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편한 옷차림으로 방에 들어온 이안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추웠나 보네.’
이불 한 가운데가 볼록하게 올라와 있었다.
이불 안에서 가늘고 불안정한 숨소리가 들렸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 올렸다.
이불을 걷어 올리자 찬 기운이 느껴지는지 검은 고양이가 미적미적 몸을 움츠렸다. 뒷발과 머리가 닿을 정도로 동글게 몸을 만 아리엘은 본능적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려고 했다.
사람이 아닌지라 침대 시트를 말아쥐는 것에는 실패로 그쳤지만.
‘많이 추운가.’
그녀의 몸에서도 평소보다 많은 한기가 느껴졌다.
‘페로몬을 쓴 것 같더라니.’
초반 카델리온 저택에 오고 난 직후 며칠을 제외하면, 아리엘의 잠버릇은 원체 얌전한 편이었다. 그의 배 위에서 잠이 들면 다음 날 아침 얌전히 그의 배 위에서 눈을 떴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때리거나 차는 것 같은 폭력적인 잠버릇 또한 없었다.
가끔씩 색색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오들오들 떨기는 했지만.
그가 그녀의 털을 쓰다듬자 잔뜩 힘을 주고 굳어 있던 그녀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공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아 올렸던 아리엘의 몸이 나른하게 펴졌다.
이안은 계속 아리엘의 털을 넘기다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아리엘이 본능적으로 그의 품 안에 파고들었다.
그러자 색색거리며 불안정하게 나던 숨소리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묵묵하게 그녀의 털을 쓰다듬었다.
사람들 앞에서 으레 짓던 친절한 미소를 지워 낸 그의 얼굴은 무미건조했다.
‘넌 도대체 어디가 그렇게 불안한 걸까.’
넌 대체 무슨 과거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녀가 그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 한다는 것, 그것이 그녀의 과거와 관련된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아리엘은 항상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아리엘이 책을 볼 수 있게 됐을 때부터 책이란 책은 강박적으로 읽어 내려 갔다.
마치 어딘가 쫓기는 것 같았다.
외출할 때 가끔씩 행방이 묘연해지는 그녀가 걱정되었다. 뇌가 싸늘하게 식고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감정은 걱정이라는 단순한 두 단어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었다.
‘소가주가 멀쩡히 자기 방에서 걸어 나왔다는 것도.’
불과 반나절 전에 소가주가 멀쩡하게 방 밖으로 나왔고, 몇 시간 전에 가주에게 해야 할 일을 다시 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마 아리엘의 영향이었겠지.’
그리고 소가주가 일어났다는 반나절 전, 그는 카멜레온 가주와의 대화가 끝나기 바로 직전이었고, 아리엘만이 혼자 방에 있었을 시간 때였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인간화를 해서 몸이 차가워진 것이겠고.’
차가운 털이 그의 손에 감겼다.
그녀의 털을 쓰다듬던 이안은 밤에 그레이스 마르코스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표범의 이다스가 동부에 온 이유는 서부를 제외한 세 곳 중 동부가 가장 약할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저 역시 이건 부정하지 못하겠네요.”
“몇백 년 동안 해먹은 카델리온과 세르디한보다는 아직 수장 자리를 빼앗은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마르코스 가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부가 공격하려는 첫 번째 가문은 마르코스 가문이 되겠죠. 만약, 그들이 진심으로 동부, 남부, 북부 중 한 곳을 공격하게 된다면.”
그레이스 마르코스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면 서부가 생각보다 굉장히 빠르게 성장한 것은 분명했다.
여태까지 서부를 완벽하게 집어삼킨 가문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레이스 마르코스는 그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완벽하게 서부를 지배하게 된 아쉴라가 동부로 쳐들어오는 것.
“그래서 원래 조사하고 있었던 조사 기록들을 다시 검토해 봤습니다.”
“근데?”
“빈민가의 아이들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도 실종이 되었더군요. 그것도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습니다. 북부와 남부랑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빈민가 수인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것은 지역에 상관없이 원래 흔히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빈민가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평민들, 그리고
‘카온 가의 소가주까지.’
은둔하면서 사는 종족들을 노렸기에 아직까지 사교계에 소문이 나지 않았지만, 이것은 큰일이었다.
‘인신매매였을까.’
하지만 그랬다면 카온 가의 소가주가 정신이 이상한 상태로 돌아오진 않았을 것이었다. 오히려 인신매매였다면 돌아오지 않고 영영 사라지는 것이 더 말이 됐다.
‘그가 발견됐던 장소가 산속이라고 했지. 지역의 경계를 맞대고 있는 산속.’
그가 아리엘을 쓰다듬고 있던 손길을 잠시 멈칫했다.
“아직까진, 그들이 무얼 하는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아이들의 경로를 추적했더니,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져 이동했습니다.”
“하나는 페로몬이 있는 일반 아이들의 무리였고,”
여기까지는 특이한 것이 없었다. 일반적인 아이들은 인신매매가 아니더라도 많이 없어지니까. 그리고 실질적으로 페로몬이 발현된 이들은 수인들을 사고파는 시장에서 어느 방면이든 더 값을 쳐주었다.
“다른 하나는.”
그러나 특이한 것은 이 부분부터였다.
“검은색 머리나 녹색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옮기는 무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둘 다 추적하는 도중 경로가 끊겼죠.”
그리고 이 말을 들었을 때 이안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리엘을 쓰다듬고 있던 이안의 손길이 멈추었다.
검은색 머리에다가
녹색 눈.
‘…아리엘.’
공교롭게도 아리엘이 가지고 있는 머리카락 색깔과 눈의 색깔이랑 똑같았다.
그리고 그레이스가 이를 알아본 듯 그를 향해 매끄럽게 웃으며 경고했었다.
“저는 북부의 수장이 꽤나 귀여운 검은 고양이를 키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고양이 수인이려나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북부의 수장께서 키우고 계신 고양이는,”
“검은 머리에다가 녹색 눈이죠.”
그리고 컵을 만지작거리던 그레이스 마르코스는 기어코 그가 듣고 싶지 않았던 말까지 꺼냈다.
“누군지 모를 그 사람도 고양이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더군요.”
서부의 짓인지는 확실치 않다, 라는 이야기였다.
다른 곳일 수 있고, 서부가 저지른 짓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아리엘을 노리고 있었다. 반응을 보아 아리엘은 이를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암살자의 습격도 이것과 연관된 걸까.’
심상치 않은 그의 감정 파동에 그의 페로몬이 날뛰려고 하기 시작했다.
‘아리엘 너는 도대체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는 거야.’
너에게 알려 줄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이, 요동치고 있는 그의 감정과는 반대로 아기 고양이의 등이 평온하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
“여러분 저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어머, 이안 카델리온 님이 여기를 오실 줄이야.”
“오늘 하루 운, 아니 일 년 운 다 썼네요.”
소녀들이 붉게 달아오른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본 것같은 표정이었다.
“이안 카델리온 님이 여기를 오실 줄은 몰랐는데….”
“아직 이안 카델리온 님과 약혼한 영애는 없죠?”
“만약 딸이 있었으면 짝지어 주고 싶었을 텐데….”
귀부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근데 이안 카델리온 님의 손바닥 위에 있는 저건 무엇일까요…?”
“작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긴 한데, 까만 털이….”
“검은 고양이…?”
그 한 마디로 순식간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분위기가 싸해졌다.
자고 일어났더니 호수였다.
머리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한 맞춤형 밀짚모자가 씌어 있었다.
“피곤하면 더 자도 되는데.”
이안이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며 태연하게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 걸까.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안과 앨런을 차례로 바라봤다.
얼마나 잔 건지, 하늘 한가운데에 있는 해가 바닥을 쨍쨍 내리쬐고 있었다.
앨런은 여느 때처럼 가장자리가 좋은 그늘에 자신이 앉아 있을 곳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가 핀 돗자리는 꽤나 넓은 크기였다.
햇빛이 걸쳐져 있는 그늘 밑이라니, 잠자리로 딱이었다.
‘머리는 그늘에 둬서 어둡게 자고, 몸을 햇볕을 쬐면서 나른하게.’
완벽해.
나는 이안의 품에서 내려와 돗자리로 가서 다시 자려고 했다.
“다시 자게?”
그러나 이안이 나를 집어 들며 물었다.
‘나 좀 자면 안 될까?’
막 잠에서 깨어나 돗자리 위에서 나른하게 누워 뒹굴거리던 내가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아직 잠이 다 달아나지 않아 납덩이보다도 더 무거운 머리가 꾸벅꾸벅 밑으로 떨어졌다.
그걸 본 이안은 내 턱 밑을 살살 긁어 주더니 비뚜름하게 웃었다.
“이러다가 들고 가도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겠어.”
‘네가 지금 들고 가고 있잖아.’
나는 입을 벌린 채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이안이 비뚜름하게 웃으면서 뻔뻔하게 답했다.
“그렇게 잠에 취해 있으니까 누가 들고 가도 모르지. 아리엘.”
‘네 덕분에 이미 잠이 다 깼어.’
나는 그를 한 번 올려다본 뒤, 자고 있는 동안 내가 끌려온 곳을 다시 한번 제대로 둘러봤다.
예전에 루이즈와 같이 호수에 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축제 기간이라서 그런지 호숫가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호수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렇게 호수에 떠다니는 배들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호수가 점점 가까워졌다.
배에 올라탄 이안이 나를 내려 줬다.
‘우와.’
얌전히 그에게 안겨 다니다가 두 발이 자유로워진 나는 배 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돌아다녔다.
앞을 보니 돗자리를 다 편 앨런이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었다.
배가 부드럽게 육지에서 멀어졌다.
전생에서도 배 한 번 타 보지 않았던 나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잠에 깼을 때의 짜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기분 좋다.’
노에 가로저어지는 물소리가 차르륵 하고 들려왔다. 잔잔한 물결의 파도를 보면서 나는 배 앞으로 나아갔다.
물 내음이 물씬 풍겼다.
잔잔한 물결과 시원한 물 내음.
그리고 사람들이 웃으며 떠드는 소리와 바람 소리까지.
나는 배의 선두에 서서 앞을 가만히 응시했다.
“배를 이끌고 있는 늠름한 고양이 선장이네.”
뒤에서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리엘, 바닷속 생물들을 이끄는 거대한 아기 상어가 되기로 한 거야?”
왜 그냥 상어가 아니라 아기 상어인데.
선두에 서 있었던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그를 쳐다봤다.
“숨겨진 자기 동생을 찾은 것 같다고 에티아가 가주가 보면 감격에 겨워하겠는걸.”
나는 물끄러미 이안을 쳐다봤다.
‘쟤는 내가 에티아 가주를 만난 걸 알까? 당연히 모르겠지.’
내 앞에 디저트를 내려놓으면서 그 디저트에 대해 뿌듯한 표정으로 설명하는 에티아 가주는 어딘가 친절한 면이 있었다.
그때, 어디 한 곳에 멍하니 시선이 붙박혔다.
“아리엘, 상대가 누구든 연애는 안 돼.”
나는 이안의 헛소리에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내 눈동자가 호숫가에 있는 영애들 중 한 명에게 고정되었다.
익숙한 하얀색 머리칼이었다.
그때, 내가 바라보고 있던 사람이 뒤를 돌아 호수쪽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연두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살짝 동공이 커지더니 매끄러운 웃음을 입에 담았다.
‘…셀레스틴?’
찰나였지만 확실했다.
“아리엘?”
아리엘과 마주 보고 있어 그녀가 무엇을 보는지 모르던 이안이 그녀를 불렀다.
아리엘은 자신과 눈이 마주친 사람을 피해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배 끄트머리에 서 있던 아리엘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반가워.’
셀레스틴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면서 아리엘을 보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쿵,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끝으로 첨벙, 누군가가 호수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