 손을 떼고 그녀에게 빗을 넘겨 주자 아리엘이 자기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아오.’

꽤나 많이 엉킨 머리에 속 터질뻔한 나는 머리에 낀 빗에다가 힘을 줘서 한 번에 머리카락을 빗어내렸다.

‘원래 한국에서도 이렇게 빗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항상 이렇게 빗어도 멀쩡하게 별 탈 없이 잘만 돌아다녔다.

나는 슬쩍 눈을 돌려 내가 들고 있는 빗을 바라보았다. 검은색 머리칼이 한 움큼 엉켜 있었다.

‘이게 다 내 머리라고……?’

이 정도면 머리가 빗을 빗은 게 아닐까. 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빗에 있는 머리카락들을 빼내었다. 머리카락들을 빗에서 다 빼내고 나니 자기들끼리 뭉쳐 있는 머리카락이 마치 누구한테 뜯긴 모양새 같았다.

“…….”

“잘 빗네.”

푸흡하고 웃은 이안이 순수하게 비꼬았다. 그리곤 자연스럽게 아리엘이 들고 있는 빗을 가져갔다.

내 손에 들린 내 머리카락들을 보니 차마 빗을 가져가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나는 순순히 그의 손에 내 머리칼을 맡겼다.

사그락사그락 이안이 조심스럽게 아리엘의 머리를 빗질하기 시작했다.

암살자들과 전투를 치르고 말을 타고 여기까지 달려오기까지 했던 머리는 꽤나 심하게 엉켜 있는 상태였다.

‘놀랐을 만도 한데.’

되게 침착하네.

뭔가 이상했다.

암살시도를 당한 수인이 저렇게까지 의연할 수 있나?

‘보통 수인이라면 충격이 일주일은 넘게 갈 텐데.’

지금 꼼지락거리고 있는 저 모양새도 암살자들한테 놀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를 무서워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녀의 페로몬도 어딘가 겁먹은 모양새였다. 당장이라도 동물로 변할 준비를 하는 것 같은 것이.

이안이 빗을 내려놓자, 아리엘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아리엘.”

“응?”

“네 몸은 소중해.”

“알아.”

그러니까 제발 날 죽일 계획은 취소해 주면 안 될까.

나는 예전에 시몬드 가문을 쓸어버리겠다던 앨런과 이안의 대화를 떠올리곤 작게 팔을 떨었다.

소름이 끼쳤는지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네 팔도 소중하고.”

그가 나를 끌어당기면서 내 팔을 감싸 안자 따뜻한 기운이 훅, 다가왔다.

묵직하고 깊은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

“팔을 다치면 어느 팔로 나를 때리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원래 아리엘은 한쪽 팔로는 나를 때리고 한쪽 팔로는 루이즈를 데리고 다니잖아.”

‘너네 누나를 내가 한쪽 팔로 어떻게 데리고 다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에 내 눈이 뾰족해졌다.

“만약에 한 팔을 잃어버리면 루이즈는 버리고 나만 데리고 다녀 주는 건가.”

그러면 더 좋은 것 같기도 한데.

쟤는 무슨 정신 빠진 소리를 하는 걸까.

나는 황당하게 그를 곁눈질했다. 물론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피했지만.

하지만 자긴 온전한 아리엘이 더 좋다며 진지하게 중얼거린 그가 가지런하게 정리된 내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 위로 올려놨다.

“근데 아까는 왜 굳이 네 팔을 내줬어?”

“내줘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팔 한 짝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으면 운이 좋은 거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

아리엘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전달했다.

그래. 그에게는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한 말.

그 말에 이안은 심사가 꼬인 듯 비뚤게 웃었다.

“아, 그래서 고아원에서도 내주었던 팔을 암살자들에게까지 내준 건가.”

그러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지.

나에겐 그것이 최선이었다.

아니면 나를 죽이고 싶어 할지도 모르는 너에게 나를 맡겼어야 했던 걸까.

“어차피 너는 미래에 날 죽…….”

일 수인인데.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입을 닫았다. 꾹꾹 눌러 담았던 위태로운 감정들이 하나둘씩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래. 나는 항상 내 상황을 멀리 떨어져서 바라봐야 했었다.

그래야지 살 수 있었고, 그래야지 덜 다칠 수 있었으니까.

“……뭐라고?”

그때 심상치 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자신의 생각이 말로 흘러나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아리엘이 아차 했다. 곧장 동물로 변하려고 했으나 따뜻한 기운이 동물로 변하지 못하게끔 온몸을 휘감은 뒤였다.

차갑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정리한 그가 곧바로 드러나 있는 그녀의 뒷목에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가 그녀의 몸속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을 무섭게 억눌렀다.

“……미래에 내가 널 죽인다고?”

아리엘은 사슬처럼 몸을 단단히 옥죄고 있는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그의 품속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며 가만히 있었다.

이미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었다.

기다려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 아리엘에, 그가 눈앞에 보이는 새하얀 뒷목을 아프지 않게 살짝 깨물었다. 그녀를 깨물자 맑고 시원한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움찔 떨리는 그녀의 어깨에 그가 달래듯이 깨문 부분을 느릿하게 혀로 핥았다.

뒤쪽으로 뭉근히 닿아 오는 감촉에 아리엘의 몸이 뻣뻣하게 굳자 그가 촉 소리 내며 입술을 떨어뜨렸다. 자신이 깨문 부분만 붉게 물든 그녀의 뒷목을 본 그가 만족스럽게 눈을 휘었다.

“내가 널 왜 죽여.”

“네가 그렇게 말했었잖아. 날 죽인다고.”

그에 이안이 느릿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저번에 가주 회의 끝나고 앨런과 시몬드 가문에 대한 처리를 이야기했을 때 아리엘이 왔다 간 것인가.

그때 수인이라고 할 수 없는 아주 작은 인기척이 맴돌다 사라졌었는데 그게 아리엘일 줄이야.

가주 회의가 끝난 뒤 어딘가 그를 피해 다니는 듯한 그녀의 태도와도 연결되었다.

그가 묘하게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가주 회의가 있었던 그날 밤에 말했던 건 시몬드 가문이었어. 네가 아니라.”

“나도 너한테 시몬드 가문의 일원으로 취급되는 거 아니었어?”

“너는 내가 주워왔잖아. 아, 간택 당한 건가.”

그가 앞에 있는 연두색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녀의 손바닥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

“나는 널 못 죽여.”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눈은 먹잇감을 향한 애달은 눈빛 같기도, 사냥을 마친 맹수의 포만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한 눈이었다.

그는 그녀를 죽일 수 없었다.

머리에 울리는 환청과 고통 속에서 손을 내밀어 준 것은 그녀였다.

아리엘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 그가 그녀의 손등 위로 입술을 갖다 댔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구원자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을 수 있을까.

그녀가 자신의 배에 칼을 찔러 넣는다면 그는 그것마저도 기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이제 무얼 하던 그녀를 막지 못할 텐데.

깊게 침전한 그의 눈에서 진실을 엿본 연두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 죽여?”

“정확히 말하면, 못 죽이지.”

그가 자신이 깨문 곳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연둣빛 눈이 흔들렸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는데?”

진실을 엿보았음에도 떨리는 목소리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보다 단단한 불신을 받고 있네.’

그는 여유롭게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목에 속박구라도 찰까?”

“뭐!? 미쳤…… 아니, 누구한테 머리에 돌이라도 맞았어?”

속박구는 노예 시장에서 팔리는 노예들이 목에다가 차는 도구였다.

주인에게 반항하면 심장 부근에 강한 통증을 느끼게 만들어 주인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는 도구.

그니까, 지금 이 앞에 있는 정신 나간 백호가 한 말은, 노예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것과 동시에 내 소유물이 되겠다고 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목에 속박구를 차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경악하며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속눈썹이 긴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을 뿐이었다.

저거 진심이다.

능글맞은 웃음 속에서 진심으로 한 말임을 알아챈 나는 어이가 없어져 기립 박수라도 쳐 주고 싶었다.

“목줄도 상관없는데.”

‘아니 저 호랑이가 진짜 미쳤나.’

카델리온 가주가 목줄을 차고 다닌다니.

사교계가 뒤집어지다 못해 공중제비할 일이다.

‘쟤가 목줄하고 나타나면…….’

환호할 영애 영식들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그 목줄의 주인을 찾기 위해 불을 켜고 다니겠지.

얼마 되지 않아 안에 독이 든 사랑스러운 편지들이 내 앞으로 줄줄 올 테고.

편지 안에 펼쳐질 욕, 아니 새들의 향연을 떠올리던 나는 입까지 벌리고 어이없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저 백호는 나를 매장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살포시 벌어져 있는 입을 닫아 준 이안은 내 한 마디면 당장이라도 그럴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자신의 볼에 내 손을 비볐다.

“뭘 해줄까, 응?”

강아지가 애교를 부리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손끝에 닿는 따스한 감촉에 그제야 그가 나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점점 가까이 와닿기 시작했다.

‘……이안은 나를 죽이지 않을 거야.’

지금의 이안은 원작 속에서 봐왔던 이안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죽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첫 만남에서도 이안은 아리엘을 죽이려고 했었는데.

지금까지 굳게 믿어 온 사실을 한순간에 거짓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조각나는 게 두려워 진실을 외면하려고 한 게 아닐까.

빨라졌던 심장의 떨림이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이안, 나 응접실에 들어간다.”

“안 돼.”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문 뒤에서 넘어왔다.

그러나 루카스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리곤 앞에 보이는 풍경에 얼어붙었다.

그 이안 카델리온이 앞에 있는 어떤 여자의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고 있었던 것이다.

‘쟤가… 저런 짓을……?’

그래, 이안 카델리온의 말을 듣지 않고 들어온 내 잘못이지.

“……나는 아무것도 못 봤으니까, 하려던 거마저 해.”

요즘 뭐 이리 운수가 나쁜지.

루카스는 한탄하며 방에서 나가고자 문고리를 다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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