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 (85/111)

84.

차게 식어 있는 아리엘의 얼굴은 어떻게 보면 실망한 얼굴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녀가 말한 아름다움과 그녀가 중점으로 보는 점이 이 그림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고, 이 설계는 실용성을 더 중요시했다고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앞에 있는 여자의 귀에는 그런 말이 하나도 안 들어오겠지.’

그녀가 입고 있는 멀쩡한 회색 옷도 급하게 구긴 티가 났다.

아리엘은 그냥 명백히 나와 있는 증거를 그녀에게 갖다 대기로 했다.

그녀가 설계도를 뒤집었다.

설계도의 뒷면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의 사인이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림처럼 이상한 문자가 적힌 사인 옆에 거무뎅뎅한 손자국이 묻어나와 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작은 크기.

그 자국은 앞에 있는 그녀의 손보다도 훨씬 작았다.

“더 할 말 있으신가요?”

“…….”

“없으시다면,”

아리엘이 빙긋 웃었다.

“나가시는 문은 저쪽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종업원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수인을 찾아와 줄 거라고 믿어요. 저는 더 이상 실망하고 싶지 않거든요.”

어쩐지 그 모습에서 호랑이의 기개가 보이는 듯했다.

***

똑똑. 새로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네.”

그 말이 끝나자 방문이 다시 열렸다.

바깥에서는 종업원과 어린아이 한 명, 그리고 그 옆에는 그녀가 못 보던 수인이 한 명 더 있었다.

화랑의 관리자였다.

종업원이 처음에 이상한 화가를 데려온 덕분에 관장은 연신 아리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엘은 관리자가 그녀의 옆에 서서 무슨 표정을 짓든 말든 그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가 따스한 표정으로 아이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미셸이요….”

“네가 진짜 미셸이었구나.”

그 사기꾼이 사칭한 거였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린 아리엘이 질문을 이어갔다.

“건물을 설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야?”

“기존이랑 다르게 따뜻하고, 편한거요….”

꼬마는 배꼽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그녀의 눈치를 보며 척척 대답을 해 나갔다.

모든 질문이 끝나자 그녀의 표정은 만족스럽게 변했다.

“후원 계약서가 필요할 것 같은데.”

“네넵! 여기 있습니다!”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자 관장이 부리나케 품 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적어도 관장은 그의 직원이 한 실수가 얼마나 치명적인 실수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아리엘은 빠르게 그 계약서에다가 서명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네 집으로 가도 되겠니?”

“네!”

그러자 그 꼬마가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아리엘은 몇 번 그 머리를 쓰다듬고 화랑의 관리자를 향해 몸을 틀었다.

“직원 교육을 잘못한 것 같더군. 그리고 나였으면 당장 그 직원을 해고해 버렸을 거야.”

그녀가 서늘하게 그 말을 내뱉으며 방 안을 떠났다.

아리엘이 떠나간 방 안에는 관장과 직원, 그리고 그녀가 다 마신 음료수 잔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이안과 같이 잘 때를 제외하고 오랜만에 고양이로 변한 아리엘은 햇빛이 잘 들어오는 창 앞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며 머리를 숙였다. 나른한 햇볕이 그녀의 몸을 기분 좋게 휘감았다.

‘책 읽어야 하는데… 졸려….’

그녀가 읽고 있던 책은 그녀의 발 받침대로 변한 지 오래였다.

‘흐아아아암….’

딱 5분만 잘 거야. 5분만….

그렇게 아리엘은 따사로운 햇살에 몸을 맡기며 눈을 감았다.

바로 앞에 있을 회의에 필요한 문서를 가져온다는 핑계로 그의 방에 들어온 이안은 창틀에서 졸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그 새끼 고양이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새근대며 자고 있었다.

한 손에는 문서를 챙긴 그가 기세상 모른 채 창틀에서 책을 깔고 누워 자는 아기 고양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몇 번 털을 쓰다듬어 주자 새끼 고양이가 자신의 얼굴을 그의 손에 파묻었다. 온기를 찾아 헤매는 아리엘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고양이가 갸르릉 대며 움직이자 이안이 쓰다듬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그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고양이의 등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마저 새끼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이안 님. 회의 시작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밖에서 재촉하는 앨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앨런이라면 아마 필시 회의장 안에서 오지 않는 자신을 욕하는 중일 것이리라.

‘회의 가야 하는데.’

아리엘이 놓아 주지를 않네.

새끼 고양이는 그의 손에 파묻혀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잠시 보고 있던 그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이안은 자신의 손 위에 곤히 자고 있는 아리엘을 올려놓은 채 방을 나섰다.

‘재밌겠는걸.’

뒷목 잡고 넘어갈 노인네들의 모습이 선히 보인 이안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이안이 회의장 문을 열자 그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그의 손바닥 위에 있는 고양이를 보고 미쳤냐고 묻는 듯한 앨런의 시선이었다.

***

“가주님, 동부 애송이들을 믿으시려는 겁니까!”

“지금 북부의 설산 상황도 좋지 않지 않습니까!”

“그럼 동부랑 거래도 안 하고 살겠소?? 당연히 거래를 해야지!”

“옳소. 그래야지! 북부 쪽에 더 이득이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한 치 앞도 못 보는 겁니까!!!”

한쪽은 동부와 길이 개척되면서 이익을 볼 수 있는 영주들의 것이었고, 다른 한쪽은 동부와 길이 개통되게 되면 다른 땅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져 오히려 손해를 보는 이들의 것이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성난 파리 떼처럼 가신들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회의장을 채웠다.

후계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애송이가 북부를 다스린다는 것에 대한 무시가 은연중에 담겨져 있는 행동이었다.

‘이안 님께 그렇게 밟히셔도 정신을 못 차리시는 건가.’

앨런은 가주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아, 이안 님이 제대로 공식적으로 시끄럽게 그들을 처리한 적이 없었지.

보통 한 가문의 수장이 되는 데에는 오랫동안 후계자 교육을 받고 사십이 넘어서 가주가 된다 해도 빠른 편이었다.

하지만, 북부의 수장인 그의 나이는 열아홉.

그러니, 어떻게 보면 그들은 시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후계자는 이곳을 다스릴 수 없다는 시위.

쓸데없이 시끄럽기만 한 가신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제일 상석에 앉아 있는 이안은 앞에서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잘 자네.’

회의에 필요한 그의 문서는 새끼 고양이의 깔개로 변해 버린 지 오래였다.

“지금 마물의 상황이 안 좋아 봤자 얼마나 안 좋다고 그러는 겁니까.”

“맞습니다. 다를 때와 달라진 것도 없는데 세금 감면을 부탁드립니다. 가주님.”

가주가 된 지 2년 차인 이안을 아직 애송이로 보는 가신들은 자기 잇속을 챙기느라 바빴다.

그는 한쪽 손으로는 고양이의 귀를 막고, 등을 쓰다듬고 있던 다른 한쪽 손으로는 발을 간지럽혔다.

‘윽. 누가 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꿈이면 좀 조용해야지.’

자고 있던 아리엘이 잠결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지간히 피곤했는지, 꿈속에서의 그녀도 자려고 머리를 누웠으나 옆에 있던 모기가 계속 앵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기를 잡으러 이리저리 꿈속에서 뛰어다니던 아리엘이 꿈속에서 짜증 난 목소리를 내었다.

‘아악!’

진짜 왜 안 잡혀. 나 잠 좀 자자! 좀!!

“냐악!!”

회의장을 울리는 새끼 고양이의 신경질 난 울음소리에 시끄럽던 회의장이 순간적으로 조용해졌다.

꿈속에서 모기를 잡기 위해 뛰어다녔던 그녀가 인상을 팍 쓴 채 실제로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자. 이제 다들 할 말 다 했나?”

이안이 자신의 얼굴 앞으로 다시 쿨쿨 자고 있는 고양이를 들어 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그러자 그제야 고양이를 확인한 가신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가주님! 그 고양이는,”

“검은 고양이지.”

고양이가 깨지 않은 것을 확인한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근데, 문제 있나?”

아 이안 님.

예상되는 가신들의 행보에 앨런이 책상 밑에서 두 손을 꼭 모았다.

그리고 역시나,

“당연히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문제가 있고 말고요!!”

이안을 멋모르는 어린아이로 생각한 대신들은 들고일어났다.

그런 어린아이는 카델리온 가문에서, 뜯어먹기 좋은 먹잇감이었다.

조금 전까지의 소란은 비교할 것이 되지 못했다.

앨런은 가만히 앉아 들고 일어나는 가주들의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숙청당하는 가문들을 그렇게 많이 봐 왔으면서 숙청될 다음 가문이 왜 자신의 가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일까.

확실히, 자신의 주군이 저택의 고용인들을 한 번 싹 물갈이한 것 빼고는 카델리온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바깥의 일에 비해 많이 유하게 대하신 것 같긴 했다.

‘이걸 계기로 물갈이하시려는 거군.’

앨런이 조용히 그 가문들의 이름을 자신의 수첩에다가 적어 내려갔다.

“그 고양이가 있는 곳에는 흉악한 일만 일어난다고 유명하지 않습니까!!!”

“검은 고양이와 같이 있는 사람은 변(變)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아시긴 하시는 겁니까.”

“좋은 기운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한 그 유명한 시몬드 가문의 일원이 아니고서야 모두가 재앙을 피해 가기 어려울 텐데…!”

“그것을 보면 되는 일도 안….”

그때, 자고 있던 아리엘이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쭉 뻗은 검은색 솜뭉치가 이안의 입을 꾹 눌렀다.

그 순간 시끄럽던 회의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진 회의실에서는 아까의 시끄러운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 그들의 목이 보존되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눈치가 그나마 빨랐기 때문이었다.

앞에 있는 고양이가 이안의 입술까지 발로 문대자 대신들은 푸르죽죽한 낯을 한 채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그 광경을 그냥 가만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야지. 우리 초코 식빵이 듣고 있지 않은가.”

그가 느른히 웃으며 능숙하게 자신의 입을 막고 있던 팔을 치웠다.

‘입안에 넣어 버릴까.’

입안에 넣어서 와랄라하고 싶게 생겼다.

짤따란 솜뭉치를 잠시 쳐다보던 이안이 아리엘의 다리를 내려놓았다. 그것이 한두 번을 해 본 느낌이 아니었다.

“눅눅한 초코 식빵을 먹게 된다면 그대들이 책임져 줄 건가? 아, 물론 그 책임은.”

그가 주위를 찬찬히 둘러봤다.

“자네들의 목으로 져야겠지만.”

이 말을 듣고 앞에 있는 고양이가 우는 순간, 자신들의 목은 이 세상과 분리된다.

그러자 한참을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방계들과 카델리온의 가신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안이 눈꼬리를 휘영청 휘었다.

“혹시 모르지 않나. 그런 말 때문에 앞에 있는 솜뭉치가 분노해 ‘그대들이 말하는 재앙’이 자네들의 가문에 닥칠지도.”

사근사근한 말투와는 다르게 내용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으음….’

눈꺼풀을 꿈틀대던 새끼고양이의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나는 분명 이안의 방 창틀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잠들었는데.’

여긴 회의장 아닌가. 나 왜 여기 있지.

‘내가 왜 이런 종이 위에 올라와 있어?!?’

심지어 내 밑에 깔린 건 회의하는 데 필요할 거라고 추정되는 문서였다.

나는 내 몸뚱이를 종이에서 슬쩍 치웠다.

‘그리고 여기 분위기는 왜 이래??’

회의장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앞에 있는 가신들로 보이는 수인들은 회의는 하지 않고 모두 아리엘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회의장은 누구 한 명이라도 입을 열면 그대로 칼바람이 일 것 같은 살얼음판 같았다.

딱 봐도 호의적이진 않은 시선이었다.

두려움 밑에 적대감과 혐오감이 깔려 있는 시선.

익숙한 눈빛이었다.

그런 눈빛들을 익숙하게 넘긴 아리엘이 생각했다.

‘일어났더니 분위기 무엇.’

꿈에서 모기 잡기를 포기하고 기상했더니 살얼음판을 마주한 아리엘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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