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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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답지 않게 그의 심장이 잠시 덜컥거렸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배시시 웃고 있는 아리엘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벽안에 기이한 만족감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상해.’

가슴이 뻐근하고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파도처럼 쓸려 들어오는 기묘한 충만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첫 만남 때부터 그는 항상 그녀를 원했지만, 그녀가 먼저 직접적으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항상 다가가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그런데 ‘사랑해’라니.

그녀가 처음으로 먼저 한 애정 표현이나 다름없었다.

아리엘이 자신을 이성적으로 욕망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이번 일을 넘어가 달라는 의미의 아부가 묻어난 표현이었지만, 이안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무릇 말의 의미란 청자가 해석하는 것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겠는가.

눈꺼풀을 느리게 감았다 뜬 그의 얼굴에서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툭 내던진 말에 이안이 아무런 답이 없자, 그녀가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이안…?”

조심스레 자신을 쳐다보는 아리엘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만약에,”

그 새파란 눈동자가 앞에 있는 눈동자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내가 사정이 생겨서 고아원에 늦게 도착했으면 어쩌려고 했어?”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녀는 항상 자신의 위험을 가볍게 생각했다.

그 안 좋은 몸을 이끌고 자신이 겪을 수 있는 위험은 모조리 겪고 다녔다.

아기 고양이인 상태에서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던가, 배에서 호수로 빠진다던가, 외출 중에는 뭘 하고 다니는지 도통 행적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 고아원에서 잘못되어 다치기라도 했다면….’

그의 눈동자가 어둑해졌다.

“미안해…….”

“…….”

그녀가 조용히 속삭이며 말하자 누군가 뭉근히 그의 왼쪽 가슴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이렇게 자신을 이용했더라면 이미 죽여 버렸을 텐데.

이상하게 기쁜 것은 왜일까.

이런 아리엘의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 주기 싫었다.

새파란 눈동자에 소유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안?”

자신의 조심스런 사과에도 그가 아무 반응이 없자 아리엘이 그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말 머리를 돌리라고 해서 북부 별장으로 갈까.’

북부 별장엔 사용인들도 많이 없는데.

이안은 앞에 있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가만히 있었는지, 앞에서 무언가 마려운 강아지인 양 안절부절못하던 그녀는 어느새 창틀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피곤했나.’

뭐가 그리 불편한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푹푹 숙이는 것이 곧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저러다가 목이라도 부러지는 게 아닐까.’

아리엘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이안이 혀를 차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녀가 열어 놓았던 마차의 커튼을 치고 잘 익은 벼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리엘 옆에 앉았다.

푹신한 마차의 의자가 부드럽게 그의 무게감을 받아 냈다.

이안이 자신의 어깨 위로 그녀의 머리를 올려놓자, 추위를 많이 타는 아리엘이 작게 칭얼거렸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온기를 잡기 위해 옆으로 팔을 뻗곤 그에게 얼굴을 비볐다.

깨어 있을 때와는 상반된 모습에 그가 픽 웃었다.

이안이 아리엘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그녀를 바라봤다.

어느새 그녀의 표정은 부드럽게 풀린 상태로 잠들어 있었다.

그래. 북부 별장에서 둘이서만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업무는 평소처럼 아리엘이랑 같이 있을 때 하면 되고.

‘만약 그 고아원에서 잘못되어 다치기라도 했다면….’

“ㅅ… 싫어… 하지….”

겁먹은 그녀의 목소리에 그는 상념을 멈추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붙어 자고 있는 아리엘이 덜덜 떨고 있었다.

가끔씩 아리엘은 자다가 허공을 향해 하악질을 한다던가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경우가 몇 번 있었다.

“쉬이… 괜찮아.”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익숙하게 그녀를 달랜 이안이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무슨 일이 있어야지 이렇게까지 떨 수 있는 걸까.

그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

“찾아내!!!”

시몬드 가에서 질리도록 들었던 목소리.

익숙한 노호성이었다.

‘아… 또.’

이 꿈이다.

나는 피투성이가 된 내 앞발을 내려다보곤 썩어들어가는 표정을 지었다. 내 몸은 새끼 고양이인 상태 그대로였다.

더럽게 강한 통증이 몸에서 느껴졌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는 어딘지 모를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냥 최대한 구석에 몸을 욱여넣자.’

숨을 거면 그 사람이 최대한 나를 늦게 찾는 게 좋지 않을까.

뭘 해도 느끼게 될 고통이라면 1초라도 늦게 받는 게 좋은 법이다.

내가 무슨 수를 써도 어차피 그는 나를 찾게 될 테니까.

“찾았다.”

구멍 사이로 눈을 갖다 댄 시몬드 가주가 씩 웃었다.

탁한 녹색 눈동자가 구멍을 통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봐.’

지금처럼.

그리고 그 순간, 꿈속의 장면이 바뀌었다.

질리도록 있었던 공간이었다.

내가 제일 싫어했던 곳.

‘곧 의식을 잃겠지.’

하지만 꿈이라서 그런지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잘 수 없었다.

그렇다고 눈이 떠지지도 않았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몬드 가주, 언제까지 실패작을 붙잡고 있을 건가. 차라리 폐기 처리하고 새로운 실험체를 찾는 게 나을 듯싶은데.”

아. 히아트 가주 목소리다.

‘분명 저 폐기 처리하라는 건 내 목숨을 끊으라는 이야기인 거겠지.’

눈을 감고 있어서인지 그들의 목소리밖에 들리는 것이 없었다.

“실패작이라니, 반 이상은 성공하지 않았는가.”

“나머지 반이 성공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 아닌가.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오히려 우리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네.”

“어차피 성장혈도 도려냈고 페로몬혈도 망가졌는데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어차피 저것은 살아 있으면 안 되는 것인데.”

그 말을 끝으로 몸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새어 나가는 끔찍한 느낌이 들었다. 내 몸의 기운이 거대한 빨대에 빨려 나가는 듯했다.

‘아. 그래서였구나.’

내가 이름도 없고, 시몬드 가에 올라가 있지 않은 이유가 그래서였어.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기에.

아니, 죽어야만 하는 목숨이었기에.

그리고 이질적인 기운이 내 몸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카온 가(家) 자제의 페로몬일 것이다.

‘곧 몇 번 더 반복하겠지.’

이제는 익숙해진 기운이었다.

‘……익숙해졌다니.’

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 나는 남의 페로몬을 익숙하다고 느끼는 거잖아.’

정확히는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 빨려 들어가는 내 페로몬은?

도대체 누구한테.

생각과 고통은 따로 노는지, 강렬한 고통이 나를 덮쳤다. 중요한 것을 생각하는 중인데도 현재 밀려들어 오는 기운과 빨려 나가는 내 기운이 맞지 않는 것인지 울렁거리고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곧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달아오른 것이 무섭게 곧바로 몸이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쟤네들 대화를 들어야 하는데.’

그래야지 뭐라도 알아내지.

밀려드는 고통에 뇌가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이건 꿈인데 왜, 왜 고통이 느껴지는 걸까.’

꿈에서도 통각이 느껴지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빨리 잠에서 깨고 싶다.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다.

내가 왜 꿈에서도 이러고 살아야 하지?

이 빌어먹을 꿈은 누가 깨워 주지 않으면 깨지지 않았다.

듣다가 기절이라도 했는지, 어느새 장소가 또 바뀌어 있었다.

나는 박스 안에서 홀로 헐떡거리고 있었다.

“나가자.”

누군가 나에게 속삭였다.

“여기서 나가자.”

그게 현실인 듯 길고 곧은 손이 나를 향해 내밀어졌다.

이곳은 허상인데도 불구하고.

익숙한 손은 나를 향해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안이 떠올랐다.

어차피 걔도 나를 죽일 거잖아.

이안 카델리온이 시몬드 가문을 처리하겠다고 한 말을 생각하자 가슴이 섬뜩해졌다.

‘나가 봤자 나를 죽일 사람 따라가는 건데.’

그래도 뭔들 여기보다는 낫지 않을까.

나는 홀린 듯이 내 앞발을 그 손 위에 얹으려고 했다.

그러나 와장창, 그 순간 이 모든 허상이 깨져 버렸다.

눈을 뜨자 유리창 파편이 나에게 날아왔다. 볼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옆을 보니 이안은 이미 밖으로 나갔는지, 마차 안에 있지 않았다.

어두웠던 그 공간과 다르게 밝은 햇빛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우와. 이렇게까지 한다고?’

내 존재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처리하려고 하는 걸까.

내가 도대체 얼마큼 자신들에게 위험하길래 카델리온 마차에도 살수를 보내는 걸까.

그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죽어야만 하는 존재인 걸까.

지긋지긋함에 아리엘이 자신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뜨렸다.

“이히히힝!”

앞에서 말이 울부짖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폭력적으로 움직였다. 옆에 있는 말이 죽자 겁 먹은 말이 날뛰었다.

마차가 심상치 않게 흔들리는 것이 곧 무너질 것 같았다. 심지어 어디에선가 타는 냄새도 나는 게 무언가 이상했다.

지금 이 상태로라면 마차에 전복되어 죽거나, 데굴데굴 굴러다닐 마차 안에서 무언가에 맞아 죽거나 마차 안에서 노릇노릇하게 익혀져 고양이 구이가 되거나. 셋 중 하나였다.

아. 보기가 하나 더 있었다.

끝까지 발악하다가 암살자들에게 죽거나.

‘죽더라도 한 명은 죽이고 죽어야지.’

그걸 자각한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 문을 발로 찼다. 내 발에 맞은 마차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그리고 예측했던 그대로, 시꺼먼 옷을 입은 수인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이안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간 큰 짓을 저지른 데엔 큰 이유가 있다는 듯 꽤나 실력이 좋은 암살자들이 여러 명 그의 주위에서 공격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쟤는 괴물인 걸까. 공격이나 방어계 페로몬도 없으면서 혼자서 저 정도를 상대하는 게 가능하기나 해?’

타오르는 불길에 마차가 속없이 무너졌다.

암살자들이랑 싸우고 있던 이안이 마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차 밖으로 나온 아리엘을 본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 실수.”

그리곤 그가 실수로 암살자의 머리를 베어 버리고 말았다. 암살자의 머리를 발로 차 버린 그가 눈가를 휘영청 휘었다.

“이번에는 모두 하나같이 온전하게 저택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가 부드럽게 칼을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시선은 아리엘에게 고정한 상태였다.

아리엘은 자신을 상대로 방심한 채, 이안을 바라보고 있는 암살자들을 천천히 뜯어보고 있었다.

저번에 그의 집무실에서 나를 공격했던 암살자들과 같은 곳에서 길러진 수인들 같았다.

‘쟤네 상대로 5초가 가능할까.’

저번에 보니까 엄청 실력 좋던데.

나는 품 안에 있는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빠르게 내게 다가왔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품속에 있던 단검을 꺼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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