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 (91/111)

90.

얼마 되지 않아, 응접실로 다시 들어온 여자가 다리를 살짝 굽히는 귀족식 예법으로 인사했다.

슈엘라는 가만히 앉은 채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트라바슈 고아원 원장, 레리 프라드라고 합니다.”

‘몰락 귀족인데 귀족인 건 티 내고 싶어 하는 부류.’

제일 귀찮고,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부류였다.

근 몇 주간 파랑새들을 통해 귀족들의 예법들을 질리게 보아 온 슈엘라가 빠르게 유추했다.

그녀가 찻물을 입술에다만 갖다 대며 휘어지는 입꼬리를 찻잔으로 감추었다.

팔은 너무 밑으로 처져 있고 발의 각도는 너무 펴져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굳이 저렇게 귀족식으로 인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인사를 한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뜻했다.

평민인데 돈이 많아 귀족의 신분을 사들여 귀족 사회로 편입하고 싶어 하는 것, 또는 본래 귀족이었지만 몰락한 경우.

하지만 앞서 인사하는 여자의 옷차림을 보아하니 신분을 새로 살 정도의 재력이 보이진 않았다.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나 착용하고 있는 장신구들은 어디까지 귀족 사회에서 적당하거나 못한 것으로 취급받는 것들이었다.

그녀가 슬쩍 혀를 핥았다. 그러자 쓰게 느껴지는 차 맛에 곧장 찌푸릴 뻔했던 눈썹을 곧바로 폈다.

그것을 본 클로에가 비웃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에 슈엘라는 양쪽 모든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리곤 허리를 곧게 폈다.

그러니까 눈으로 나누는 대화를 해석해 보면, 대충 이런 식이었다.

‘그것도 쓰다고 못 먹냐.’

‘뭐. 어쩌라고.’

마찬가지로 차를 마시는 척만 한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아이를 한 명 데려가려고 하는데…….”

그녀가 말끝을 흐리고 앞쪽을 슬쩍 쳐다보자 탐욕으로 물든 원장의 입이 움찔움찔거렸다.

“어머. 그럼 잘 찾아오셨군요.”

그녀가 짝, 하고 박수를 쳤다.

그러자 몇몇 아이들이 주춤거리면서 그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미셸은 없네.’

상냥한 시선으로 아리엘이 앞에 있는 아이들을 훑었다. 깨끗하고 곱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모두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없나요?”

아리엘의 시선이 그들의 손에 머물렀다가 돌아왔다. 바짝 마른 아이들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기왕이면 직접 둘러보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아, 그건……”.

고아원 원장이 난감하다는 듯 말을 흐렸다.

그러자 아리엘이 활짝 웃었다.

“이 고아원 후원도 할까 생각 중이어서요.”

그러자 떨떠름한 기색이 드러났던 원장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그러면 언제 다시 방문해 주실 건가요? 그때 맞춰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오늘 볼 수는 없을까요?”

잠시 흐려진 원장의 표정에 아리엘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가 돌아왔다.

“오늘은 저희 고아원이 잘 준비가 되지….”

그녀는 눈치 없는 척,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리엘이 앞에 있는 원장의 손을 꼭 맞잡았다.

“괜찮아요!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시설이 정말 좋다고 생각했는걸요! 아이들이 이곳을 정말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 번만 보려고 하는데….”

“아…….”

“오늘이 아니면 다른 고아원에 가야 할 것 같아서… 혹시 어떻게 안 될까요?”

아직 탐탁지 않아 하는 원장의 표정을 본 그녀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이곳이 정말 마음에 들어 후원하고 싶었는데… 하고 중얼거린 건 덤이었다.

원장이 옆에 있던 선생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선생은 허리를 짧게 숙이곤 어딘가로 사라졌다. 시녀와 주인 같은 느낌이 드는 관계였다.

선생이 사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원장이 그들을 향해 뒤돌며 웃었다.

“그럼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기는 아이들이 노는 놀이방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생각보다 시설은 다 깔끔하고 괜찮았다.

뭔가 찝찝했던 기운을 잘못 느꼈던 거로 생각할 만큼.

“마지막으로 여긴 다목적실입니다. 그냥 빈방이나 다름없죠.”

다목적실은 말 그대로 그냥 휑했다.

창문을 열어 놓은 방엔 아무것도 없이 커튼만 펄럭이고 있었다.

‘이상해…’

문득 이보다 더 번지르르했던 시몬드 가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무언가 마음이 싸했다.

“마지막으로 여긴 원장실입니다.”

원장실의 어두운 나무로 이루어진 벽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인테리어도 전체적으로 우드 톤으로 맞춘 것이 보였다. 사람이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근데 왜 어딘가 음침해 보이지.’

도대체 왜?

아늑한 공간이 음침해 보인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특히나 그것이 고아원이라면 더더욱.

‘…그래. 아이들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아리엘의 눈동자가 커졌다.

원장이 소개해 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이곳을 둘러보며 아이들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보통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을 한 번도 보지 못하는 것이 정상인 걸까?

‘…아니, 절대 아니야.’

전생에서 읽은 어떤 일반적인 로판 소설에서도 귀족이나 후원자가 고아원에 방문하는 장면에서 아이들이 나오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보통 그런 장면에서는 오히려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천진난만하게 돌아다니던가, 울고 있지 않나……?’

겁에 질려 있는 경우도 있긴 한데.

‘…뭔가 이상해.’

아이들이 없는 고아원이라니.

나는 급하게 내가 읽은 원작 내용을 머릿속에서 뒤져보았지만, 당연히 원작이 이런 작은 부분까지 언급했을 리는 없었다.

‘뭐지. 뭘까.’

‘분명 이곳을 둘러보기 전에 원장이 어떤 선생한테 귓속말을 속삭였고….’

하나도 들리지 않는 아이들의 목소리, 옆에 있던 선생한테 뭔갈 속삭였던 원장, 시녀가 명령에 따르듯이 고개를 숙이던 그 선생의 태도…….

‘그리고 저기 벽 사이에 숨겨져 있는 문.’

자연스럽게 어딘가 이상했던 다용도실이라고 불리던 빈방도 떠올랐다.

‘분명 밖에서 봤을 땐 다락방도 있는 것 같았어.’

그리고 여태까지 둘러본 게 전부라면…….

‘전부일 리가 없어.’

생각해 보니, 원장은 아이들이 잠자는 공간도 보여 주지 않았다.

관리도 안 된 상태로 처박혀 있었지만 시몬드 가(家)를 방문했던 손님과 구조를 분리해놓기라도 한 듯, 손님들이 길을 잃더라도 절대 갈 수 없었던 시몬드 가(家)에서의 내 방.

그리고 이곳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숙소.

1시 10분.

‘벌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아리엘이 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래서 이 아이는…….”

“잠시만 혼자서 더 둘러봐도 될까요?”

심각한 그녀의 분위기에 휩쓸려 앞에 있는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원장이 그 말을 번복할 새도 없이 ‘고마워요.’라고 말하곤 바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아리엘이 나가자마자, 슈엘라가 눈치 좋게 저는 여기서 더 설명을 듣고 싶은데, 라고 능청떨며 원장을 잡은 덕에 원장은 그녀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 커튼만 휘날리던 방이…….’

다용도실.

여기서 직진해서 우회전이었나.

원장실에서 나간 그녀의 발은 이곳을 둘러보려는 사람치고는 다급하게 움직였다. 둘러보려는 사람보다는 시간에 쫓기며 무언가를 찾는 사람의 발걸음이라고 하는 것이 더 가까웠다.

다목적실에 들어가자 여전히 휑한 방 안과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커튼이 그녀를 맞이했다.

‘원장실이 아니어도 여기 어딘가에 그 다락방이나 아이들의 숙소랑 연결된 공간이 있을 거야.’

나는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엄청 높은 지위에 있거나 대륙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부자가 살고 있는 저택이 아닌 이상, 숨겨 두는 방으로 내려가는 방법은 다 똑같았다.

‘보통 이런 데는 바닥 타일 하나가 이상하던데.’

아리엘이 쭈그려 앉아 타일 하나를 치자 ‘퉁’하는 빈 소리가 울렸다.

‘…우와. 이렇게 바로 찾는다고?’

몇 번 옆의 타일들을 두드려 보던 아리엘은 그녀가 처음 두드렸던 타일의 틈을 발견하곤 그것을 들어 올렸다.

‘미친.’

그러자 밑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바로 보였다.

나는 사다리에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밑을 내려다보며 한 발자국씩 발을 움직였다.

어렴풋이 겨우 시야가 잡히는 통로를 쭉 걸어가자 복도라고 하기도 애매한 작은 통로가 나왔다.

그리고 바로 그 복도 건너편에는 문이 있었고, 문의 구멍에는 작게 쇠창살이 달려 있었다. 마치 감옥처럼.

조그마한 구멍에 눈을 갖다 대자 그 쇠창살 사이에는 공장으로 보이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안엔 생기 없는 눈으로 무언갈 와인병 안에다가 집어넣고 포장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지 기계적인 손놀림이었다.

‘…저건 감옥 아니야?’

심지어 문은 안에서는 열 수 없고 오로지 밖에서만 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문이었다.

‘…썩은 두리안 냄새 같은 놈.’

나는 속으로 이를 바득 갈며 원장을 욕했다.

앞으로 쭉 직진하자, 막혀 있던 벽처럼 보이는 문 가장자리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리엘은 고민도 하지 않고 그 사이에 손가락을 넣고 당겼다. 그러자, 막혀 있던 한쪽 벽면이 벌어지더니 그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겼다.

다시 사다리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자, 한 명이 자기에도 벅차 보이는 비좁은 방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이들 여섯 명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몸을 서로에게 반쯤 올린 체였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그들은 하나같이 필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저 아이들도 아까 공장같이 보이는 곳에서 일하는 아이들인 걸까 아니면 무엇을 하는 아이들인 걸까.

그 광경을 보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문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카델리온 가에 오기 전이 생각나서일까, 말아 쥔 두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을 감고 기다리는데도 위에서 아무런 말이 없자, 그 방에 있는 아이들 중 가장 커 보이는 아이가 슬며시 눈을 떴다.

곧 메마른 아이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그의 팔은 옆의 동생들을 보호하려는 듯 위로 올라가 있었다.

“어서, 도망가요.”

그리고 그 말은 아리엘의 귀에 이렇게 들렸다.

저 좀, 꺼내 주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