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 (87/111)

86.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 있는 자의 오만한 말투였다.

언제든지 그를 한입에 삼켜 버릴 수 있는,

마치 네까짓 게 기어 올라와 봤자, 자신과 털끝도 닿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자의 말투.

그리고 그런 그 앞에 한낱 피식자가 된 그의 뇌가 새하얀 물감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포식자로 태어나서 한 번도 두려움을 경험해보지 못한 자가 본능적으로 가지게 된 공포였다.

“아, 이해해 주게. 자네들 말마따나 내가 교육을 잘 못 받았지 않았나.”

단검을 뽑아낸 그가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검집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려다가 실수로 칼이 앞으로 나간 것이니 이해해 주기를 바라네.”

‘기선 제압이 필요하다지만 이런 식으로까지 기선 제압을 하실 줄은….’

하긴, 주군의 정신 나간 행태가 한 두 번인 것도 아니고.

혼자서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 앨런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 어린 표정이 되었다.

이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란 표정이 각각의 가신들에게서 여실히 드러났다.

하긴, 외적인 자리에서의 그의 이미지는 ‘만인에게 친절한 자’였으니까.

이안은 그런 생각에 헛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모두에게 친절한 사람은 없는 법이지. 안 그래?”

왜 다들 힘이 없으면 자기들 멋대로 휘두르려고 하는 건지.

제 주제도 모르고.

예나 지금이나 수인은 변한 것이 없었다.

다 똑같이 증오스러웠다.

“카드에 앞면이 있으면 뒷면도 있듯이, 사람들은 다 제각각인 거야.”

일순 그의 눈에 증오가 차갑게 얼어 맺혔다, 그리고 그는 익숙하게 눈꼬리를 예쁘게 휘며 그것을 눈웃음 뒤로 감추었다.

“모르타 가주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지 않아? 손가락이 참 길고 곱던데.”

카드 섞기 참 좋겠어.

그에 모르타 영주의 얼굴이 손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카지노의 일은 어떻게 아시는 거지.’

분명 새로운 카델리온의 가주는 영주들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다고 그렇게 믿어 왔다.

그렇기에 가주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근 몇 달 동안 불법 도박장의 일을 더 키워 왔다. 그리고 불법 도박장에서 들어오는 돈은 그의 유용한 수입원이 되어 주었다.

가주가 되고 나서 1년이 넘도록 한 번도 다른 가신들을 저택 안에 불러들인 적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이 회의도 그냥 정해진 것이라 억지로 진행하는 줄 알았는데.

분명 스물도 되지 않은 가주가 이리저리 끌려다닐 줄 알았다.

‘근데 모든 영주들의 이런 일들까지 다 안다고?’

입에 풀칠이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굳어 있는 그의 입술과는 다르게 머릿속은 이리저리 돌아갔다.

‘그럴 리가 없지.’

그리고 곧 그가 단정 지었다. 그가 옆에서 새하얗게 질린 스판 영주를 힐끗 쳐다보았다.

‘쯧,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에게 겁을 집어먹을 정도로 저렇게 심약해서 영주 노릇을 어떻게 할까.’

회의를 하러 이곳에 참석해야 했던 게 아니라, 요양원에 가야 했었던 것이 아닐까.

못 미더운 스판 영주의 행동에 당시 어떤 영주들보다 가장 이익이 되어 줄 거라 생각해서 체결했던 군사 협정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영주랑 맺었을 거늘.’

수장의 행동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자신이었다면 이렇게 앞에서 대놓고 경고를 하기보다는 뒤에서 은밀하게 없애 버렸을 것이었다.

“수인들의 생각에 따라 다 다른 거겠죠. 카드의 앞면과 뒷면이 똑같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불량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던가.

모르타의 가주가 유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것이 앞에 있는 수장의 미숙함이었다.

‘혹시 모르니 카지노 규모를 살짝 줄이고….’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옆에 있는 가신들 역시 당황스럽긴 매한가지라 갈 곳 잃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회의장 안에 삭막한 적막이 감돌자 만족스럽다는 듯한 웃음을 흘린 그가 다정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아리엘 이번에는 또 누구를 닥치게 해 볼까?”

앞에 있는 가신들의 시선이 새끼 고양이에게로 몰렸다.

‘내가 언제 다른 수인들 입 다물게 해 달라고 했어.’

나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 듣고 있었는데.

어이없음으로 내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

유독 칠흑같이 캄캄한 밤, 닫혀 있는 문틈 사이에서 불빛이 복도로 미세하게 새어 나왔다.

워낙에 고용인이 없었던 3층 복도는 수인의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자고 있을 늦은 시간, 이안과 앨런은 집무실에 단둘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마물들이 등장하는 흐름이 불규칙하여 자신들에게서 거둬들이는 세금을 줄여 달라고 영주들이 요청했습니다.”

앨런은 수첩을 보고 회의에서 있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이안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멋이었다.

앨런이 폼으로 들고 다니는 그 수첩에는 이안이 차차 풍비박산 내버릴 것이라고 예상되는 가문들의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앨런은 꿋꿋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다시피 한 수첩을 보고 이안에게 계속 보고를 이어 갔다.

“특히 세금 감면을 요청한 지역은 스판, 애시, 웨스페라 등이 있습니다.”

“그들 다 서쪽 지역의 영주들 아닌가?”

“네 맞습니다.”

“그러면 둘 중 하나란 이야기인데. 서부 지역 영주들이 연합을 했거나….”

“아니면 북부 설산 쪽에만 내려오던 마물들이 실제로 나타났을 경우죠.”

사실상 북서부의 군사는 멋이나 다름없었다.

근 100년이 넘도록 북부 설산의 마물들은 서부 쪽으로 한 번도 넘어온 적이 없었다.

“앨런, 루이즈가 북부에 가지 않았나?”

지금 그녀는 이안의 명을 받고 북부 마물들의 상태를 보러 설산으로 떠난 상태였다.

아리엘이 있어서 이번에 유독 저택에 오래 머물렀던 것이지 그녀는 원래 북부의 설산을 카델리온의 저택보다 더 자신의 집같이 느껴질 것이다.

원래 그녀는 마물의 동태를 보고하러 올 때만 잠깐 오지, 그때를 제외하면 그녀는 저택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북부의 수문장’답다고 했으나 이안이 보기에는 그녀에겐 이곳이 불편한 것이었다.

원래는 카델리온의 모든 것이 그녀에게 안배되어 있었으니까.

‘루이즈 대신 내가 설산에 갔다 왔어야 했나.’

마물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보고 루이즈를 보냈으나 어딘가 모르게 찜찜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서부의 마물이라니.’

이안이 턱을 비스듬히 괴며 입을 열었다.

“동부 쪽에서 연락 온 것 없어?”

“곧 전령을 보낼 거라는 말 외엔 없었습니다.”

‘마물 관련된 것들은 굳이 주고받지 않아도 잘 팔리니까.’

따지고 보면 교환할 수 있는 게….

“펠릭스 상단은?”

“현재는 제안서를 보내 놨습니다.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아무도 만나고 있지 않다고 하는데요.”

“한 번 얼굴 보기 참 힘드네.”

그가 중얼거렸다.

“아, 이안 님 가신들에겐 왜 자비를 베푸신 겁니까?”

수첩을 뒤적거리던 앨런이 어느 한 곳에서 손을 멈췄다.

저였다면 다 죽여 버렸을 텐데요.

뒤의 말은 생략한 채였다.

주군의 꽃 같은 미소에 넘어가지 않는 앨런은 회의 때 가신들을 향해 짓는 눈웃음 그 뒤에 얼마나 차가운 증오가 얼어 맺혀 있는지를 봤었다.

‘어차피 초반에 가신들을 눌러 놓으실 거면, 못 배웠다는 핑계로 몇 명을 베어 내는 것이 더 쉽지 않나.’

앨런의 시선이 수첩 한 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는 이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것은 그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을 뿐, 이안 님의 대답을 꼭 들어야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팔락팔락, 그렇게 마지막 수첩의 종이가 넘어간 소리가 울려 퍼진 지 꽤 되었을 때, 매끄러운 중저음 목소리가 조용한 집무실에 울렸다.

“…새끼가 있었잖아.”

그 말에 수첩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던 앨런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안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새끼 고양이가 있었잖아.”

그가 아리엘과 약속했던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리엘 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이안이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이곳에 들어올 새끼가 누가 있을까.”

“그건 그렇죠.”

이안이 입매를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원래 새끼 고양이들에겐 좋은 것만 보여 주는 거랬어.”

“그런 건 어디서 보신 겁니까.”

그러자 그가 서랍에서 연분홍색 커버의 책을 꺼내 들어 올렸다.

<우리 집 새끼 고양이의 마음 얻기>

책 제목을 본 앨런은 할 말을 잃었다.

“그것 때문에 안 죽이셨다…는… 겁니까?”

자신이 아는 주군이?

그 무엇보다 수인에 대한 증오심이 깊게 배여 있고 그 누구보다 냉철한 자신의 주군이?

자신이 할 일이 틀어지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주군이,

그들의 약점이 되는 정보를 허공에 날려 보내면서까지?

‘유독 이안 님께서 아리엘 님께 집착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는 꼭 자신의 페로몬을 매일 그녀에게 묻혀 놓았다.

마치 제 거라는 듯.

그 페로몬은 아리엘 주변만 가도 마치 성내는 것처럼 넘실거렸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것을 넘보지 말라는 포식자의 경고였다.

예전부터 아리엘 님이 이안 님의 페로몬을 두르고 저택을 이리저리 쏘다닐 때부터 그건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리엘 님이 있어서 안 죽이셨다고?’

첫 만남에선 아리엘 님 바로 뒤에 있던 수인을 망설임도 없이 죽이셨던 분이?

근데 이건 그냥 집착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거 아닌가.

의미 없이 수첩을 넘기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때 앞에서 주군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마 나에게 잘 보이고 싶거나 머리가 똑바로 있는 이들이라면 내가 말한 내용을 듣고 시정하거나 하던 것들을 다 엎겠지.”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다면 ‘바꾸는 척’만 할 테고. 그건 그때 가서 없애고 다른 사람을 앉혀 놓으면 되는 부분인데,”

다 죽여 버려서 굳이 번거롭게 일만 늘릴 필요 없잖아.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앨런을 느른히 바라보며 말했지만, 앨런은 어딘가 이안 님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이안에게 물어봤다.

“그럼 시몬드 가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언젠가는….”

아리엘이 시몬드 가문의 족보에 올라와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한 명확한 증거가 나오는 날이 오면,

“다 죽여야지.”

놀랍도록 싸늘한 목소리였다.

안에서 들리는 싸늘한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때, 집무실 문밖 복도에 꽃 한 송이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리엘이 들고 있던 꽃이었다.

그것을 들은 그녀는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도 몰랐다.

“아리엘 님은….”

거기까지만 들은 그녀가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듯 발걸음을 돌려 뜀박질했다.

뛰어가는 소리 없는 발걸음 소리가 공중에 부스스 흩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붉은 꽃잎들이 그녀의 발에 짓밟혔다.

집무실 앞의 복도는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제외하고는 원래의 복도로 돌아갔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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