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84/111)

83.

지금 나는 줄줄이 걸려 있는 그림들을 보고 있었다.

아, 이안이 걸어놓겠다고 한 새 발바닥과 곰 발바닥 그림을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건축가 특별전이라고 해서 건축가들의 설계도를 걸어 놓는 괴상한 전시회가 있던데 도대체 그걸 왜 열었는지 그게 알게 뭔가.

여기 화랑 주인이 건축가 덕후라도 되나 보지.

이 화랑은 신분에 따라 입장을 차별하지 않았다.

‘무슨 입장료가 100골드나….’

들어가기에 입장료가 무지무지 비싸다는 점이 있었지만.

그니까, 돈 없으면 들어오지 말아라. 이런 느낌이었다.

이번 화랑이 건축가들의 설계도를 걸어 놓는 전시회라 건물을 세울 수 없는 사람이면 들어오지 말라는 암묵적인 뜻인가.

이런 회랑에 나온 그림들은 후에 유행할 건축 양식이 된다. 즉, 한발 앞서서 이곳에 방문하면서 어떤 양식이 유행할 건지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할 수 있는 거지.’

아리엘은 화랑을 찬찬히 둘러봤다.

거의 십자가 형의 구조에다가 크기가 웅장했으며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둥근 아치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개중 몇몇 개는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느낌의 날카로운 형태감을 가지고 있는 건물을 디자인했다. 그니까 전체적으로 다 뾰족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건 괜찮긴 한데… 아마 저런 몇몇 개의 느낌이 유행하겠지.’

내가 추구하는 느낌은 없었다.

‘다른 작품들은 없나.’

몇몇 화랑들은 전시에 탈락한 작품들도 보관해 놓는다는 것을 떠올린 내가 혹시나 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

옆을 돌아보니 종업원이 빙긋 웃고 있었다.

“여기 걸린 화가들 말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도 볼 수 있을까?”

“네. 물론이죠.”

그 말이 끝나자 종업원이 성큼성큼 걸어가며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의 탁자 위에는 차가운 음료수와 디저트들이 자리해 있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계시면 빠르게 준비해 오겠습니다.”

나는 방을 둘러보며 파란색 음료를 쪽 빨았다.

‘블루 레모네이드네.’

한 입 머금자 상큼하고 시원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제발 내가 원하는 느낌을 살리는 건축가가 한 명이라도 있어라.’

이 전시회를 알기까지 방방곡곡으로 뛰어다니며 정보를 알아보려고 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을 스쳐 지나갔다.

물론 내가 아니라, 슈엘라가.

내가 이곳에 오기 위해 들인 대가로는 분노한 슈엘라에게 내 소중한 머리카락을 몇 가닥 뽑힌 것밖에 없었다.

“다른 화가들의 스케치는 이 안에 있습니다.”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온 종업원이 책상 위에다가 커다란 함을 내려놓았다. 꽤나 무거워 보였는데, 소리 없이 내려놓는 것을 보니 팔 힘이 꽤나 센 종업원인 듯싶었다.

‘알고 보니 밤에는 암살자를 한다던가.’

낮에는 미술관 직원, 밤에는 사람들 죽이고 다니는 암살자.

뭔가 소설 속에서 있을 법한 클리셰 아닌가.

‘하지만 여긴… 소설 속이지.’

그치.

달칵, 함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딴생각을 하고 있던 내가 함 안에 수북이 쌓여 있는 종이들로 시선을 돌렸다.

‘저걸 언제 다 보지.’

저 수 많은 그림을 볼 생각에 앞이 까마득했다.

“그럼, 필요할 때 불러 주십시오.”

종업원이 친절한 영업용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허리를 한 번 숙이고 사라졌다.

나는 함 안에 있는 종이들 중 제일 위에 있는 종이부터 꺼내 들었다.

여기 화랑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과 후원자를 연결해 주거나 전시회에 걸린 그림을 사고팔기도 하는 시스템이었다.

이곳을 방문한 관람객은 원하는 화가를 정기 후원을 하거나 화랑에 돈을 내고 그 화가를 자신들의 소속 화가로 만들 수 있었다.

‘화가를 후원하고 그림을 사는데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드니까, 그렇게 비싼 건 아닐수도…….’

나는 빠르게 그림들을 훑어보며 마음에 드는 것과 들지 않는 것을 나누었다.

어느새 함 안에 있는 종이들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마음을 벅차오르게 하는 것이….

‘이거다!!!’

맨 마지막에서 딱 두 장을 남긴 상태로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방 밖이 전시회장이 아니었다면 심 봤다, 아니 그림 봤다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설계도를 들고 있는 내 손이 벌벌 떨렸다.

이 설계도는 다른 설계도보다 압도적으로 자세하고 세세했다. 평면과 단면의 모습을 한 종이에 보기 편하게 담고 있었고, 다른 작품들보다 파격적인 아이디어들이 줄지어 있었다.

예컨대 옥상을 활용하는 것이라든가, 기다란 수평 창을 쓴다는 것이라든가.

또 다른 그림들과 달리 주위의 배경까지도 그려져 있었다. 이것을 본 나는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주위 환경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딱 좋아.’

물론 이런 파격적인 행보를 기이하게 본 심사위원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을 것이다. 입체적인 그림만 그려져 있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한 종이에 모든 것이 다 그려져 있는 것은 어수선하고 정신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건 다 상관없었다.

내 마음에 들었으니까.

‘미흡하지만 조금만 더 손 보면 되겠는걸.’

흡족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미소와 함께 입가가 벌어졌다. 다시 자리에 우아하게 앉은 아리엘은 앞에 있는 종을 살짝 흔들었다.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직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이걸 그린 수인을 볼 수 있을까?”

기뻐서 방방 뜨려고 하던 아리엘은 어디 가고, 시크한 표정을 꾸미며 말했다.

‘왜 하필 저 그림이지.’

물정 모르는 영애가 그냥 지른 거군.

저 그림은 전시회를 위한 심사에 올라온 작품 중에 1, 2위를 다투던 작품이었다.

물론 뒤에서.

‘혹시 힘든 일이라도 있으셨나.’

스트레스받아서 돈이라도 허공에 뿌리고 싶으셨다던가.

실제로 멋모르는 귀족 영애들 중에서는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아리엘이 들고 있는 종이를 확인한 종업원이 순간적으로 스쳐 간 의문이 서린 눈빛을 잘 갈무리하곤 웃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종업원의 표정에서 순간적으로 스쳐 간 의아함을 본 아리엘은 조용히 속으로 웃었다.

‘후후. 이제 곧 내가 들고 있는 그림의 화가는 지금보다 100배 더 비싸게 불러도 못 데리고 갈 거다.’

***

앞에 있는 블루 레모네이드가 바닥을 드러날 때쯤, 똑똑하는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와도 돼.”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중년의 여자가 뛰어오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들어왔다.

아리엘은 찬찬히 자신의 앞에 있는 수인을 살펴보며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비안 웨스트라고 하네.”

“미셸 로비아라고 하, 합니다.”

감격스러운지 앞에 있는 회색빛 웃옷의 소매가 떨리고 있었다.

덜덜거리는 그녀의 손을 한 번 쳐다본 아리엘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차가워졌다.

그러나 차가운 표정을 금방 갈무리한 아리엘이 활짝 웃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가지 간단한 질문에 답해 줄 수 있을까?”

“ㄴ, 네! 당연하죠.”

고맙다고 답한 아리엘이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눈을 빛냈다.

“너는 건물을 설계할 때 어떤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주로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편입니다. 건물의 외적인 부분은 수인들이 그 건물을 판단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 테니까요.”

“아 그래? 나도 건물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보통 어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편이야?”

그녀가 천진난만하게 물어봤다.

시간이 지나자 앞에 있는 화가는 서서히 긴장을 풀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편입니다. 천장이 뾰족뾰족하거나 아치형으로 솟은 것을 한 개의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 나도 그런 스타일이 유행할 거라고 생각했어!”

“미셸은 주로 어떤 음식을 먹어?”

“볶음 야채나 콩 요리를 주로 먹습니다.”

“그렇구나….”

특별히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 같지는 않은데.

아리엘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아리엘이 말이 없어졌다.

잠시 침묵하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근데 사기는 왜 친 거야?”

“네?”

“사기는 왜 치는 거냐고.”

여태까지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거짓이었던 듯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고 동글한 연둣빛 눈망울이 앞에 있는 미셸을 꿰뚫어 보듯이 쳐다봤다.

“자, 봐 봐.”

그녀가 자신이 들고 있던 그림을 내려놓았다.

“이 그림은 복잡하게 느껴질 만큼 정교하지만 끝 마무리는 어설픈 군데가 몇 군데가 있어. 그리고 선의 굵기도 어린아이가 그린 듯 힘의 조절이 잘되지 않았지.”

물론 그것만으로 그녀가 사기를 친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너는 주로 콩 요리를 먹는다고 했지. 볶음 야채나.”

아리엘이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였다면 빵을 먹었을 거야. 콩 요리보다는 값싸고 구하기 쉬운 식빵 같은.”

“그, 그게 제가 이 설계도를 그린 사람이 아니라는 거랑 무슨 상관인가요!”

초조한 표정이 된 그녀가 버럭하며 소리 질렀다.

아리엘은 그런 그녀의 반응에 조용히 웃었다.

“식빵 같은 빵들은 흑연을 지울 수 있거든. 그래서 주로 설계도를 그리든 그림을 그리든 화가들은 식빵을 먹어. 귀족이 아닌 이상은. 돈을 아끼기 위해서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지.”

미셸이 손바닥을 내보이며 토로했다.

“저도 빵을 먹긴 먹습니다만, 주로 콩 요리를 더 먹는 겁니다…! 모든 화가가 빵을 먹진 않을 거 아니에요!”

아리엘이 그녀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그리고 너는 손가락에 굳은살이 하나도 없어. 적어도 연필을 쥐거나 이 그림을 그리는 데 사용했던 무언가를 쥐었던 부분은 굳은살이 박여 있어야 하는데. 이 그림은 쉽게 나오는 그림이 아니거든.”

겉은 복잡해 보이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내가 들고 있는 그림은 굉장한 노력이 들어간 것이었다.

“그, 그건.”

아리엘이 미셸의 말을 끊었다.

“마지막으로, 너는 건물을 설계할 때 아름다움을 가장 중점으로 둔다고 했지. 예컨대 뾰족한 천장이나 아치형으로 된 천장, 같은.”

그녀가 그림을 가리켰다.

“근데 이 설계도를 봐. 이 설계도에서는 뾰족하거나 아치형으로 된 천장은커녕, 건물 제일 윗부분에는,”

“옥상이… 있군요.”

옆에 있던 종업원이 묘한 어조로 말했다.

“잘 알아봤네. 자 이제 더 할 말은?”

그녀가 미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전시회 손님들이 화가에게 지원하는 후원금은 한두 푼이 아니었다.

미술에 필요한 도구들이 아닌 돈을 가지고만 따져도 한 가족이 풍족하게 먹고살 정도의 돈보다 많았다.

그 후원금에 미련이 남은 미셸은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새, 생각해 보니 제가 옥상을 그린 것 같기도 해요!”

그러자 아리엘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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