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 (88/111)

87.

‘이안이 내가 왔다 간 걸 눈치챘을까.’

사무실 위에 있는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올린 아리엘이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안 죽일 거라고 믿었는데 자만이었던 걸까.’

혹시나 해도 믿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나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존재라던가.

‘그래도 우리가 개미 눈곱만큼은 친해진 줄 알았는데.’

아리엘의 머릿속에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제 일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늦은 밤, 돌아오지 않는 이안에게 꽃을 가져다줄 찰나, 문 앞에서 중요한 이야기가 들렸다.

그녀가 가장 알고 싶어 했던 이야기였다.

“……시몬드 가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집무실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는 기척을 죽이곤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언젠가는….”

꿀꺽, 그녀도 모르게 목에 침이 넘어갔다.

그래도 살려 주지 않을까.

그에게 잡혀온 지 몇 개월이 지나고 있는데 그간 지난 봐 온 정을 봐서라도….

‘죽였으면 예전에 죽였겠지.’

그녀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온 신경을 기울여 집무실에서 나올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다 죽여야지.”

그러나 돌아온 것은 놀랍도록 싸늘한 목소리였다.

그녀의 희망을 와장창 부숴 버리는.

그녀의 손이 빠르게 식기 시작했고, 깨져 버린 희망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후볐다. 다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리엘 님은….”

그 뒤에 나올 말이 무서웠던 그녀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릿속이 하얘진 채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으음… 그럴 수도 있지. 숨겨진 사연이 있을 수도.’

죽이라면 죽여 보라고 해.

나는 살 거다.

‘여기서 가만히 박혀 있으면 돼.’

거슬리지 않게.

처음에 자신을 죽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좌절감이 그녀를 덮쳤다. 그다음에는 허무감 속에서 버둥거렸고, 시간이 지나자,

‘봐 온 정이라도 있지!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게 죽인다고 할 수 있어!’

그것은 분노로 바뀌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는 원래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종국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체념의 경지에 올라섰다.

“흐음… 애가 왜 이렇게 축 처져 있지. 아리엘 무슨 일 있었어?”

“어.”

머리 위에서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이 힘없이 툭 떨어졌다. 소파에서 내려온 한쪽 팔이 달랑거리면서 흔들렸다.

그녀는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클로에와 슈엘라가 질문하기 시작했다.

“아리엘 님, 너무 귀여우세요.”

“어.”

“아리엘, 나가서 음료수 사 와도 되지?”

“어.”

“아리엘 님. 업무의 반 정도는 아리엘 님이 처리해 주실 수 있나요?”

“어.”

“아리엘 님, 카델리온 가 가주에게서 만나자는 서신이 왔는데요. 상단주님과 만나고 싶대요!”

‘카델리온…?’

무슨 카델리온…?

‘카델리온은 이안이 가주잖아.’

그와 동시에 아리엘이 용수철처럼 소파에서 튀어 올랐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그녀가 클로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의 눈빛처럼 명료한 눈빛이었다.

“어머나? 카델리온 가주라면 어떻게든 우연을 위장해서라도 영애들이 닿고 싶어 하는 그분 아니야?”

슈엘라가 굽이치는 하늘색 머리를 쓸어넘기며 눈이 가늘어졌다.

가늘어진 눈이 흥미로움으로 반짝거렸다.

“만인에게 친절하다는 평을 받던데.”

팔짱을 낀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흐음… 근데 그 가주가 우리에게 서신을 쓸 일이 뭐가 있어?”

“그니까….”

아리엘이 중얼거렸다.

“너 혹시 알고 보니까 카델리온 가주랑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아니야.”

있는 줄 알았는데 나 혼자 김칫국 먹은 거였지.

아리엘이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슈엘라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떼지 않으며 아리엘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쏟아지는 슈엘라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지금 수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은 이안 카델리온이 만나자는 서신을 직접 쓸 만큼의 상단은 아닌데.

이안 카델리온이 도대체 왜 펠릭스로 서신을 보내는 걸까.

이안 카델리온 때문에 복잡하게 엉켜 있는 실들처럼 머릿속에 배배 꼬였다.

아리엘은 머릿속에서 꼬여 있는 실타래들을 통째로 머릿속 어딘가로 던져 버린 채 클로에에게 말했다.

“카델리온 가주라면 어차피 만나야 했어.”

그녀가 털썩하고 소파 뒤에 기대 누웠다.

‘원작의 흐름대로 가는 건가? 나는 이렇게 죽고, 클로에는 카델리온의 저택에 가게 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려는 생각들을 애써 잘라 냈다.

“클로에, 이번에 상단 건설하는데 마정석이 필요하니까 마정석을 얻어와 줄 수 있어?”

“네? 상단주님이 아니라 제가요?”

서신에서는 상단주님이 오길 바라는 것 같은데….

클로에가 말끝을 흐렸다.

“응. 어차피 대외적으로 활동할 건 너잖아.”

게다가 괜히 이런 복잡한 상태로 만났다가 생각이 일일이 간파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지금 이 상태로 이안을 만났다가는 그의 한 입 거리도 안 될 것이다.

‘눈 뜨면 그 호랑이의 배 속일 수도.’

그러면 호랑이 배 속에서 헤엄치는 건가.

‘하지만 클로에라면 할 수 있어.’

원작을 생각해 보면 클로에는 적어도 한 입 거리는 아니었다.

‘우리 클로에가 귀엽게 생겨서 똘망똘망한 데다가 또 당차서 할 말은 다 한단 말이지. 맞고 다닐 성격도 아니고. 오히려 배시시 웃으면서 때리면 때렸지.’

책상에서 일을 하고 있는 클로에를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는 아리엘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만약에 원작처럼 저택에 갇혀 버리면…?’

아니야. 그러면 루이즈에게 부탁해서든 어떡해서든 책임지고 그 저택에서 빼내어 주면 돼.

클로에의 탈출을 도와줬던 수인들의 목이 다 날아간 원작과는 달리 루이즈가 있으니까 내 목은 괜찮지 않을까.

‘이안이 날 죽이려고 해도 루이즈가 한 번은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도와달라고 하면 돼.’

왠지 모르게 목 언저리가 서늘해지는 느낌에 아리엘이 목 주위를 더듬었다.

***

카델리온가의 응접실 안.

카델리온의 이명이 얼음의 창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듯 응접실은 하얗고 푸른 조각같이 생긴 샹들리에가 높이 달려 있었다.

“펠릭스 대표님께서 이곳에 오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그가 서신을 보내 이곳에 온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이안이 사르르 웃음 지었다.

차가웠던 그의 눈매가 곱게 휘었다.

“카델리온 가주님의 초대를 받았으니 당연히 가야죠. 초대받은 것만으로 영광 아니겠습니까.”

“사교계에서 펠릭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돌고 있더군요. 그리고 대표님 이야기까지도.”

호의적인 의견이 대부분이었으나, 개중에는 대표의 신분이 어떤 신분인지, 무얼 하던 사람인지에 대해 의혹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막 데뷔를 한 수인이 관심을 받는 것이랑 마찬가지인 거지요. 원래 관심이 가는 수인에 대해서는 하나둘, 알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 본 듯, 클로에가 익숙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응했다.

그가 찻잔을 들고 우아하게 차를 한 입 목으로 넘겼다. 찻물을 삼키는 동안 그의 목젖이 위아래로 울렁거렸다. 그가 찻잔을 달칵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펠릭스 상단의 일부를 카델리온이 보증하겠습니다.”

“아하, 대신의 상단의 일부 지분을 달라고 하시는 거군요?”

정확한 클로에의 말에 이안 카델리온이 빙긋이 웃음 지었다.

원래부터 상단을 운영하는 귀족들은 더 높은 귀족들의 ‘보증’을 받고 싶어 했다.

‘보증’을 해준다는 것은 그 상단의 일정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괜찮은 상단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니까.

그런 보증을 받으면서 귀족들에게 신뢰를 얻는 것이다. 자신들의 상단이 이런 귀족들이 보증할 만큼 좋다, 라는 인식.

만약 고위 귀족에게 보증을 받게 된다면 신분에 대한 의혹이나 과거에 무얼 했던지에 대한 것은 상관이 없어진다.

이미 고위 귀족이 보증을 했으므로. 어떤 가문이 보증한 상단에 대한 좋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보증한 가문의 안목을 의심하는 거나 틀림없었다.

그리고 지금 클로에는 몰락 귀족이었다.

평민들보다도 더 못 사는 몰락 귀족.

클로에가 분홍색 눈을 동그랗게 뜨며 찻잔을 쥐고 있던 엄지손가락을 살짝 삐끗했다.

“제안은 감사드리나… 저희 상단에게는 너무 과분한 제안 같습니다.”

그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럼 지분 없이 카델리온의 보증만 받는 것은 어떻습니까?”

느른하게 웃는 그의 표정에서 먹잇감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숨어 있었다. 차가운 눈이 아름답게 휘어지자 부드러운 분위기를 내었다.

그러나 그 느슨한 행동에서도 위압감이 존재했다.

‘…카델리온의 보증을 받는 것은 아리엘 님과 이야기를 해 보지 않았는데.’

하지만 평소의 아리엘의 태도를 보아 홀로서기를 하고 싶으셨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카델리온의 보증도 꺼리실 터.

상단이 홀로 당당하게 빛나는 그 위치에 가려면 보증을 받아선 안 되었다.

‘게다가 보증을 받게 된다면 카델리온이 펠릭스를 저버렸을 때의 피해는 상상도 할 수가 없어.’

그럼 호랑이의 손에 제 목을 쥐여 주고 그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린 그녀가 그 웃음 뒤에 있는 눈동자를 쳐다보곤 속으로 흠칫 놀랐다.

매혹적인 눈꼬리 뒤에 숨어 있는 것은 날카롭게 그녀를 재고 있는 눈동자였다.

‘도대체 누가 카델리온 가주께서 만인에게 친절한 가주라고 한 걸까.’

그건 정말 앞에 있는 빼어난 외모에 홀려 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꼿꼿이 앉아 견디고 있는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과분하신 제안에 감사드리지만, 생각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가 짐짓 슬픈 표정을 지었다.

“나름 기대했었는데, 혹시 카델리온이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었던 겁니까…?”

“아닙니다.”

클로에가 부드러운 분홍색 눈을 단호하게 떴다.

“그럼…?”

이안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것이 그의 거짓된 모습이라는 걸 알아챈 클로에의 입안이 바싹 말라갔다.

“단지 펠릭스에겐 너무 과분한 제안이라, 이 자리에서 결정하긴 어려워 나중에 말씀드리겠다고 한 것이었습니다.”

‘아아. 한 마디로 돌려서 거절하겠다는 뜻이군.’

냉소적인 생각을 능숙하게 숨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거는 가능할까요?”

“무엇 말입니까?”

“펠릭스 상단이 중앙 도시에 건물 두 채를 매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점점 말라가는 입안에 클로에가 차를 한 모금 머금으며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채는 상점이고 한 채는 사무실이겠지요. 만약, 다음 상점을 낼 계획이 있으시다면….”

이안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다음 상점은 무조건 북부에 내어 주실 수 있을까요?”

권유형인 문장이었으나 권유가 아니었다.

더 거절하면 실례일 수밖에 없는 상황.

이미 카델리온 가주의 제안을 두 번이나 거절한 클로에의 입장에서는 들어줄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잠시 가만히 있던 클로에가 입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안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처연하던 표정은 어디 갔는지 그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대신,”

태연한 척하던 클로에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소리를 내며 찻잔 위에 안착했다.

“마정석 100개를 제공해 주실 수 있을까요?”

“마정석 100개라….”

이안의 눈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클로에는 두 손을 포개놓았다. 앞에 있는 수인의 위압감 때문에 덜덜 떨리고 있는 밑의 손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흔들림 하나 없었다.

“5,000골드에 마정석 100개를 구입하겠습니다.”

“이런, 원래 2만 골드짜리를 5,000골드에 구입하시겠다뇨.”

고저 없는 목소리가 응접실을 울렸다.

그러자 클로에가 입을 뗐다.

“비싼 사치품을 북부에서 팔게 되면 카델리온에서는 세금을 많이 걷지 않습니까. 게다가 몇 없는 펠릭스의 매장에 방문하기 위해 수인들이 북부에 더 많이 방문할 수밖에 없을 테고, 그 정도면 1만 5,000골드의 경제 효과가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것이 이안이 의도한 거였다.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그럼 1만 골드로 가시죠. 그 아래는 양보 없습니다.”

“네. 좋습니다.”

어느덧 대화는 마무리할 기미가 보였다.

이안이 일어서자 클로에도 따라서 일어섰다.

“아. 상단주님.”

클로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부드러운 벚꽃 같은 핑크색 눈이 크게 뜨여진 상태였다.

“다음번엔 진짜 상단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마치 클로에가 상단주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는 말투.

그 말을 들은 클로에는 다리에 못이 박힌 듯 가만히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여전히 표정 하나 안 바뀐 상태로 생긋 웃었다.

“그게 1만 골드에 내어 드리는 조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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