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 (76/111)

75.

‘아. 얼어 죽을 것 같네.’

추위를 느끼는 내 체질 때문인지, 호숫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얼음장 같은 물에서 발버둥 쳤다.

이대로 헤엄쳐서 땅까지 가는 것이 좋을까.

이안에게 노로 구해 달라는 눈빛을 보내 달라고 하는 것이 좋을까.

만약 그런 눈빛을 보면 이안이 알아들을 수 있긴 할까.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호수에 빠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안 그래도 낮은 체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과 발을 물 안에서 필사적으로 휘저었다.

‘만약에 헤엄쳐서 땅까지 가면….’

육지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 상태로라면 육지까지 가긴 가긴커녕, 땅으로 올라가는 데까지 필요한 거리의 반 정도 되는 거리마저도 못 갈 것이 분명했다.

‘최대한 배에서 떨어지면 안 돼.’

나는 안간힘을 쓰며 배에 가까이 가려고 버둥거렸으나, 몸은 점점 배에서부터 멀리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호수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호수로 들어온 이안이 나를 덥석 잡았다.

그가 자기 쪽으로 나를 끌어왔다.

나는 힘 없이 질질 그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셀레스틴이 보고 있었다.

‘이 기회로 이안 님이 이곳에 오시면 대화를 나누어야지.’

이안 카델리온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사교계에서 위상이 올라갈 것이었다.

다른 영애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호수로 들어간 이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물론 그들은 단지 이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이었겠지만.

“아리엘. 갑자기 수영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야?”

나를 땅까지 데리고 간 그가 나를 내려놓았다.

이안에게서 멀어진 나는 부르르 몸을 털었다.

몸에 묻은 물방울들이 잔디 위로 떨어졌다.

‘아. 추워.’

나는 본능적으로 이안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따끔거리는 다른 영애들의 시선에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자 수건은 언제 가져왔는지, 앨런이 수건을 이안에게 주었다.

“무릇 완벽한 보좌관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할 수 있는 법이죠. 그래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당황하지 않게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안은 앨런에게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익숙하게 앨런에게서 수건을 가져가 얼굴을 닦고 자기 머리를 한 번 털었다.

원래 자주 입던 하얀색 셔츠와 검은색 바지가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었다. 반쯤 투명해진 셔츠가 선명하게 윤곽이 잡힌 그의 복근을 드러냈다.

물을 어느 정도 털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하얀색 머리칼에서는 물방울이 어깨 위로 뚝뚝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햇볕을 내리쬐고 있는 바다같이 깊은 파란 눈동자가 푸른 유리알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어머….”

“참, 아름답네요….”

누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영애들이 볼을 붉히며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지식한 귀부인들이 불편한 듯 몇 번 헛기침을 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이안을 향한 시선들에 슬금슬금 발을 뒤로 빼며 그에게서 멀어졌다.

“아리엘, 어디가?”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이안이 나를 붙잡았다.

“아리엘, 숨겨놓은 슈라도 있는 거야? 왜 계속 뒤로 빠져?”

그가 나를 들고 자기 다리 위에 올려놨다.

“안녕하세요. 이안 카델리온 님.”

그리고 그가 나를 올려놓자, 셀레스틴이 웃으면서 이안에게 다가왔다.

그것을 본 나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굳었다.

온 근육이 경직됐다.

“시몬드 가의 여식, 셀레스틴 시몬드라고 합니다.”

“아하… 시몬드 가….”

그가 느른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중얼거림이 어딘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시몬드 가의 셀레스틴 영애이군요.”

그가 모르는 사람을 대할 때 짓는 그림 같은 미소를 덧그렸다.

아름답게 휘어진 눈꼬리에 반해 그의 눈동자는 차게 식어 있었다.

“알아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녀가 이안이 아닌,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저 미소는 그 미소였다.

나를 향해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아리땁게 웃는 미소.

‘아니야. 이안은 내가 시몬드 가에만 있다는 걸 알지, 다른 거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익숙한 미소에 내 몸이 오한을 느낀 듯, 덜덜 떨렸다.

셀레스틴이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은근한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이안 님, 그거 아시나요? 아리엘은….”

“물에 빠졌는지라 어서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은데.”

아리엘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그가 웃는 표정으로 싸늘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리곤 추워하는 아리엘을 쓰다듬으며 그 자리에서 몸을 틀어 나갔다.

셀레스틴은 허망히 그 광경을 바라만 봤다.

***

사각사각 펜 소리만 들리는 집무실.

사내 네 명이서 일하고 있는 삭막한 집무실에는 답지 않게 어울리는 꽃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리엘이 없는 적막한 집무실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르게 시간이 지날수록 이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번져가고 있었다. 화제의 펠릭스 상단이 자신들의 경매에 초대한다는 초대장을 보내왔지만 그 초대장은 그의 안중에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앨런은 아까 전부터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창문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앨런을 한 번 쳐다본 이안이 비뚜름히 웃으며 말했다.

“앨런, 혹시 일이 더 필요하면 저기 있는데. 줄까?”

“괜찮습니다. 그러는 이안 님도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계십니다만.”

그가 책상을 톡톡 치며 말했다.

“어떤 영특한 생물체의 기행이 기대돼서.”

똑똑.

집무실 창가를 두드리는 무심한 노크 소리가 났다. 이안이 익숙하게 창문을 열자, 붉은 꽃이 툭 하고 떨어졌다.

붉은 꽃이 툭 하고 집무실에 떨어지자, 나무가 흔들리면서 황급히 사라지는 조그만 기척이 느껴졌다.

동부에 다녀온 이후, 나무를 타고 그의 집무실에 하나둘씩 꽃을 던져놓는 아리엘의 기행은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젠 나무를 제법 잘 타네.’

처음과 비교했을 때, 사라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원숭이들의 나무 타는 속도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월등한 성취였다.

피식 웃은 이안은 그 꽃을 주워 물이 담겨 있는 꽃병에 꽂았다.

빨간 꽃, 주황 꽃, 노란 꽃, 잎사귀만 있는 식물….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로 맞추어진 꽃들 사이에서 빨간색 꽃이 추가되었다.

“내일은 주황이겠네.”

시들어가는 꽃들에게 그가 회복계 페로몬을 흘려 넣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앨런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가 죽어가도 의식적으로는 자기 페로몬을 쓰지 않으시는 분이 지금 꽃에다가….’

그의 능력은 경이로울 수준이었지만, 아리엘이 오기 전까지 그는 12살, 고용인들을 다 죽여 버린 그날 이후 한 번도 자신의 페로몬을 의식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던 꽃잎들이 하나같이 생기를 머금고 다시 활짝 피어났다.

꽃들이 다시 활짝 피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본 이안은 읽던 종이를 향해 마저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다음 줄글로 내려가지 않았다.

***

‘내가 준 꽃은 어떻게 하려나.’

시들 것을 대비해서 하루마다 다른 꽃을 주고 있는 건데.

집무실에 꽃을 던져놓고 나서 인간으로 변한 나는 평소와 다르게 내 팔 사이에 로맨스 소설을 꽂아 넣고 정원을 거닐었다.

뱃놀이에서 이안이 나를 구해 준 이후, 그가 모르게 하나씩 꽃을 물어다 주다 보니 나무 타는 실력이 수준급이 되었다.

‘이제 웬만한 동물들보다는 잘 타지 않을까.’

꽃을 하나씩 물어다 주는 건 나를 구해 준 것에 대한 나름대로 감사 표시였다.

열심히 정원을 거닐던 나는 항상 가는 거대한 나무 밑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상태였다.

질 좋은 잔디만 쓰는 이곳은 아무것도 깔지 않고 앉아도 엉덩이가 아프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남편님! 이러시지 않기로 했잖아요!’의 첫 장을 펼쳤다.

‘정말 예전에 레아가 가져갔었던 책도 그렇고 여기 서재에서는 장르에 상관없이 책이 참 많다니까.’

이곳 서재는 3개 정도가 있는데 하나는 카델리온 가주만 쓸 수 있는 곳, 하나는 그 가족까지 쓸 수 있는 곳,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외부인들까지 쓸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나는 항상 외부인들까지 쓸 수 있는 서재에 가서 책을 골랐다.

이 책의 내용은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하는 귀족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였다.

로맨스 소설 시장에서는 첫눈에 반해서 결혼까지 하는 내용보다 사랑 없는 결혼에서 사랑이 생겨나는 책들이 상위권을 선점했다.

‘아마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이게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는 거겠지.’

책 첫 장을 펼친 나는 결말까지 거의 모든 내용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읽었다.

‘원래 이런 책은 클리셰를 보려고 보는 거지.’

나는 책에 몰입한 채 책장을 휙휙 넘겼다.

서로를 오이 보듯 쳐다보던 주인공들 사이에서 묘한 핑크빛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다.

‘가자.’

나는 마음속으로 두 주인공을 응원하며 빠르게 책을 읽었다.

꽤나 빠르게 책을 읽다 보니, 어느덧 극적인 연출을 위해 여주인공이 악당에게 납치를 당하고 있는 장면에 다다랐다.

결국 남주가 납치되어 있던 여주를 구해 주었고, 둘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 장면을 읽고 있던 나는 책장을 넘기려던 것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실종되었다던 카온 가의 소가주.

그리고 저택에 돌아오고 나서 카온 가의 소가주는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정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그게 정상이긴 하지.’

소설 속의 세계와 현실의 차이였다.

‘…근데 여기도 소설 속의 세계잖아.’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설 속의 소설인가.

내가 전생에서 읽었던 소설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곳이 되었고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소설을 읽고 있었다.

‘신기하네.’

이유 없이 신기했다.

‘근데 카온 가의 소가주는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저번에 보았을 때 상태가 심각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뒤 아무런 소식도 못 들은 것 같은데.

‘그걸 이겨 내는 건 그의 몫이니까.’

그래도 이것저것 궁금했던 나는 책을 덮은 뒤 다시 고양이로 변했다.

처음에는 한 번만 변해도 온몸이 꽝꽝 얼어 버리는 것 같았는데, 몇 번 변하고 나니 인간화를 하는 데 능숙해진 것인지 여러 번 거듭해서 변해도 죽을 것같이 춥지는 않았다.

고양이로 변한 나는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드레스를 곱게 접었다.

‘완벽해.’

나는 각 잡힌 드레스를 보면서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앞에 있는 책을 톡톡 쳤다.

물론 책은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남편님! 이러시지 않기로 했잖아요!’의 책 커버가 정갈하게 닫혀 있었고, 그 위에는 군대에서나 볼 법한 각으로 접힌 드레스가 위에 올라와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은 떠난 자리도 아름답다.’

뿌듯하게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기분 좋게 꼬리를 살랑이며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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