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이안이 서늘한 미소로 앞에 있는 수인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아리엘을 향해 말했다.
“아리엘, 혹시 회의장이 너무 시끄럽지는 않았어? 특별히 시끄러웠던 수인 있으면 가리켜 봐.”
그 말이 끝나자 꼴깍, 앞에 가신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내가 들은 소리는 꿈에서의 모깃소리밖에 없는데…?’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안이 내 앞발 사이에다가 만년필을 끼워 넣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 있으면 이 만년필을 날려도 되고.”
몇 명은 만년필 맞아도 안 죽어.
그가 내 귓가에 조곤조곤 속삭였다.
나는 당장이라도 툭 떨어질 것같이 내 앞발에 힘겹게 기대고 있는 만년필을 바라보았다.
앞에서 앨런이 ‘힘내십시오. 아리엘 님.’ 하며 불끈 손을 쥐는 것이 보였다.
만년필을 끌고 가다시피 걸어간 나는 이안의 종이 위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한구석에다가 무언가를 그렸다.
혀를 내밀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나 놀려…?’
자고 일어났더니 던지라며 새끼 고양이에게 만년필을 쥐여 주는 어이없는 상황은 무엇일까. 어느덧 졸음에서 완전히 깨어난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맨 위에 있던 종이 한 장이 옆으로 치워졌다.
“자, 여기다가도 그려봐.”
“자, 그러면 또 얘기하실 분 계신가요?”
그러자 앨런이 익숙하게 자신의 주군에게서 최대한 눈을 돌리며 회의 진행을 하기 시작했다.
“이안 님도 이제 혼기가 차셨으니….”
“이제 카델리온에서도 슬슬 후계자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물꼬를 텄다.
이곳에서 결혼 적령기는 남자는 18살부터 26살, 여자는 18살부터 24살이었다. 올해 봄 열아홉이 된 이안은 한창때의 결혼적령기였다.
지금의 그는 대륙에서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서 빨리 결혼을….”
“저희 가문의 영애는 어떠십니까?”
‘카델리온의 안주인으로 내 딸을 밀어 넣고 아무것도 모르는 저 아이를 대신해서 내가 대신 카델리온을 삼키면….’
모두가 공통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안이 알았더라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데 무슨 미래를 그리고 있냐며 코웃음 칠 생각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카델리온 가의 안주인으로 자신의 딸들을 밀어 넣고 싶은 작자들이 하나둘, 발언하기 시작했다.
한참 회의를 빙자한 가신들의 탐욕 채우기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이안의 종이는 아까 그 종이를 빼놓은 것을 제외하면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
‘이거 필요한 거 아니야? 저렇게 따로 빼도 되는 거야?’
아리엘은 의문 어린 표정으로 종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상한 대답을 했다.
“아리엘의 성장 일기에 넣어 놓게. 보관해 놔야지.”
뭐?!? 그런 것도 쓰고 있어?
상상치도 못한 말에 내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생후 100일도 안 된 것도 아니고 다가오는 겨울만 지나면 20살인데….’
성장 일기라니.
‘분명 쟤 내 인간화 모습 봤는데…!’
그래도 성장 일기를 쓰고 싶나.
‘아니 자기 일기나 쓸 것이지, 남의 성장 일기는 왜 쓰는데!?!?’
“아리엘, 혹시나 해서 그런 건데 너 설마 나를 남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맞는데.
제대로 놀랍도록 정확한 추측에 내 꼬리가 움찔하고 떨렸다.
“너와 내가 남이었던 거야…?”
‘그럼 너와 내가 그럼 무슨 관계인데…?’
아리엘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책 속의 주인공과 독자?
납치범과 인질?
장기 투숙객과 저택 주인?
그것도 아니면 선생의 동생과 누님의 제자?
‘생각해 보니 한 번은 짚고 넘어갈 문제였던 것 같은데.’
자신이 이안에게 빚진 건 많았다.
근데 이안은 뭣 하러 그렇게까지 나에게 잘해 주려고 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죽이려고도 했으면서.
‘상성 페로몬이어서 그런가.’
“나는….”
이안의 입이 떨어지자마자 그를 향해 질문이 날아왔다.
“가주님, 이에 대한 가주님의 의견을 구합니다.”
그니까, 너 지금 우리 말 잘 듣고 있냐는 것이었다.
이안이 고개를 들어 앞을 봐 그 말을 한 사람의 얼굴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가신들의 우두머리 중 하나, 애시의 영주였다.
이번 동쪽과의 길을 트면서 가장 손해를 볼 지역의 영주.
“아, 당연히 듣고 있었지. 애시의 여식을 밀어 넣자는 들어줄 가치도 없는 의견을.”
그가 능숙하게 고양이를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서 익숙한 집사의 폼이 느껴졌다.
“아, 아니면 시답지 않은 이유로 동부와의 거래를 반대했던 것부터 말해 줄까? 아니면 마물들의 출현이 심각해진 것 같지 않다고 하면서 세금을 줄여 달란 헛소리?”
고양이를 완벽하게 품에 안은 그가 입을 열었다.
“애시 가주, 이번에 아주 주의 깊게 보고 있던 상단과 계약했던데. 한 번 방문할까 생각 중이라네.”
그가 비스듬히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참, 흥미로워서 말이야.”
노예 상단 연 거 알고 있으니까 닥치고 문 닫아라.
‘계약한 건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애시 가주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말 한마디로 다른 가신들 앞에서 시끄럽게 소리치던 그가 조용해지자 이안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계속 진행하지. 다 듣고 있으니까.”
애초에 카델리온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발언이 나올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던 그가 턱을 까딱였다.
어서 빨리 이 지루한 회의가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다른 이가 입을 열었다.
“전대 가주 부부의 거취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동부랑 길을 트면 가장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영주.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그가 이안을 힐끔거리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느른하고 고저 없는 음성이 회장을 울렸다.
“아.”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아리엘은 꼬리를 빳빳이 세운 채 귀를 찡긋거리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전대 수장 가주 부부에 대한 얘기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왜 책에 안 나온 거지?
‘생각해 보니까 남주인공 과거사가 나올 법도 한데 그 책에서는 남주의 과거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어.’
원작에서는 단지 남주가 이 가문, 저 가문 박살 내고 집안 사용인을 들어 엎었다는 것밖에 안 나와 있었다. 여주인공의 과거사가 비교적 상세히 나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왜 그거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지?’
한 번쯤은 이상하다고 여길 법도 한데.
내가 이안에게 관심이 없어서?
아니면 불필요한 정보라고 생각해서?
‘내가 그를 책 속의 인물이라고 그냥 단정 짓고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그때 저 앞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가 아리엘의 상념을 깼다.
“영지에서 칩거 중이신 선대 가주 부부를 카델레온 저택으로 모셔 오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원래 새로운 가주가 나오면 특별한 사안이 아니면 선대 가주 부부가 가문에 머물면서 새로운 가주가 가주의 일에 익숙하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카델리온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카델리온 부부는 ‘요양’이라는 명목으로 영지 구석에서 칩거 중이었다.
가문의 사용인들을 뒤엎는 김에 이안이 비밀리에 보낸 것이었지만.
대외적으로 그들은 자의로 영지에서 휴양을 즐기는 중이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인데.’
타당한 제안이었다.
전대 가주 부부가 무얼 하며 앞에 있는 가신을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안은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펜을 돌리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던 이안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근데 내가 왜 내 손으로 내쫓은 사람을 데리고 와야 하지?’
사고사로 위장해 그들을 죽이지 않은 것이 어딘가.
그의 입에서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는 내가 북부를 잘 다스리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 모양인가?”
“아닙니다.”
“아니면 마물들을 베어낼 힘이 없어 보인다던가.”
이안 카델리온은 여느 카델리온 가주보다도 강했다.
초기 가주에 견줄 수 있을 만큼.
“아닙니다.”
“그럼 가문을 관리하는 데 소홀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그 말을 다 들은 이안 카델리온이 빙빙 돌리던 펜을 내려놓았다.
“근데 자네의 말을 들으면 마치 내가 카델리온을 맡을 능력이 없다고 들리는데.”
“저는 단지 걱정되어서….”
“걱정? 어떤 걱정?”
이안이 나른히 웃으며 턱을 괴곤 가신 한 명, 한 명을 둘러봤다.
그들을 둘러보는 시선이 잘 벼린 칼날처럼 서늘했다.
“그런 걱정까지 할 만한 여유가 있을 줄이야. 몰타 가주의 고아원은 잘 운영되고 있나 보지?”
질문이 끝나자 몰타 가주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으나, 그건 아주 잠시였다. 곧 그는 굳건한 눈빛으로 돌아와 말했다.
“신뢰하는 이에게 맡겼으니, 잘 운영되고 있을 겁니다.”
“그래?”
어쩌나. 신뢰하는 사람에게 뒤통수 맞았네.
거기 고아원 원장이 돈 빼돌려 먹고 있는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몰타의 가주를 보던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몇몇 가신들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바로 피했으나 다른 가신들은 아직도 그를 우습게 보고 있는 상태였다.
‘스무 살도 안 된 애송이가 알면 무얼 알겠어, 라는 눈빛인가.’
주제도 모르고 저런 눈빛을 가진 자들을 대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 죽여서 없애거나,
둘째, 초장부터 싹이 트지도 못하도록 밟아놔 버리거나.
“스판 가주. 세금이 작년보다 더 감소한 것 같은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오히려 올해가 작년보다 농사가 잘된 것으로 아는데.”
“가, 가주님….”
“게다가 다른 영주와 무슨 각별한 일이라도 있었던 것 같던데.”
북부의 가문들은 만에 하나 그들의 영지로 내려오는 마물을 막아 내기 위해서 조금씩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스판과 모르타는 서로 비밀리에 군사적 동맹을 맺었다.
전시 상황이나 전시 상황에 준하는 일이 발생하면 서로에게 사병을 지원해 주겠다는,
그런 약속.
이안이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아 놓은 단검을 집에서 빼내어 빠르게 던졌다.
“히익!”
날카로운 날붙이가 스판 영주의 목에 가는 실선을 그으며 지나갔다. 한쪽 머리카락이 잘려 졸지에 짝짝이 머리를 가지게 된 스판 영주는 고양이를 본 쥐처럼 움츠러들었다.
앞에 있는 수인의 살기에 겁에 질린 것이었다.
“이런, 한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가 이렇게 간이 작아서 쓰겠나.”
정말 자신을 죽여도 상관없다는 눈빛.
아니 오히려 앞에 있는 자신이 죽으면 더욱 기꺼울 것 같다는 눈빛에 스판 영주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안이 앞에 있는 가신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가 벽에 박혀 있는 칼을 뽑으며 스판 영주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겨우 그 정도로 북부의 수장을 차지하기 위한 대업을 준비하고 있던 거였어?’
그 말에 스판 영주의 몸이 손끝부터 굳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