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이불을 너는 힘찬 소리가 곳곳에서 났다.
“항상 여기 찾아오시는 새끼 고양이님 너무 귀엽지 않아?”
“털이 복슬복슬하고 뭐든지 다 척척 알아들으시는 게 나만의 비밀 친구라도 생긴 느낌이랄까.”
“보고 있으면 막 손이 가….”
펄럭거리는 소리들 사이에서 가장 늦게 들어온 신입 하녀의 조용한 목소리가 비집고 들어왔다.
“근데… 어딘가 께름칙하지 않아?”
그 말에 이불을 털던 하녀들의 손이 멈칫했다.
“께름칙하다니?”
“일단 검은색이잖아….”
그러나 나머지 하녀들은 방금 그녀의 말을 하나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아까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맞아. 나도 모르게 먹을 걸 건네게 되고….”
“그 고양이님 너무 귀여워서 콱 깨물어 버리고 싶어….”
한 하녀가 가장 늦게 들어온 하녀를 힐끗 보고는 말을 이었다.
“깨물어서 자국 남았다가는….”
“…….”
하녀들 사이에서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자국이 안 남게 깨물면 되지 않을까.”
“어떻게 그래…!”
“그랬다간 네 머리가 더 이상 네 머리가 아니게 될 수도 있을걸.”
“하긴. 가주님이 엄청 아끼시잖아. 나는 가주님의 그런 눈빛 처음 봤어.”
“눈만 봐도 고양이를 위해 주는 마음이 넘쳐흐르시더라.”
가주님이 아끼는 고양이라니.
그제야 자신이 뭔 말을 했는지 깨달은 하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녀 옆에 있던 하녀가 작게 속삭였다.
“너는 앞에서 다른 하녀들이 고양이님이라고 칭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야?”
어떻게 이렇게 눈치가 없을 수가. 라고 타박하는 듯했다.
이불을 높게 들어 올리고 있는 하녀의 손이 점점 내려갔다.
이불이 바닥에 끌릴락 말락 하는 정도로 그녀의 손이 내려갔을 때, 옆에 있던 하녀가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네 편협한 시각에만 빠져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면 차라리 지금 저택에서 나가는 것이 목숨 보전에 이로울걸.”
그건 아리엘이 오기 전부터 카델리온에서 일했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었다.
“지금이야 아리엘 님이 계셔서 저택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고 하지만, 예전이었다면 너는 이곳에 없었을 수도 있어.”
그녀가 탈탈 털은 이불을 낑낑거리며 빨랫줄 위에 던졌다.
“그리고 입조심 좀 하고 다니고.”
그렇게 둘이서 심각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다른 하녀들의 이야기는 한참 무르익어 갔다.
“맨날 찾아와 주시는 게 아주….”
“애니멀 테라피라는 것이 이런 걸까요?”
“근데…….”
주위를 둘러본 그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쯤 되면 항상 있던 검은색 고양이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요 며칠간 오시질 않으시네요.”
그러자 옆에 있던 하녀들이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자꾸만 드는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이 자꾸만 아리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쉽게 티가 난다고, 하녀들은 언제 아리엘이 오나 그 자리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아리엘은 그들이 일을 끝마칠 때까지 오지 않았다.
***
목검으로 나무 인형을 내리치고 있는 기사들에게 기사단장이 엄격한 목소리로 추가훈련을 시켰다.
“전원 목검 내려치기 20번 더 한다. 실시.”
그 말과 함께 연무장에 있던 기사들의 손이 일제히 올라갔다가 목각인형을 향해 빠르게 내려갔다.
요즘 아리엘이 많이 늘었다고 루이즈에게 칭찬받고 있는 내려치기였다.
‘추가로 스무 번 더 시켜야 하나.’
이제 아리엘 님이 올 시간이 거의 다 되었으니 기사들의 내려치기를 더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기사단장은 앞에 있는 기사들을 조금 더 굴릴 생각을 하며 곧 올 새끼 고양이를 기다렸다.
기사들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목검을 내리치는 파열음이 연무장에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내려치기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기사들이 아닌 척 옆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지금쯤이면 저기 계단에 앉아서 박수 치고 계실 때인데.’
그러나 아리엘은 기사들의 내려치기가 스무 번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저택에 묘하게 긴장감이 감돌 때부터 아리엘 님이 오시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우직하게 기사들을 훈련시키던 기사단장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
‘이 창문은 아치형으로 현재 있는 이 각도에서 가장 많은 빛을 저택으로 들어오게끔 하도록 설계되어 있군.’
총괄 집사는 창문 앞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 창문 옆, 벽에 걸려 있는 액자 또한 대륙의 보물 급인 액자였다.
‘이곳에서 얼마나 배울 게 많은데….’
이곳 하나하나가 카델리온의 역사이자, 예술품의 미(美)나 다름없었다.
원래 역사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닌, 사소한 것에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도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사소한 부분을 신경 쓰면서 탄생하는 것이고.
아리엘은 가끔씩 자신의 앞에 앉아서 집사 일에 대한 은근한 하소연과 함께, 다양한 건축 양식과 이 저택에 얽힌 역사들에 대해서 듣곤 했다.
‘여태까지 이 이야기를 들어준 수인이 북쪽 저택에 있는 쌍둥이 밖에 없었는데.’
복도를 걸어가던 총괄 집사는 회환에 잠긴 눈빛으로 이리 와 보라며 자신의 앞자리를 팡팡 치던 아리엘을 떠올렸다.
‘요즘은 잘 오지 않으시니….’
그때 앞에서 걸어가던 이안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던 총집사는 얼른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아리엘은 어디 있지?”
“공용 서재에 계십니다.”
‘이번으로 일주일째시군.’
그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앞에 있는 이안을 바라봤다.
이안은 정확히 가신들과 정기 회의를 가진 다다음날부터 아리엘의 거취를 물어봤다.
집무를 보다가 갑자기 불러내어 물어보기도 했고,
“아리엘은?”
“침대에 누워 쿨쿨 자고 계십니다.”
연무장에서 검을 연습하다가 불러내기도 했고,
“털 뭉치는?”
“자기 방에서 무언가 끄적끄적 그리고 계십니다.”
단지 어딘가로 이동하다가 그 고양이를 찾기도 했다.
“새끼 고양이는?”
“연무장에서 검을 던지다가 과녁에 명중시켰다고 합니다.”
오늘 하루만 해도 벌써 다섯 번째였다.
그리고 어느덧 아리엘이 이안을 피해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지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 일주일 동안 이안은 아리엘의 행방을 물어보기만 할 뿐, 그녀가 있는 곳에는 가지 않고 있었고.
덕분에 고용인들은 중간에서 피 말리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총괄 집사로서 고용인들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왜 아리엘 님께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러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냥.”
그는 자신에게 머리카락 한 올 비추지 않으려고 답지 않게 그를 피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아리엘을 떠올렸다.
‘다람쥐가 도토리를 모으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만 먹으면 그가 언제든지 그녀를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그렇게 빨빨거리면서 열심히 돌아다니는 모습이….
“우습잖아.”
그가 눈을 휘었다.
날로 발전해 나가는 주먹지르기를 날리면서 반항하던 아리엘이 자신을 피하는 것도 나름대로 하찮고 웃음이 나오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가슴이 뻐근한 느낌을 들게 하고 놓아주고 싶지 않은 마음과 함께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리엘이 자신을 피한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절벽에서 와르르 떨어져 내리는 돌에 맞은 것처럼 기분이 진창으로 떨어졌다.
‘왜 피하는 걸까.’
이제 이런 숨바꼭질도 슬슬 끝내야지.
매끄럽게 올라간 이안의 입매가 삐딱한 웃음으로 변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안 님이 잘못하신 거군.’
아리엘이 오고 나서 눈에 띄게 활기를 되찾았던 저택은 예전처럼 점점 딱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않고 그들을 찾는 아리엘이 어느 순간부터 발길을 뚝 끊어 버린 것이다.
전처럼 고용인들은 하나둘, 쥐 죽은 듯이 조용히 다녔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이안의 동선과 겹치지 않도록 조심히 다녔다.
“아리엘이 공용 서재에 있다고?”
“그럼 그쪽으로 가지.”
“네. 가주님.”
***
『어디에서나 잘 자라지만 쓸데라곤 하나도 없는, 유칼리브 나무보다 더 쓸모없는 것은 없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유칼리브 나무는 생각보다 놀라운 쓰임을 가지고 있다.』
‘이런 일지 같은 책은 처음인데.’
게다가 찍어내서 출판한 것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적은 책이라니.
『유칼리브 나뭇잎과 마물의 체액을 일정한 비율로 섞어 피부에 바르면 피부가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몇 명의 다른 사람들에게 이 실험을 해 본 결과, 모두 다 문제없이….』
나는 평소 보던 수인의 언어와는 다르게 괴이한 언어로 쓰여진 책을 손으로 슬쩍 밀고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먼지가 수북이 붙어 있는 책이 느리게 밀리자 바닥에 먼지 자국이 남았다.
‘글을 너무 많이 읽었더니 난독증에 걸린 게 아닐까.’
이제 글이면 무엇이든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용케 지렁이가 춤추는 것 같이 쓰여진 저 괴이한 글자를 똑바로 알아보고 읽을 수 있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전생 찬스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건가.’
그건 쫌 좋은데.
엑스트라여도 뭐든 잘하는 엑스트라가 좋긴 하지.
주는 능력은 거절하지 않는 것이예의다.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아먹는 것이지.
아리엘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거리면서 눈을 끔뻑거렸다.
‘일단 생각 없이 무작정 이안을 피하긴 했는데….’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찾으러 올 수 있겠지.
현재 그도 내 장단에 적당히 맞춰주고 있는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상식적으로 나를 죽이겠다는 사람과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다른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자기를 죽이겠다던 사람 앞에서 태연하게 있을 수가 있는 거지?’
복수고 뭐고 일단 같이 얼굴 맞대고 보는 것도 껄끄러운데.
이안이 나를 죽이겠다고 말했던 그날 이후로, 내가 고용인들에게도 가지 않은 것은 그 이유가 컸다.
‘내가 숨죽인 듯이 다녀도 카델리온은 똑같이 굴러가던데.’
원래 카델리온은 내가 없는 곳이었으니까.
뭔가 변화가 있기를 바란 게 웃기는 일이었다.
나는 바닥에 코를 박고 보던 책을 질질 끌고 왔다.
‘전에 암살자를 보낸 건 분명 시몬드나 히아트 짓일 텐데.’
분명 원작에서는 나에 대한 이야기는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하긴 어떤 원작이 엑스트라 가문의 과거사를 자세히 풀어 줄까.
‘원작대로 진행되었다면 이안만 조심하면 되는데…’
이안도 그렇고, 시몬드 가문이랑 히아트 가문도 그렇고 어째 원작보다 위협이 더 많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한 것도 없는데 왜 적만 많은 걸까.
“와. 얘도 날 죽이려고 하고 쟤도 날 죽이려고 하고…….”
하하하. 인생 너무 아름답다.
내가 멍때리면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리엘, 다시 말해 봐. 누가 널 죽이려고 한다고?”
그때 바로 뒤에서 심상치 않게 가라앉은 저음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