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90/111)

89.

듣기만 해도 시린 목소리에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누군지 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이 예상되었다.

‘이안이겠지.’

서재 안의 온도가 5도 정도 내려간 것 같았다.

나는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푸른빛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는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아리엘, 누가 누구를 죽이려 한다고?”

‘너가, 나를요.’

그 말을 들은 아리엘은 아무 말 없이 이안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

그러자 그가 어서 말하라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가만히 있던 그녀는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시몬드 가랑 히아트 가가.”

내 가족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

생각보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생각할 때는 심란하고 두렵게 만들었던 것들이 막상 입 밖으로 내뱉으니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에 있는 책을 향해 눈을 돌렸다.

미묘한 적막이 나와 그 사이에서 맴돌았다.

아리엘은 읽히지도 않는 줄글들을 억지로 읽어 내려갔다.

차갑게 분노한 이안의 얼굴을 맞대고 있을 바에는 읽히지 않은 글들을 눈에 담는 것이 나았다.

그가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리엘, 죽여 줄까?”

의미 없이 눈에 들어오는 글자를 흘려 읽고 있던 그녀가 종이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아니.”

“왜?”

그러자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그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툭툭 쳤다. 아리엘은 그를 보지 않은 채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여도 내가 죽일 거야.”

자신의 19년을 망쳐 놓은 수인들을 남에게 대신 죽여 달라고 할 순 없었다.

‘평생 실험체로 쓰일 뻔까지 했는데.’

그 생각에 아리엘이 와락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가족이잖아, 라는 얘기라도 하려나 했는데…’

항상 자신의 생각을 뛰어넘는 아리엘에, 그가 즐거움이 가득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원한다면 대신 죽여 줄 수도 있는데.”

그녀의 뒤에 앉은 그가 자기 쪽으로 아리엘을 끌어왔다.

‘두 가문을 멸해 줄 수 있다는 말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고?’

심지어 둘 다 꽤나 높은 귀족인데.

도대체 쟤는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쟤가 이 대륙에서 할 수 없는 게 있긴 할까.’

아리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순순히 이안에게 끌려갔다.

그가 너른 품으로 그녀를 감싸자 이안 특유의 묵직하고 깊은 향이 뒤에서 몰려왔다.

어둡지만 따뜻했다.

“…수인 핫팩.”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5쿠퍼에 절찬 판매 중입니다.

누가 반강제로 온기를 나눠 주는 백호 좀 사 가 주세요.

“아리엘 뭐라고?”

아. 여기엔 핫팩이라는 단어가 없지.

뒤늦게 깨달은 아리엘은 어느새 그녀의 손과 깍지가 껴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따뜻해.”

“누가?”

“너.”

여기 너 말고 누가 있어. 아무도 없는데.

그녀가 황당한 기분에 고개를 들어 이안을 바라봤다.

한겨울, 보일러를 틀어놓은 집에서 이불을 덮고 있는 것처럼 따스하고 편안한 기운이 마음을 꽉 채웠다. 그녀의 몸 안을 돌아다니는 훈훈한 기운에 그녀가 긴장을 풀곤 그의 손을 잡고 꼼지락댔다.

그러자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린 그가 아리엘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쓰다듬어 줘.”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그가 웅얼거렸다.

앨런이 봤으면 자기는 저런 사람 모른다고 팔짝 뛸 만한 모습이었다.

“나 요즘 힘들었는데….”

네가 날 피해서.

그가 뒤의 말은 생략한 채로 침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저런 이안의 모습을 보고 기겁할 앨런은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이안의 모습을 상당히 자주 봤던 아리엘은 천천히 그의 은색 머리카락을 만지기 시작했다.

시원하고 청량한 기운이 그의 폐부로 밀고 들어왔다. 말라비틀어져서 만지면 따끔하기까지 할 것 같았던 흙이 촉촉하게 수분을 머금어 가는 느낌이었다.

답답하게 막혀 있는 곳곳이 뚫리고 온몸의 활로가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일주일간 자신을 피해 다니는 그녀의 행동을 내버려 둔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가 갸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의 쪽으로 자신의 머리를 붙였다.

“시원해. 아리엘.”

이안이 매혹적인 웃음을 지으며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아리엘의 쓰다듬는 손길이 느려지자 그가 의문 서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더. 더 해 주세요.

깍지가 껴 있는 그의 엄지손가락이 아리엘의 손을 쓰다듬으며 재촉했다.

루이즈가 그런 이안의 모습을 알았다면 저거 다 꾸며 내는 거라며 여우가 따로 없다고 비웃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는 루이즈도 없었다.

간절하게 빛나는 그의 눈이 아리엘을 재촉하자 그를 쓰다듬는 것을 그만하려고 했던 그녀는 다시 손을 움직여 그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사그락사그락 그녀의 손에서 흩어졌다.

이안은 만족스러움에 입꼬리를 올린 채 자신을 천천히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느릿하게 그를 쓰다듬던 손길이 잠시 그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나 연애할 수 있을까.’

뭔가 그른 것 같은데.

인생 종합 연애 횟수 0번, 전생과 현생 총 합해서 태어나서 한 번도 남자와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아리엘은 문득 심란해졌다.

‘근데 저 얼굴을 보고 다른 남자들을 보니….’

다른 남자들이 심해어 같이 느껴진다는 게 문제였다.

고양이처럼 그녀의 손길을 느끼고 있던 이안은 고개를 돌려 아리엘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것이 훤히 보였다.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만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게 어딘가 보기 싫었던 이안은 자신이 붙잡고 있던 아리엘의 손등은 입술에 갖다 대었다.

‘…시원해.’

입술 안으로 들어오는 쾌청한 향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생각에 잠겨 있던 아리엘이 화들짝 놀라 그를 쳐다보자 그는 사르르 눈꼬리를 접어 올렸다.

“왜, 왜?”

손등에서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말랑한 감촉에 당황한 그녀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냥.”

그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자신의 입술에 맞댄 채 웅얼거렸다.

그가 입을 벌리며 중얼거리니 손등이 간지러웠다. 아리엘이 손가락을 살짝 움찔거렸다.

“이안, 나는 네 먹이가 아니야.”

“내가 감히 널 어떻게 먹겠어.”

“이래 봬도 맹수야.”

“그래. 아리엘은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맹수야.”

아리엘이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기 위해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움직였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보란 듯이 아리엘의 손등을 살짝 깨물었다.

‘내 손등은 먹는 게 아니라니까.’

아리엘은 아무 말 없이 붉어진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얄밉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물었다.

“왜?”

알면서 왜 묻는데.

“내 손…….”

아리엘이 말을 다 끝나기 전에 이안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손 좀.”

“더 잡아 달라고?”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뻔뻔한 대답이었다.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기 위해 몇 번 낑낑거리던 아리엘은 금방 포기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뒤로 휙 기대자 딱딱한 그의 품이 느껴졌다.

아리엘이 갑자기 뒤로 기대자 이안은 익숙하게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두 팔로 아리엘을 감쌌다.

안정감 있는 것이 등받이로 딱이었다.

아리엘이 바로 위쪽으로 고개를 들고 그의 턱을 보면서 말했다.

“이안.”

“응?”

그가 고개를 살짝 내리며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녀는 푸른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나 외박할래.”

“그래.”

처음 외출을 하기 위해 그와 대치했던 것에 비하면 꽤나 순순한 대답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어디 갈까?”

“어?”

“같이 가야지. 같이 외박하자는 거 아니었어?”

그가 한쪽 입꼬리를 매끄럽게 올렸다.

“아닌….”

그녀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그가 그녀의 귀에 조곤조곤 속살거렸다.

“동부는 저번에 가 봤으니까 제외하고, 남부는 평야가 유명한데 사자들이 관리하는 곳이라 별 볼 일 없어. 그러면 북부로 갈까?”

저 하얀색 호랑이는 나 혼자 외박하겠다는 것으로 잘 알아들었으면서 저러는게 분명 틀림없었다.

“북부에서는 아름다운 눈도 있고, 얼음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데.”

“혼….”

“참고로 혼자 가겠다고는 하지 마. 혼자 가는 거는 안 돼.”

그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아리엘이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그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예전에 말했지. 초코 식빵은 너무 약해서 어디에다 가져다 놔도 다른 수인들에게 밟힌다고. 게다가 누구나 먹을 수도 있어서 눈 깜짝할 사이 먹힐지도 몰라.”

조곤조곤 말하는 저음과는 다르게 말하는 내용은 어처구니없었다.

‘얘는 나를 개복치로 생각하는 걸까.’

조금이라도 햇빛 쐬면 죽고, 조금이라도 많이 먹으면 사망하는….

아리엘이 짜게 식은 눈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는 가장 강력한 맹수라며.”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초코 식빵으로 하자.”

“그 어떤 초코 식빵도 스스로 칼을 던지지는 않아.”

“또 그 어떤 초코 식빵도 자기가 던진 칼에 직접 맞지는 않지.”

그 말에 아리엘이 고개를 밑으로 내렸다.

“…그래도 10번 중 9번은 과녁에 맞히는데.”

“1번은 자기 자신을 맞힐 뻔하고.”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

‘지금도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잘 외출하고 다니는데 외박이라고 못 할 것까지 있나?’

아. 외박을 하긴 하지.

단지 백호와 함께하는 외박이지만.

“아리엘, 여기인 것 같은데?”

한쪽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슈엘라가 종이를 물고 있던 새에게 고마워, 라도 속삭이며 한 번 쓰다듬고는 다시 날려 보냈다.

그녀가 돌돌 말려 있는 종이를 곧게 폈다.

“아드리안 바티로 29. 트라바슈 고아원. 몰타 가주 관리인.”

다른 고아원에 비해서 겉보기에 괜찮아 보였다. 나쁘지 않은 외관에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갔다.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느긋하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신가요?”

“한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는데요.”

“아, 그러면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리엘은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리고는 그들을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1층 복도를 거닐었다. 웬만한 저택보다 조용한 고아원 1층 복도는 딱히 이상하다 꼽을 점이 없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깔끔한 응접실 내부가 보였다. 고아원임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여느 귀족가의 응접실 내부 못지않은 모습이었다.

“간단한 차와 다과를 가져오겠습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아리엘은 부드러운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하고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뭔가 이상한데.’

어딘가 찝찝했다. 무언가 중요한 부분을 놓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저 얼굴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그녀는 차에 각설탕을 하나, 둘 집어넣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

무언가 생각난 그녀가 찻잔 안으로 마지막 각설탕을 빠뜨렸다.

각설탕이 퐁당 소리를 내면서 그녀의 찻잔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에 그 미술관 사기꾼이랑 비슷하게 생겼잖아…!’

어린아이 미셸을 사칭한 그 사기꾼!

딱히 크지 않지만 작다는 느낌도 주지 않는 눈부터, 높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코, 가느다란 입술까지.

‘웃으니까 알겠다.’

눈코입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비슷했다.

화랑에서 봤던 사기꾼과 아까 그 사람.

그리고 이곳에 소속되어 있는 미셸 로비아.

뭔가 냄새가 났다.

‘이걸 어떻게 들춰내야지 가성비 있게 뒤집어엎었다고 소문이 날까.’

아리엘이 매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즐거운 고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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