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지금은 웬만한 수인들을 상대로 내 몸 하나 정도는 보호할 수 있었다.
‘침착해야 해.’
한 번 암살자의 공격을 겨우 튕겨 낸 나는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를 만만히 보던 암살자가 놀랐는지, 살짝 멈칫했다가 다시 그녀를 향해 공격했다.
이번에는 아까의 실책을 만회하려는 것처럼 맹렬한 공격들이 주위에서 쏟아졌다.
내가 루이즈에게 단검을 배웠다고 하더라도 상처 하나 없이 그들의 공격을 모조리 받아 내는 것은 무리였다.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아니, 무슨 새끼 고양이 한 마리 죽이는 데 이렇게까지 실력이 좋은 애들을 보내는데.’
여기도 죽이려고 하고, 저기도 나를 못 죽여서 안달이고.
살고 싶다는 게 그렇게 큰 소망인 건가.
원래의 계획은 마차를 전복시켜 죽이는 것이었는지, 저번에 찾아왔던 암살자들보다는 훨씬 실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심장 쪽이다.’
‘아는데 못 피하는게 짜증나네.’
나는 어떤 망설임도 없이 코앞까지 다가온 공격에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칼날이 팔에 있는 핏줄을 끊어 내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챙!!
날카로운 칼 소리와 함께 내 팔 앞에 바짝 다가온 칼이 막혔다.
거센소리와 함께 이안이 암살자의 칼을 신경질적으로 날려 버렸다.
언제 온 건지 그가 그녀를 향해 눈웃음쳤다.
“왜, 또 왼쪽 팔 내주려고?”
이안이 상처가 나 있는 그녀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팔 줄 거면 나한테 줘. 소중하게 다뤄줄게. 아리엘.”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고아원에 이어서 또 자기 팔을 내주려고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제3 자의 것을 내어 주는 듯한 태도였다.
방금, 그녀가 자신의 한쪽 팔을 내줄 때의 눈빛이 수인들이 소설을 읽을 때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이안이 상처가 난 그녀의 팔을 느슨하게 잡곤 들어 올렸다.
‘왜 그렇게 자신의 몸을 내던질까.’
그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동공이 눈에 띄게 확장된 상태였다.
그녀는 그가 올 줄은 몰랐다는 듯 순수하게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눈빛이었다.
그가 자신을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 지은 눈빛.
‘아.’
그제야 이안은 깨달았다.
‘물에 빠졌을 때도 아리엘은 나를 쳐다본 적이 없었네.’
그가 신경질적으로 앞에 있는 암살자의 칼을 쳐 내곤 살점을 갈라낸 뒤 칼을 찔러 넣었다.
“포크 하나 보고 깜짝 놀라는 심약한 새끼 고양이는 이런 것 보는 거 아니야.”
그가 아리엘의 눈 위에다가 자신의 손을 덮었다.
호수에 빠졌을 때도, 그녀는 이안이 잡고 있는 노를 필사적으로 바라보았지 그를 바라보진 않았다.
아니, 아리엘은 한 번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그에게 온전히 맡긴 적이 없었다.
촤악, 그가 신경질적으로 칼을 빼내었다. 피가 그의 칼을 흥건하게 적셨다.
어느덧 모든 암살자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는 그제야 도착한 기사들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알아서 처리해.”
서리라도 낀 것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정확히는, 아리엘은 그가 그녀를 살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똑같은 걸 되뇌이던 이안은 그제야 자신이 느끼고 있었던 기시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피로 흥건히 적셔진 검을 아무렇지 않게 검집에 쑤셔 넣은 그가 그녀 데리고 기사들이 가져온 말에 올라탔다.
***
“하….”
루카스 세드리한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앞을 바라봤다. 그의 앞에는 자신의 친우이자 전우였던 수인이 앉아 있었다.
피로 적셔진 검의 검집을 어딘가로 던져 놓았는지, 허리춤에는 검이 매달려 있지 않았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은 광경이었다.
“얼굴에 묻은 피 좀 닦지?”
“아.”
싱긋 웃은 이안이 루카스가 그에게 던진 손수건을 잡아 자신의 뺨을 닦았다.
세드리한 가문의 상징이 작게 수놓인 하얀색 손수건에 붉은색 혈흔이 묻어났다.
‘저 모습을 보면 쟤 성격이 좋다는 소문이 날 수 없는데.’
도대체 어딜 봐서 천사 같다는 걸까. 자기 볼에 남의 피 묻히고 다니는 천사도 있나.
아무래도 요즘 수인들의 뇌가 잘못된 게 아닐까.
루카스는 소파에 느릿하게 몸을 기댔다.
“오는 길에 수인 몇 명 죽이고 왔나 봐?”
그러자 이안은 비뚜름한 웃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죽였네.
부정하지 않는 자신의 친우에 루카스는 자기 머리를 한 번 헝클어뜨리더니 얼굴을 쓸었다.
“제발 남부만 얽혀들게 하지 말아라. 전쟁은 5년 전 환희의 전쟁으로 충분하다. 나는.”
환희의 전쟁.
까마귀와 비둘기 대치에서 동서남북이 한 곳에서 격돌한, 꽤나 큰 규모의 전쟁을 말한다.
세력을 넓히려던 히아트 가와 가족의 복수를 하려던 이다스 가, 그리고 히아트와 이다스 가를 견제하기 위한 세르디한 가와 세르디한과 맺은 동맹 때문에 참가했던 카델리온 가.
마지막으로 동부를 지키려던 마르코스 가까지.
루카스는 전장에서의 이안 카델리온을 떠올리곤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 전쟁은 한 쪽의 사상자 수가 압도적으로 컸던 전쟁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히아트와 이다스는 수장 자리에서 내려가고, 아쉴라와 마르코스가 수장 자리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그래서 그 전쟁의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몇몇 수인들은 하늘이 친 장난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로 웃어넘긴다.
꿈 같은 장난.
환희.
그보다 전쟁을 더 잘 설명해 주는 말은 없었다.
“남부에 이익되는 거면 옳다구나 하고 누구보다 앞장설 거면서.”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빠른 태세 전환을 한 루카스가 주제를 돌렸다.
“그래서 여기는 왜 왔는데?”
“친우가 보고 싶어서?”
“아. 그렇구나.”
“그래서 몇 박 좀 자게. 며칠 전에 서신 보내 놨는데.”
‘이쪽이 본론이로구만.’
루카스는 당연히 이안 카델리온에게서 받은 서신은 뒤로 밀어 놓고 보지 않은 상태였다.
“너와 함께 온,”
“루이즈의 제자이자 내 육촌의 친구의 사촌의 친구랑.”
“그래, 네 육촌의 친구의 사촌의 친구분도?”
“어.”
“아, 근데 그 분한테 리카가 꽤 관심을 보이던데.”
꽤가 아니라 아주 많이 보이고 있던데.
루카스는 아리엘을 뚫을 듯이 쳐다보던 자신의 여동생을 떠올리곤 걱정했다.
‘이안의 인질도 참 박복한 팔자네. 이안에다가 리카 세드리한에다가…’
어우. 어떻게 사냐.
루카스 세르디한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
아리엘은 지금 바로 앞에 있는 VVIP 고객을 바라봤다.
‘…하하.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부자연스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이로써 누가 봐도 혀를 차고 지나갈 만한 어색해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누가 보면 제가 아리엘 님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줄 알겠어요.”
“하하….”
아리엘은 땀이 나는 손을 꽉 쥐었다. 끈적거리는 느낌이 참 별로였다.
그 모습을 본 리카 세드리한이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안 잡아먹어요.”
응접실에 들어온 시녀가 간단한 디저트를 내려놓곤 방에서 나갔다. 리카는 아리엘에게 먹으라고 하며 앞에 있는 쿠키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저에겐 귀여운 악어가 있어서요. 악어만 잡아먹기도 충분한데요, 뭘.”
“귀…여운 악어요?”
입에 있는 차 한 모금을 뿜을 뻔했다가 겨우 목구멍 안으로 집어삼켰다.
최상위 포식자들의 특기는 헛소리인가.
로커 영식은 세르디한 가(家) 기사단장까지 맡을 정도의 인물인데.
180이 넘는 키에 칼을 휘두르는 기사단장.
귀엽…나…?
“악어보다는 악어새에 더 가깝달까요. 귀엽고, 잘 챙겨 주고….”
아. 콩깍지구나.
그러면 납득 가능했다.
“어머, 귀여워 보이면 게임이 끝난 거라는데….”
금방 납득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열성적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남의 연애사는 항상 재미있는 법이다.
아리엘이 눈을 반짝 빛내며 흥미 있는 기색을 보이자 리카 세드리한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사실 원래는 로커가 먼저 선물하기로 했었는데….”
“어떤걸요?”
“저희의 사랑의 징표요.”
리카가 붉은 입꼬리를 생긋 올리며 자신의 반지를 소중하게 매만졌다. 펠릭스 상단의 상징인 물방울이 작게 반지에 박혀 있었다.
‘아. 그래서 세르디한 기사단장이 그렇게 높은 금액을 썼던 건가.’
실제로 세르디한 기사단장은 앞에 있는 리카 세드리한과 녹스 히아트 다음으로 금액을 가장 많이 쓴 사람이었다.
의외였었는데 이게 이렇게 맞아떨어지는구나.
“실제로는 리카 님이 먼저 멋지게! 하셨잖아요! 그것 때문에 대륙이 한바탕 뒤집혔던데…….”
처음의 긴장감은 어디로 간 건지, 아리엘이 눈을 빛내며 그녀를 쳐다봤다.
누구길래 ‘그’ 이안 카델리온이 그렇게 집착하는지 궁금해서 불렀을 뿐인데, 생각보다 매우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다.
저 연두색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보면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후후, 근데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 제가 먼저 확, 했어요.”
생각만 해도 행복한지, 그녀의 빨간 눈꼬리가 휘영청 휘었다.
마지막으로 차를 한 모금 우아하게 목으로 넘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리엘은 어떤 수인이랑 사귀고 싶….”
까지 말한 리카는 아차, 했다.
이안 카델리온한테 납치당했는데에도 불구하고, 멀쩡히 살아서 앞에 있는 아리엘이 다른 수인들을 사귈 리가 만무했다.
‘이안이 그걸 내버려 둘리가 없지.’
원래 그런 성격이 집착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데.
앞에서 마카롱을 맛있게 먹고 있는 수인이 연애할 확률은 자신의 어머니의 아들이 연애를 통한 결혼을 할 확률보다 더 낮았다.
그때 두어 번 노크하던 소리가 났다.
“들어와.”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남자가 웃으며 들어왔다.
응접실에 들어온 이안이 리카 세드리한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가 서늘한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자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북부의 수장이자, 카델리온 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리카 세드리한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 치마를 펼치고 무릎을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이안?”
아리엘의 연두색 맑은 눈이 놀란 듯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마카롱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러자 한순간에 서늘하고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푼 그가 초승달처럼 눈꼬리를 곱게 휘며 말했다.
“우리 할 이야기 많지 않아?”
그녀를 옥죄고 있던 보이지 않던 압박감이 그녀를 향한 경고였던 것처럼, 단숨에 풀어졌다.
그녀는 아닌 척 자신이 끼고 있는 반지를 매만지며 이안을 쳐다봤다.
이미 집착하기 시작했구나.
리카는 앞에서 맛있게 디저트를 먹고 있었던 어린 양을 향해 애도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