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눈이 절박하게 외치고 있었다.
아이의 눈빛에서 삶의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살고 싶어 하는 마음도 겹쳐 보였다.
마치 예전의 자신처럼.
숨이 턱 막혔다. 시야가 뿌예졌다.
그녀는 그곳에 혼자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은 아직도 과거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그녀는 탁 막힌 공간에서 말했다.
“아니. 도망 안 가.”
그녀가 뿌예지는 시야를 걷어 내고 주위를 살펴봤다.
“미셸을 찾는 거면, 그 아이는 징벌 방에 있어요.”
그림을 못 그렸거든요.
아이가 작게 읊조렸다.
“징벌 방?”
“복도에서 벽 쪽에 숨겨져 있는 방이요. 벽을 두 번 누르면 열려요.”
그러자 언제 따라온 건지, 뒤에 있던 클로에가 군말 없이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
좁은 틈 사이로 밝게 들어오는 빛에 꾸벅꾸벅 몸을 웅크리고 졸고 있던 미셸이 서서히 눈을 떴다. 며칠 동안 어둡기만 한 방 안에 있다가 밝아오는 주위를 보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직 이곳에서 빠져나갈 때가 되지 않았는데.’
이곳 원장은 무엇이 그리 괘씸했는지, 그녀가 전시회 측에 불려간 이후 그녀의 그림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언제까지 이딴 식으로 그릴 거냐면서.
‘내가 내 방식대로 그리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미셸은 그녀의 그림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녀가 그녀의 그림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어 줄까. 그녀는 반항기 가득한 눈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봤다.
‘……어??’
그러나 문 앞에는 눈, 코, 입 자유분방하게 생긴 사람이 아닌, 처음 보는 사람이 앞에 있었다. 핑크색 구름이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사람의 발끝을 향하던 아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갔다.
“음… 시간이 없어서 그런데 비안 웨스트라는 분 알지?”
비안 웨스트라면, 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그림을 처음으로 사 간 사람이었다.
마음에 든다면서.
‘……같이 무슨 종이를 쓴 것 같기도 한데.’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클로에가 말했다.
“그분이 너의 도움을 받고 싶으시대. 여기는 그분이 써 주신 말.”
그것을 본 아이는 아무 미동도 없었다.
“아마 우리랑 같이 가면 숙식은 여유롭게 제공 받을 수 있어. 어떻게 할래?”
“저, 정말요?”
고개를 든 아이의 눈에 바닷물에 비친 햇빛처럼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과 희열이 눈에 담겨 있었다.
“감사 인사는 나 말고 비안 웨스트 님께 하고.”
그럼, 동의한 걸로 안다?
아이의 귓가에 속삭인 클로에는 그녀를 안고 고아원을 빠르게 떠났다.
***
바깥에서 슈엘라와 얘기하고 있던 원장은 아리엘이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어딘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슈엘라 님, 잠시 어디 좀 갔다와도 될까요?”
슈엘라의 시선이 슬쩍 시계로 향했다.
‘이 정도면 오래 붙잡은 거 아닐까.’
아마 자신이랑 대화하는 동안 원장의 시선은 아마 문 밖으로 쏠려 있었겠지.
그것을 고려하면 최선을 다해 시간을 끈 거였다.
‘여기서 나가는게 맞아.’
슈엘라가 가방을 챙기며 일어났다.
“아, 안타깝게도 저도 일이 있어서 빨리 가 봐야 하네요.”
“아, 안타깝군요. 다음에 또 뵙길 고대하겠습니다.”
말과는 달리 원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예, 그럼.”
슈엘라가 문고리를 잡고 원장실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슈엘라가 방에서 떠나자마자 치마를 꽉 움켜쥐고 있는 원장의 표정이 무섭게 구겨졌다.
***
“징벌 방 바로 옆쪽 벽을 세 번 두드리면 어떤 통로가 열려요.”
아리엘은 다락방에서 아이가 해준 말을 복기하며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계단 올라가서 왼쪽으로 한 번 문고리를 돌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돌리면 문이 열려요. 제가 알려 드릴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어요.”
철커덕 철컥.
빠른 손놀림으로 나무문을 열어 버린 아리엘이 방안을 빠르게 둘러봤다.
“너는 처음 보는 사람을 왜 그렇게 도와주는 거야?”
“누구든 좋으니까, 이깟 고아원 다 박살 내 버렸으면 해서요.”
들어간 방 안에는 무수히 많은 그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빽빽하게 가득 차 있었다. 책상을 제외한 모든 곳이 그림으로 이루어진 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원장이 그림에 대한 강박이라도 있었나.’
심지어 책상 위에 있는 시계도 그림이 그려진 시계였다.
강박이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 광경에 아리엘은 혀를 차며, 드레스 안에서 천으로 된 가방을 꺼냈다. 주로 하녀들이 담을 넘어 놀러 다닐 때 사용하던 것을 가져온 것이었다.
뚜벅뚜벅.
밖에서 나는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녀는 침착하게 책상 위에 보이는 모든 서류를 가방 안에 쓸어 담았다.
덜컥덜컥.
‘여긴 왜 잠겨 있어?’
직감이 말했다. 여기는 무조건 열어야 한다고.
아리엘은 곧바로 자신의 머리에 꽂혀 있는 실핀 두 개를 뽑아 하나는 그대로 90도를 꺾어 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민도 없이 다른 하나는 한쪽을 편 뒤 열쇠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두 핀이 잘 들어갔는지 확인한 아리엘은 한쪽만 집어넣은 핀을 능숙하게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생에서 학생 때 애들이랑 장난으로 했던 장난이 이럴 때 쓸모 있을 줄이야.’
핀으로 열쇠 구멍을 헤집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랍이 열렸다.
무릇 한국에서 학교생활 좀 제대로 해 봤다 하면, 문 따거나 서랍 따는 방법은 상식으로 하나씩 알아 두기 마련이다.
‘이거다!’
그녀는 책상 안에 있는, 비교적 얼마 되지 않는 서류들을 드레스 안쪽으로 숨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걸 뺏겨선 안 된다고 감이 말해줬다.
그때였다.
철커덕 철커덕. 철컥철컥.
쾅쾅쾅!!
조급한 마음으로 누가 이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씨, 이거 왜 안 돼!!!”
고아원을 안내해 줄 때까지의 고상함은 어디다 집어던졌는지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고아원 원장의 마음이 급해서 지금 못 들어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는 근처에 있는 것들 중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을 찾아 방안을 다시 훑어봤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입술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이거다.’
한 세 번 정도 치면 기절시킬 수 있을 것 같이 생긴 두꺼운 책이 눈에 들어왔다.
철커덕, 철컥.
그리고 그때, 방문이 열리며 뒷짐을 진 채 야차처럼 찌그러진 얼굴을 한 원장이 나를 바라봤다.
“어머, 여기는 어떻게 오셨나요.”
방문 앞에서보다는 신경질적인 것이 나아졌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그냥, 발길이 이끄는 곳을 따라가다 보니.”
아리엘은 예의 능글맞은 이안의 표정을 따라 지으며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이렇게 오게되었네요. 근데, 여기는 어디죠?”
내가 거리를 벌리기 무섭게 원장이 나를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다가왔다.
“여기는 발길이 이끈다고 올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요.”
어느새 무슨 결심을 마쳤는지, 원장이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림 사기꾼이랑 자매인 걸까. 정말 똑 닮았다.
뒤로 주춤거리던 등에 닿는 딱딱한 감촉에 나는 발을 멈췄다.
‘아. 망할.’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시계를 힐끔 본 아리엘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쿡쿡 웃던 원장은 어딘가 맛 간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히죽 웃으며 소매에서 은색 날붙이를 꺼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아리엘이 땀이 난 손으로 들고 있던 두꺼운 책을 꽉 쥐었다.
“……네가 뭔데,”
‘하나.’
“네가 뭔데 이곳을 털려고 해!”
‘둘.’
그녀가 손을 높게 쳐들었다.
‘셋!’
“꺄아아아악!!!!”
저 여기 있어요.
아리엘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칼로 찍어 내리려고 하는 원장의 머리를 두꺼운 책으로 내리쳤다. 책이 퍽! 소리를 내며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책에 머리를 맞은 원장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칼이 무슨 생명줄이라도 되는지, 여전히 손에는 칼을 꽉 붙들고 있는 채였다.
“아아악!!!”
머리를 헝클어뜨린 그녀가 분한 듯 아리엘을 향해 뛰어왔다. 이지를 상실한 멧돼지가 그녀를 향해 돌진하는 것 같았다.
‘이건 어떻게 못 하겠는데.’
맞아라. 제발.
짧은 순간에 판단을 내린 아리엘은 들고 있던 책을 그녀에게 던졌으나 아슬아슬한 차이로 책이 그녀에게서 빗겨나갔다.
‘망했다.’
책을 던지고 할 수 있는 게 사라진 나는 최대한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괜찮아. 왼쪽 팔만 나가는 거야.’
눈을 질끈 감은 채 앞으로 다가올 고통을 기다렸으나 느껴지지 않는 고통에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는 날 찌르지 않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원장이 있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칼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뒤에는….
“2시까지 트라바슈 고아원에서 만나자더니 이런 말이었어?”
화사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백호 한 마리가 있었다. 빨래집게에 집힌 빨랫감처럼 뒷덜미를 잡힌 원장이 그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자. 감옥에다 던져놔.”
“존명.”
천장에서 내려온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수인이 그가 내던진 원장을 질질 끌고 갔다.
‘넌 죽었어.’
씩 웃은 아리엘이 원장을 보며 엄지손가락에 목을 그었다.
상황 파악을 했는지, 하얗게 질린 원장의 표정이 그 상태 그대로 점점 굳어 갔다.
‘잘 가.’
그리고 그걸 본 나는 상큼하게 사이다가 터지는 기분을 만끽하며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탁.
문이 닫히고 손을 흔드느라 쫙 펴져 있던 내 손을 누군가 접어 주었다.
내 손을 말아 쥔 이안이 나긋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아리엘, 자세한 건 이따가 마차에 가서 물어볼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었다.
***
아리엘은 자신을 샅샅이 파낼 것 같은 파란색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벽안이 가늘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안이 비뚜름히 웃고는 다리를 꼬았다.
“해명해 봐. 아리엘.”
들어는 주겠다는 태도였다.
아리엘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바쁘게 굴렸다. 그러나 마차 안엔 단둘만 있어 피할 수 있는 공간도 없었다.
아리엘과 이안을 태우고 있는 마차는 아무런 소음도 없이 매끄럽게 잘만 굴러갔다. 부드러운 승차감에 잠시 몸을 맡기고 창밖을 바라보려 했으나, 창은 커튼으로 닫혀 있었다.
다시 눈을 데구르르 굴려 앞을 바라보자 이안이 어디 한 번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라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가 무고한 호랑이를 때리는 것에 대한 대가로 슈 하나를 받아먹은 것을 기억하는데. 그래서 한동안 그 무고한 호랑이 얼굴에 고양이 발자국이 남아 있었고.”
‘분명 그 발자국은 5초 만에 지워졌던 걸로 아는데…….’
그에게 ‘한동안’은 5초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일까.
“슈 하나에 앨런의 바람대로 무고한 호랑이에게 주먹지르기를 날렸잖아.”
요컨대, 정의심에 불타서 했다는 헛소리는 꿈도 꾸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 이거 어지간한 변명이 아니고서야 넘어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니까….”
“그니까?”
“사랑해.”
아리엘이 배시시 웃었다.
한 번만 넘어가 달라는 아부의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