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빨랫감을 자기 옆에 잔뜩 쌓아 둔 하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방망이로 빨래들을 두드려 패는 솜씨가 다들 보통이 아니었다.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 위에 하녀들의 말소리가 덧입혀졌다.
제일 어려 보이는 하녀가 빨래를 방망이로 열심히 내려치며 근심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건 제 친구 이야기인데요….”
아. 자기 이야기구나.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친구가 겪었던 일처럼 가명을 써서 말하는 것은 하녀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친구가 당사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어어, 네 친구가 왜?”
그녀는 치고 있던 방망이를 내려두고 앞에 있던 빨래들을 옆에다가 내려놨다. 그리곤 새로운 빨랫감들을 자기 앞에 올려 두고 치기 시작했다.
“제 친구 멜 있잖아요. 그 옆 가문 마구간지기 한스랑 사귀는 친구.”
“저잣거리에 뭔가를 사러 갔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다른 하녀들은 며칠 전, 그녀가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이곳에 돌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런데?”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는데, 남자친구가 보이더래요.”
“그것도 ‘자기야!’라고 부르면서 달려오는 남자친구가요.”
“한창 사이가 좋을 때네.”
방망이질을 하는 다른 시녀들이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걸쳤다.
하지만 흐뭇하게 웃는 시녀들과 달리 말하는 하녀의 방망이질이 더욱 거세졌다. 단조로운 목소리와 다르게 눈빛에서 살기가 맴돌았다.
“그래서 저… 아니, 제 친구가 자기를 부르는 줄 알고 손을 막 흔들었는데.”
퍽! 하는 강렬한 소리와 함께 방망이가 부러졌다.
“옆에 있는 여자도 같이 손을 흔들었던 거죠.”
빨랫감을 사정없이 내리쳤던 하녀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제 속마음과는 다르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렀다.
그리곤 익숙하게 다른 방망이로 바꾸어 빨래를 내리쳤다.
“……?”
“한스가 달려오더니 제 친구 옆에 있는 여자를 포옹하더래요. 그리고 뒤늦게서야 그 여자 옆에 서 있는 제 친구를 눈치챈 거죠.”
그녀가 피식 웃었다.
“알고 보니, 제 옆, 아니 그 친구 옆에 있었던 그 여자랑 만나기로 한 날이었던….”
“그 남자, 미친 거 아니야!”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위에 있던 하녀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옆 가문 마구간지기 한스랬나? 내가 도와줄까?”
머리를 질끈 묶은 하녀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 모습에서 꽤나 흉흉한 기운이 맴돌았다.
“친구한테 말해 줘. 똥 뒤집어쓴 마차는 과감하게 부숴 버리는 거라고. 버리는 것도 안 돼. 부숴 버려야 해.”
‘맞아. 그런 똥 마차는 멀쩡하게 내버려 두면 안 돼.’
아리엘은 격한 끄덕임과 함께 하녀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어머나! 고양이님, 또 오셨네요.”
“한동안 안 오시길래 어딘가 허전했어요. 아리엘 님.”
아리엘이 찾아오는 것이 익숙한 듯 하녀들은 자리를 살짝씩 옆으로 옮겨 아리엘이 항상 앉았던 자리를 비켜 줬다.
고양이의 모습이 그들에게 친숙함을 불러일으켰는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들은 아리엘을 경계하지 않았다.
하긴. 아기 고양이가 그들에게 경계를 살 만한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할까.
그들은 아리엘을 딱 사람 말을 알아듣고 반응할 수 있는 <수인열전 특별편, 세상에 그런 일이!> 에 나올 정도의 영특한 고양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자 하녀들 사이에 가려, 그들 틈에 있던 작고 평평한 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엘은 냉큼 시냇물 졸졸 흐르는 바로 앞에 있는 돌이 있는 곳에 앉았다.
햇빛을 쬐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하녀들은 그곳에 잘 앉지 않았지만, 아리엘에게는 햇빛이 바로 쏟아지는 명당이었다. 고양이의 모습이니 피부가 까맣게 탈 일도 없었다.
나까지 착석한 것을 본 하녀들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아리엘이 귀를 쫑긋 세우며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삼자대면을 하긴 했는데, 그 여자도 사랑한다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에 한 번 박살 내 버리게요.”
“어떻게 하게?”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이 나쁜 새끼야!! 어떻게 양다리를 걸칠 수 있어?’라고 하면서 사람 많은 곳에서 양쪽 허벅지를 세게 차는 건 어때?”
“양다리잖아. 양다리를 못 쓰게 분질러 버리자.”
그러자 주위에 있는 하녀들이 끄덕거렸다.
“하긴, 친구끼리는 닮았다니까 필시 메리 친구 멜도 웬만한 기사 못지않게 강할 거야.”
“아니면 저기 뒷산에 살고 계시는 양 수인님께 부탁드려 봐.”
“그 은둔 속에서 살고 계시는 엄청난 고수를 말하는 거야?”
카델리온의 하녀들이 일반적이지 않은 수준으로 강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뒷산에 살고 계시는 양 수인이 산에 올라오는 그녀들에게 가끔씩 호신술을 알려 주기 때문이었다.
사실 호신술이라고 하기에는 꽤나 과격하긴 하지만.
그래도 호랑이 족이기 때문에 호전적인 성격인 그녀들에게는 안성맞춤인 가르침이었다.
“맞아. 그분은 불의를 못 참으시잖아. 특히 연애에 관련된 문제라면.”
“특히 양다리를 걸치는 걸 제일 싫어하시지.”
“맞아. 자신의 다리가 오염되는 것 같이 느껴지신다고 하셨어.”
그녀들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그분이 양다리를 걸친 수인을 다리로 내려찍으시는 걸 봤는데….”
그녀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확실히 양다리는 무시할 게 아니더라. 그 뒷산 속에 계시는 양 수인 님의 다리는 양다리를 걸친 사람을 향한 정의와 징벌의 다리야.”
그때 다른 하녀가 심각하게 말했다.
“하지만… 복수는 자신이 자기 손으로 직접 해야지 의미가 있는 거잖아.”
“그건 맞는 말이야.”
한창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하녀들이 입을 다물고 생각에 빠졌다.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전투적인 모양이었다.
“…차라리 한스를 말똥 위에 눕히는 건 어때?”
“오 그거 좋다!”
옆에 있는 하녀들이 격한 맞장구를 쳤다. 다른 수인들의 말을 곰곰이 듣던 메리가 입을 열었다.
“…근데 한스는 말똥 냄새도 향기롭다고 할걸.”
그렇다.
한스는 말 성애자였다.
순간적으로 시냇물에서 떠드는 하녀들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하긴. 말똥보다도 못한 쓰레기니까.”
“그럼 말똥 말고 다른 똥은 어때?”
“내가 아는 친구가 그 가문에서 일하는데 거기 닭이랑 돼지도 키운대.”
잠시 가만히 생각에 빠진 하녀가 무언가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아. 거기 요즘 악어도 키운다고 하더라.”
그 말에 옆에 있던 하녀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악어 똥도 신박하네.”
“근데 그쪽 가문을 왜 악어를 키우는 거래?”
하녀들이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눈을 빛냈다. 그것은 대어를 발견했을 때의 눈이었다.
“비밀인데,”
방금 말한 하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위의 귀족들 이야기는 하녀들에겐 좋은 가십거리였다.
아리엘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가 그녀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사실 아리엘은 카온 가의 소가주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하녀들에게 간 것이었다. 물론, 쓸데없지만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얻어걸렸지만.
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이상하게도 하녀들에게서 제일 빨리 퍼졌다.
‘연예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분 같은 거려나.’
“그쪽 아가씨가 악어 종족 수장 가문의 삼남에게 첫눈에 반하셨대.”
“악어 종족 수장 가문의 삼남이라니? 어떻게 만나셨길래?”
다른 하녀가 목소리를 낮춰 수군댔다.
“어머어머, 아직도 모르는 거야?”
“훈련장에서 서로 로맨틱하게 마주했대잖아! 서로 검을 섞으면서….”
호랑이들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그리고 너네 그 소식도 들었어? 카온 가의 소가주가 그렇게 잘 생겼다는 이야기.”
“뭐? 카멜레온 족은 은거하는 종족으로 유명하지 않았어?”
“아니,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 거야!”
“카온 가의 소가주님께서 숲에서 숨어 사는 카멜레온 종족의 불문율을 깨고 연회에 나오셨잖아! 원래는 평기일에나 가주 한 명만 겨우 얼굴을 비치고 사라졌는데.”
‘잘 해내고 있구나. 소가주.’
나는 나름 안심했다.
소가주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끔찍해서 깨어나지 못한 것이지, 현실을 자각시켜 주면 충분히 깨어날 수 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근데, 그게…사실.”
“카온 가(家)의 소가주님께서 엄청난 미인이었다는 거지!”
하녀들이 목소리를 낮춰 쑥덕쑥덕 댔다.
‘…카온 가의 소가주가 그렇게 잘생겼었나?’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잘 보지 못했던 아리엘이 기억을 복기하려고 노력했다.
‘그냥 평범했던 것 같은데.’
열심히 그때를 떠올린 아리엘이 결론을 내렸다.
“우리 가주님보다 잘 생기셨대?”
그러자 그 주변에 있던 하녀들이 무섭게 정색했다.
“우리 가주님은 논외지.”
하긴, 맨날 이안 카델리온만 보고 산 덕에 가뜩이나 심미안만 높아진 아리엘의 눈에 소가주의 얼굴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이안을 제외한 남자가 거의 다 흐릿하게 보여서 큰일이었다.
만약 이안이 알았더라면 속눈썹을 축 늘어뜨린 구슬픈 ‘이 얼굴로도 마음에 다 차지 않는 거야?’라며 헛소리를 시전할 테였지만, 이곳에는 이안이 없으니 상관이 없었다.
아리엘이 돌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그 자리에서 유유히 벗어났다.
***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메리는 편지를 쓰기 위해 침대에 누워 펜을 잡았다.
수신자는 세드리한 저택의 마구간지기 한스.
메리는 그날 밤, 아리엘이 따로 그녀에게 찾아와서 한 말을 떠올리며 그것을 그대로 편지에 따라 적었다.
“한스 주변에 사람 없지?”
“네. 없어요.”
“편지 주고받는 사람은?”
“그것도 없어요.”
“메리, 그냥 돼지똥만 퍼붓기에는 뭔가 아쉽지 않아?”
“그건 그래요.”
“아니면 이렇게 하는 거 어때? 말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 써 봐.”
「이 편지는 아메바 섬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대륙 한 바퀴를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행운을 주었고….」
사각사각 펜이 빠르게 움직였다.
“지금 당신에게 옮겨진 이 편지는 4일 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이 편지를 포함하여 10통을 행운이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주셔야 합니다.”
“아리엘 님, 행운의 편지는 너무 관대한 거 아닌가요? 행운을 빌어 주는 것 같은데.”
“후후, 그냥 들어봐. 여기부터 시작이니까.”
「혹 미신이라고 하실지는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만약 보내지 않는다면 당신은 7일 내로 똥통에 빠져 온몸이 똥 범벅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받는 사람에게 그게 진짜라고 믿게 하려면 구체적인 사례나 통계를 제시해야 하는 법이야. 그러니까 아무 이름이나 지어내서 사례를 만들어.”
메리가 노래를 부르며 거침없이 편지를 적어 내려갔다.
「서쪽에서 이 편지를 보낸 ‘로라’라는 하녀가 있었는데…」
“그리고 그 편지를 다 전달을 못 하면 진짜 똥통에 빠트리는 거지.”
「기억해 주십시오. 이 편지를 보내면 당신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영원한 행복이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불행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편지를 받아도 한낱 장난으로 치부하겠지.’
마지막 문장을 끝마치는 점까지 찍은 메리는 종이를 곱게 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메리가 편지를 쓴 지 정확하게 3일 뒤에 한스에게 익명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그 7일 뒤에는 옆 가문의 마구간 지기 한스가 돼지똥 처리를 맡았다가 돼지 똥통을 엎은 상태로 넘어져 온몸에 똥 범벅이 되었다는 소문이 중앙 도시의 하녀들 사이에서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