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 (79/111)

78.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파랑새는 부지런히 내 방 앞에 있는 나뭇가지와 상단을 왔다 가며 편지를 전했다.

클로에가 못 하겠다고 도와 달라며 징징거리는 내용이 가끔씩 있었지만, 보고 싶다고 노래 부르는 것 같은 말과는 다르게 준비 상황을 보고하는 내용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역시 클로에는 이 시대의 최고의 일꾼이야.’

마치 자본주의의 나라에서 구르고 온 것 같은 실력이었다.

‘정작 자본주의 국가에서 온 건 나인데.’

그렇게 경매의 준비는 차질없이 수월하게 준비되어 가, 벌써 경매 당일이 다가왔다.

그레이트 홀에 도착한 귀족들이 미리 이야기를 나누며 펼쳐져 있는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른 연회들과는 확실히 다르네요.”

“이곳에서는 다른 곳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우아함과 웅장함이 느껴져요.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확실히 눈에 띄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장소가 특별하게 느껴지는군요.”

“호오. 확실히 장식이 적긴 하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군요. 장식 없이 이런 느낌을 낼 수 있다니.”

“구조 그 자체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이곳을 자세히 보시면 구조의 아름다움이 최대한 드러나도록 디자인이 되어 있습니다.”

귀족들에게 서빙을 해 주면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주워들었다.

그레이트 홀은 원래 귀족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전체적으로 검은색과 흰색으로 단조로운 색으로 이루어진 그레이트 홀은 귀족들이 아무리 비싼 물건으로 장식을 해도 그것은 그만큼의 가치를 뽐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곳이 생긴 초반에 귀족들이 그곳을 대여해서 처음 몇 번 파티를 주최하고 처참히 망한 후에는 별로 인기가 없어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건축가가 왜 이런 색채와 분위기로 건물을 지었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색채가 단조롭고 장식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이 힌트였다.

화려함과 어떤 장식을 놓아도 어울리는 것을 중시하는 다른 홀들과는 다르게 그레이트 홀은 최소한의 장식을 사용하는 것을 중요시했다.

한 마디로 건축계의 이단아 같은 존재.

나는 이 점을 이용해서 장식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그 결과, 처음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의 의도대로 건축물의 구조 그 자체에서 나오는 고아함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신비로움을 느껴지게 해 주었다.

“아름답네요….”

다른 귀족이 중얼거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될 만한 보석들로 가득 찬 휘황찬란한 일반적인 다른 홀들과는 달리 장식 하나 없는 단순함은 근본적인 묵직함을 주었다.

‘그리고 에티아 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한몫했지.’

자신이 도움을 준 것을 기억하라며 에티아 가주는 적극적으로 이 연회를 개최하는 데에 금전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덕분에 사용된 장식을 비롯해서 이곳에 있는 물건들은 비싸지 않은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수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디자인은 비싼 것을 좋아하지만 직접적으로 과시하는 것을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귀족들의 취향을 저격할 수 있는 것이다.

‘남들과는 다르게 특별하고 싶다는 마음도 꿰뚫은 거고.’

“안녕하십니까.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좌석까지 손님을 안내한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새로운 지갑, 아니 새로운 손님을 맞았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안내하려고 얼굴을 올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윈닉타 상단주, 헤스 울티오였다.

‘아. 망할.’

생각과는 달리 내 얼굴에는 기계적으로 완전한 사회인의 웃음을 띄워 올렸다. 수년간 한국의 직장 생활로 다져진 웃음이었다.

“흐음.”

그가 흥미가 서려 있는 나른한 은안으로 나를 훑어봤다. 뭔가 감추고 있는 것까지 샅샅이 훑어보는 느낌이었다.

그때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끊기고 조용해졌다.

옆을 보니 익숙한 얼굴의 새하얀 호랑이가 이곳에 들어오고 있었다.

‘설마 올 줄이야.’

절대 마주치지 말아야지.

속으로 100번 다짐을 한 아리엘은 앞에 있는 수인을 향해 방긋 웃었다.

그리곤 떨림 없는 목소리로 윈닉타의 상단주를 자리에 안내했다.

“헤스 울티오 님의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자리에 무사히 안내한 아리엘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나려고 할 때 그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상단주님은 늘 제 기대를 부숴 버리십니다. 더 좋은 쪽으로.”

“시녀 분장까지 하시다니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던 내가 마저 걸어갔다.

비안 웨스트가 자리에서 떠나자 그가 느른한 눈빛으로 홀을 살펴봤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었다. 정확히는 그런 사람들만 모인 곳이었다.

게다가 입장을 해야 하는 시간과 경매가 시작하는 시간은 달랐다.

즉, 사업에 대한 이야기든 무슨 이야기든 사적으로 이야기할 시간이 꽤나 많이 주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 온 귀족들은 물 만난 물고기들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처음 본 수인들 앞에서도 빙글빙글 웃으며 반가운 낯을 하고 말을 이었다.

‘신날 만도 하지.’

대륙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사람들끼리 한곳에 모였으니 이렇게 좋은 기회는 살면서 한 번도 오지 않을 정도로 흔하지 않았으니까.

이런 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수인이 없었다.

‘특별히 얻을 게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적대감을 가진 수인이 주최하는 행사에는 보통 귀족들이 참석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펠릭스는 귀족사회에서 가장 떠오르는 화두였고, 상단주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밝혀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자연스럽게 누군지도 모르는 상단주에게 적대감을 가질 귀족은 없었다.

비안 웨스트는 이 점을 이용해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수인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

그때, 불이 꺼지고 주위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바로 그레이트 홀에 있는 마정석들이 은은한 빛을 내며 주위를 밝혔다.

연한 분홍 머리를 가진 여자가 무대 정중앙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왔다. 조명이 무대 정중앙으로 걸어 나오는 그녀를 밝게 비추었다.

완벽한 예법을 구사한 그녀가 씩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클로에 플로리아라고 합니다.”

경매의 막이 올랐다.

***

아리엘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클로에의 시선이 잠깐 그녀에게 닿았다. 아리엘은 잘하고 있다는 듯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가 생각보다 진행을 잘하네.’

나는 흐뭇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쟤는 뭔데 예법도 잘하지.’

분명 또 책에서 배웠어요. 라고 하겠지.

클로에는 습득력이 빠른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귀족들의 예법마저도 빠르게 배울 줄은 몰랐지만.

“펠릭스는 행운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고대어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 행운이 깃들기를 빌면서 펠릭스 상단에서 내어놓을 첫 번째 보석을 공개하겠습니다.”

보석을 덮고 있었던 검은 천이 걷히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보석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빛깔이 빛을 받으면서 산란되었다.

푸른색과 흰색이 오묘하게 뒤섞인 보석 위에 여러 가지 광채가 어렸다.

‘이래서 이걸 본 사람들이 제각각 말이 다른 거였군.’

그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그 순간 펠릭스를 본 사람들의 말이 왜 다 달랐는지 알 수 있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광물인 것이 확실했다.

특별한 것을 원하는 귀족들의 욕심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점점 자라났다.

그때였다.

“에티아 가 장인들의 솜씨잖아….”

보석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귀족 한 명이 중얼거렸다. 그제야 귀족들은 에티아 장인들이 근래 일언반구도 없이 왜 주문을 다 받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확실히 물이 잔잔하게 요동치는 것 같군요.”

“볼수록 오묘하네요.”

“그래서 에티아 장인들이 주문을 안 받나 봐요. 이걸 봤으니 다른 보석들이 얼마나 성에 차겠어요.”

홀이 술렁거렸다.

그 보석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에 은근한 탐욕이 묻어져 나왔다.

귀족들이 먹은 음료를 받으면서 귀족들의 반응을 속속히 들은 나는 클로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가만히 그들을 보고 있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각자 지불할 금액을 앞에 보이는 종이에 써서 시종들에게 건네주세요.”

가장 높은 금액을 적어 내는 사람이 상품을 가지게 되는 방식이었다.

“낙찰되신 분에 대한 것은 이 자리에서 밝히지 않고, 따로 보석을 전달 드릴 예정입니다.”

한 마디로, 그 사람이 보석을 하고 올 때까지 누가 낙찰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귀족들이 자신이 쓴 가격을 지우고 더 높게 적는 것을 본 아리엘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

펠릭스 상단의 연회가 끝나고 난 얼마 후.

그 연회에 가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 시도 때도 없이 티 파티나 연회를 주최했고, 대륙은 펠릭스 상단에 대한 이야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펠릭스 상단의 연회에 간 것은 어떠셨소?”

“그 연회라고 해 봤자 그깟 상인들이 물건 파는 행위겠지. 뭐.”

“그래그래! 그 상단이라고 별다를 게 있겠나.”

파티장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있던 귀족들이 한목소리로 코웃음을 쳤다.

개중에는 그 파티를 간 사람들을 질투하거나 열등감으로 상단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옆에 있던 귀족이 샴페인을 건네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확실히 다른 상단들과는 별다르더군요.”

그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지어졌다.

“에티아 가의 수장부터 윈닉타 상단주, 아쉴라 부인과 같이 내로라하는 분들이 다 모이셨었답니다.”

“그렇게 모두가 모이는 자리는 평기일이 아니면 드문데 말이죠.”

그런 거물들이 참석한 연회를 까내리는 거면 그들이 안목이 없다고 스스로 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면 그들의 안목이 부족하다고 광고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제야 펠릭스 상단을 까내리고 있던 무리가 그것을 깨달았다.

그들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파래졌다가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때 옆에 있었던 여자 수인들의 무리가 다가왔다.

“어머나, 이안 카델리온 님을 빼놓으시면 어떡해요.”

마지막 한 방이었다.

‘불쌍해서 그 말은 안 했는데.’

그들 옆에 있었던 남자 수인이 안타까운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봤다.

펠릭스 상단을 까내리던 그들의 안색이 이젠 걱정될 정도로 백지장처럼 변했다. 그들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을 향해 폭탄을 날린 영애들은 그들을 신경 쓰지도 않고 부채를 착, 하고 펼쳐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단정하게 올린 머리와 짙은 남색 재킷.”

“그리고 아름다운 그분의 벽안, 그리고 딱 떨어진 바지핏은 예술이었어요.”

“어떻게 머리를 넘겨서 이마를 드러내도 그렇게 잘생기신 걸까요. 또 하얀색 장갑을 낀 길고 곧게 뻗은 손을 어떻고요.”

연회에 갔다 온 두 영애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쉬워요.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홀라당 제 걸로 만들어 버릴 텐데요.”

영애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살롱들 중 하나인 ‘마르드’를 이끄는 하이에나 일족의 영애가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옆에 있는 영애들 또한 모두 ‘마르드’의 일원들이었다.

“조그마한 틈은커녕, 바늘도 안 들어갈 걸요.”

옆에 있던 영애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펠릭스 연회에 갔다 온 수인들이 보이자 다른 수인들이 그쪽으로 붙었다.

“혹시 누가 그 광물을 낙찰받았나요?”

“그 보석을 걸고 나오는 사람이 사교계에 새바람을 일으키겠군요.”

“그러게요. 도대체 그 소문의 광물의 주인은 누구….”

그러자 다른 영애가 박수를 짝! 하고 치며 방긋 웃었다.

“저희도 몰라요.”

“정확히는 그 연회에 참여한 사람들 중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답니다.”

“그러면…?”

“네. 밝혀지지 않았어요.”

다른 귀족들에게 수없이 시달린 당한 자의 미소였다.

하지만 그 미소 안에는 우월감이 은은하게 서려 있었다.

***

상단의 사무실 안에서는 심각한 분위기가 흘렀다.

클로에는 선을 벌벌 떨면서 서류를 보는 아리엘에 걱정스러운 시선을 건넸다.

한참 동안 종이를 보고 있던 아리엘이 입을 열었다.

“클로에.”

“네?”

“짐 싸.”

“네??”

“짐 싸라고.”

더 큰 곳으로 옮겨야 되니까.

멍하니 종이를 보고 있던 아리엘이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종이를 내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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