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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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클로에와 리카 세르디한은 꽤나 친해진 상태였다.

그 둘 모두 상대방이 다른 영애들이랑 다르다는 것을 빨리 알아챈 것이다.

그니까 서로 같은 부류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은 적이 될 일이 없다는 것을.

사람을 가려내는데 귀신 같은 감을 가지고 있는 클로에는 리카 세르디한이 무척이나 좋았다.

리카 세르디한도 일반 영애들과는 다른 클로에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이런 영애는 대륙을 다 뒤져도 몇 없었다.

“펠릭스 대표님은 무엇을 좋아하시나요? 사냥? 검술? 아니면 장부 보기?”

그녀는 먼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줄줄 나열했다.

다른 영애들과 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직감이 말해 주는 대로 사는 것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리카의 말이 끝나자, 클로에가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세르디한 영애 님, 저는 주로 장부를 보는 것이나 검을 쓰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은 꽤나 정확한 편이었고.

“저도 장부를 보는 것을 꽤나 좋아한답니다. 오라버니의 일까지 가져가서 장부를 들여다보죠.”

그녀가 은근히 루카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영애 님의 오라버니라면, 세르디한 가주 대리님 아니신가요…?”

“맞답니다.”

리카가 빙그레 웃었다.

“저를 생각해 주시는 다정한 오라버니시죠.”

다정한 오라버니는 개뿔.

‘싸우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그녀는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삼켰다.

“자신의 일감도 나누어 주시다니. 정말 친절하시군요.”

그러나 일하기를 무척 좋아하는 클로에의 표정에는 기대가 서려 있었다.

“제 오라버니도 저와 무척이나 닮았답니다.”

닮긴 개뿔.

닮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클로에를 놓치고 싶지 않은 리카는 말을 내뱉었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녀의 눈빛에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

리카 세르디한이 붉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은근하게 물었다.

“근데 혹시, 대표님도 장부에서 숫자가 하나 틀린 것을 발견했을 때의 그 쾌감을 좋아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클로에의 얼굴에 붉게 홍조가 올랐다.

그녀의 표정에서 동지를 찾았다는 기쁨이 미미하게 서려 있었다.

“후후후. 저도 그 쾌감 때문에 자꾸만 장부를 들여다보게 된답니다….”

“저도 장부에서 숫자가 틀린 것을 발견했을 때 옆에 있는 검을 들어서 던져 책상을 부숴 버릴 뻔했던 적이 있었어요.”

클로에는 수줍게 말했다.

“저도랍니다. 제 친구 같은 검이 손에 어찌나 착 감기는지.”

“벌써 자신과 맞는 검을 찾으시다니 부러워요.”

“호오. 나중에 같이 검을 사러 가시는 건 어떤가요?”

“너무 좋죠!”

클로에가 눈을 반짝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리카 세드리한이 작게 웃었다.

“영애라는 호칭 말고 리카라고….”

똑똑.

그때 응접실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말을 하고 있던 리카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들어오라는 허락도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런 허락을 받으려고 노크한 게 아닌 듯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노크까지 하고 나름 정중하게 응접실에 쳐들어간 루카스 세르디한은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어이없는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그의 앞에서는 그 소문의 펠릭스 대표와 자신의 여동생이 한자리에서 희희낙락하게 떠들고 있었다.

“오라버니. 쫌 더 신사답게 들어올 수 없어? 손님이 놀라시잖아.”

곧 죽어도 오라버니라고 말하기 싫은 리카 세르디한이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호적 메이트를 쳐다보았다.

‘리카가 오라버니라고 하다니.’

쟤가 죽을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역으로 누군가를 죽여 도움을 청할 일이 생긴 걸까.

그의 양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는 앞에 있는 여동생을 보곤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수려하던 얼굴이 한순간에 초췌해졌다.

“동생이 사랑스럽지 않아?”

“아. 응. 사랑스럽지.”

그가 영혼 없이 답했다.

그리고 리카 세르디한의 앞에 앉아 있던 클로에는 남매간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그 표정은 뭔데?”

“어떤 표정?”

“세상에서 가장 골치 아픈 것을 마주한 표정.”

“정확하네. 지금 네가 저지른 일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 고민이었거든.”

“무슨 일을 했는지도 안 물어보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안 봐도 알겠다던 표정을 지은 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을 했는데?”

“첫 번째 펠릭스를 샀어.”

미친.

그가 입 안에서 나오는 욕을 삼켰다.

도대체 왜 오늘따라 그에게 유독 황당한 소식들이 날아오는 걸까.

그가 자신의 호적 메이트를 찢어 버리고 싶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있잖아, 요즘 가주 대리를 맡고 나서 유독 후회를 많이 하는 것 같아.”

세르디한 가주는 모든 권한을 후계자인 루카스에게 넘기고 대륙 곳곳을 여행하고 있었다.

‘대륙여행 조금 늦게 가 달라고 부탁드릴걸….’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여동생을 보고 왜 자신의 부모님이 남부를 떠나 대륙 곳곳을 여행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네가 가주 대리를 맡아서 너무 좋은데?”

“나는 네 덕분에 부모님의 현명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좋네.”

그녀가 샐쭉 얄밉게 웃었다.

루카스는 가증스럽게 웃는 자신의 여동생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그의 표정을 바라본 그녀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근데, 펠릭스 상단 대표에게는 인사해야 하지 않을까?”

가증스러운 자신의 여동생을 쳐다보고 있던 그가 그제야 연한 분홍색 머리를 가지고 있는 상단 대표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들을 흥미진진하게 쳐다보고 있던 펠릭스 상단의 대표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입을 열었다.

“세르디한의 가주 대리, 루카스라고 합니다.”

그녀를 존중한다는 뜻을 담은 존댓말에 그를 바라보고 있던 클로에의 눈이 살짝 커졌다.

“펠릭스 상단의 대표, 클로에라고 합니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루카스 세르디한을 바라보고 있던 클로에의 시선이 한층 따뜻해졌다. 그녀의 눈에는 자신을 존중하는 수인을 향한 호감이 서려 있었다.

그니까 남자로서의 호감 말고 좋은 수인이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호감.

앞에 있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저희 어디선가 본 적이 있지 않나요?”

그리고 그의 말에 호감이 서려 있던 클로에의 표정이 티가 나지 않게 팍 식었다.

그 옆에 있는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미친 걸까.’

자신이 어떻게 클로에에게 작업을 쳐놨는데.

리카 세르디한은 어딘가 돌아 버린 것 같은 앞에 있는 수인을 외면했다.

저 사람은 자신의 가족이 아니었다.

그러자 그가 한 마디 덧붙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로 어디서 뵌 것 같아서.”

그러나 그 말은 상황을 더더욱 악화시켰다.

‘정말 저런 게 가주 대리라니. 세르디한이 곧 망하는 게 아닐까.’

아니다. 자신의 호적 메이트는 저래 보여도 가끔씩은 똑똑하니까 남부는 잘 굴러갈 것이다.

클로에가 사무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펠릭스 상단의 첫 연회에서 봤습니다.”

“다른 데서는 본 적이 없나요?”

“없는 것 같습니다. 혹시 다른 수인 분과 착각한 것이 아니실까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 리카와 눈이 마주친 루카스는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를 쏘아본 리카가 부드럽게 표정을 풀며 클로에를 쳐다보았다.

‘저거 곧 결혼할 애 맞나.’

저렇게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다른 사람을 봐서야 그녀의 남편이 될 수인이 질투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자신의 오빠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를 무시한 채 이야기를 꺼냈다.

“클로에 혹시 에그타르트 좋아하시나요?”

“어머, 영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가 에그타르트랍니다!”

“영애라뇨. 편하게 리카라고 불러 주세요.”

“영애 님도 클로에라고 불러 주세요.”

“어머. 영애 말고 리카 님으로 부르라니까요.”

‘…도대체 둘이 어떻게 저렇게 친해진 거지.’

뾰족한 눈꼬리와 굽이치는 황금 머리칼을 가져 어디 내놔도 기 빨리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의 동생이나,

동글동글하게 생겼지만 어딘가 강단 있어 보이는 펠릭스 상단주나,

둘 다 보통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세드리한 저택의 연회장 안.

“도대체 리카 님이 왜 연회를 주최하신 걸까요?”

“글쎄요. 하지만 리카 님이 연회를 여시는 일은 흔하지 않으신가요?”

“맞아요. 셀레스틴 시몬드 님과 함께 사교계의 꽃으로 꼽히시잖아요.”

“하지만 리카 님은 살롱이 아니면 주로 다른 파티에 초대받으셔서 자리를 빛내주셨는데…”

“게다가 이번 파티는 이곳에서 열리잖아요.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어요.”

“세르디한 가문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곳 중 하나인 아몬드 홀이라니.”

맨날 흥미 있는 것들을 찾아 헤매는 귀족들의 눈빛은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그때였다.

“리카 세르디한 영애님 드십니다!”

시종이 우렁찬 목소리로 연회장 안을 향해 말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리카는 앞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주위를 쳐다보지도 않고 걸어 나가던 그녀의 시선이 한 군데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발걸음이 어느 한 사람 앞에서 멈췄다.

“나랑 결혼해 줘.”

달칵, 그녀가 반지 케이스를 열며 남자에게 들이밀었다.

그 반지는 펠릭스 상단의 보석이 박혀 있는 반지였다.

이 반지는 그녀의 비자금과 연봉과 생일선물과 새해 선물까지 모조리 합한 것이었다.

‘어…어? 어?!?!?’

옆에 있는 귀족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리카 님이…….”

툭.

연회장 안에서 부채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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