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 (74/111)

73.

“어제 이다스 가(家)가 동부로 왔습니다.”

이다스 가(家)가 동부에 왔다.

그 말은 이다스 가의 선대 가주나 이다스 가의 가주가 동부에 ‘방문’했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덕분에 북부의 수장 말대로 공사가 매우 다망할 수밖에 없었죠.”

이다스 가(家)가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에는 동부에 눌러앉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 말에 빙글빙글 웃고 있는 이안의 웃음이 멈췄다. 그가 머리를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각했다.

이다스 가(家)는 전대 서부의 수장이었던 가문이었다.

8년 전의 환희의 전쟁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수장 자리에서 내려왔다고 했다지만, 전대 수장이라는 것은 무시하지 못할 만한 위력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에게는 서부의 땅에 대한 애정이 깊게 뿌리 내려 있었다.

서부에 있는 다른 어떤 가문보다도 그들은 서부를 애정했다.

서부는 그들의 모든 것이었다.

‘근데 그런 그들이 서부를 떠났다니.’

그들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쫓겨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앞에 있는 그레이스 마르코스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상대를 속이려고 하는 기색 없이 진지한 분위기만 맴돌았다.

그녀의 반응을 본다면 그 말이 사실임이 분명했다.

‘헌데, 진짜 떠났다고?’

그들이 떠날 경우는 두 가지 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그들이 쫓겨나거나,

두 번째는….

“서부가 완전히 뱀의 손아귀 안에 들어갔나 봅니다.”

그들이 내쫓지 않았더라도 서부가 완전히 뱀의 손아귀 안에 들어가 그들이 있는 것이 소용없게 되었을 때.

그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동부로 내려올 정도로 물러났다는 것은 그 안에서 맥을 못 추릴 정도였다는 건데.”

그녀가 와그작, 사탕을 씹어먹곤 말했다.

“그들의 말로는 서부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로 빠르게 장악하는 건 전례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곤 구불거리는 머리를 한쪽으로 넘겼다.

“나만 해도, 전 수장이었던 히아트 가에서 사사건건 물고 늘어져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인데.”

여우 새끼들이 어지간히 거슬리게 한 것이 아닌지,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곤 쯧 하고 혀를 찼다.

“시답지 않은 걸로 왜 이리 귀찮게 하는지.”

“그래서 이다스는 받아들이기로 하셨습니까?”

“예전에 빚을 진 것도 있으니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아하.”

그가 느른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가 예전에 말한 ‘빚’은 8년 전의 환희의 전쟁에서 일어난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늑대와 표범은 다른 편이 되어서 싸웠으니까.

그렇게 적진으로 마주친 전장에서 이다스 가주는 그레이스 마르코스를 베어 내 숨통을 끊어낼 기회가 두어 번 있었다.

‘하지만 이다스 선대 가주는 그녀를 살려 보냈고.’

덕분에 그레이스 마르코스는 동부의 히아트를 밀어내고 새로운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 역시 그레이스 마르코스도 알고 있었다.

잠시 차로 목을 축인 그녀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표범은 특별한 전력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이 강하다는 것은 웬만한 수인들이 다 아는 사실이고.”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들의 전력을 이다스는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안이 느른히 웃었다.

“그들이 남부나 북부가 아닌 동부로 왔다는 것은….”

“곧 동부가 위험해질 것이라는 뜻이겠죠.”

그레이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

“왔어요?”

경매장과 이어져 있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 낯익은 얼굴이 나를 반겼다.

나른한 은색 눈동자가 휘어지며 소파에 누워 있던 그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금 쟤랑 말하기에는 너무 피곤한데.’

반갑지 않은 그 얼굴에 내 이마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가면으로 가리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바쁘디바쁜 윈닉타 길드장이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걸까.

원작에서 워낙 베일에 싸여 있는 인물이다 보니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저번에 한 번 만나기로 한 거 이행한 걸로 보면 될까요?”

내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 이건 제가 찾아간 거니 해당되지 않죠.”

그가 능글능글하게 웃다가 눈썹을 파르르 떨며 애처롭게 굴었다.

“설마 제가 꺼려지시는 건가요?”

처연한 표정과 밑의 눈물점까지 한데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묘한 분위기를 내뿜는 그의 얼굴은 이안 덕분에 의도치 않게 눈이 높아진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피곤하다.’

나는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말했다.

“제가 데려갈 수인은 어디 있나요.”

나는 굳이 ‘낙찰한 노예’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 에둘러 말했다. 그러자 그가 흥미로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 수인을 사셨습니까.”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일까.

곰곰이 생각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눈이 마음에 들어서요.”

거짓은 아니었다.

자신을 앞에 둔 귀족들을 당장이라도 버리려고 했던 이의 눈.

그녀의 눈이 마음에 들었다.

원작에서 자신을 사 간 귀족을 죽이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도 멋지게 보였다.

‘나는 시몬드 가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그러나 아직은 힘을 아껴야 했다.

앞에 있는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부담스러울 정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근데 길드장님은 왜 여기까지 찾아오신 건가요.”

“당신을 보려고요.”

그가 한족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아직, 내가 사기로 정한 수인을 내어 줄 마음이 없는 것같아 보였다.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다시 언급했다.

“제가 데려가기로 한 수인을 빨리 만나 보고 싶습니다.”

“정 원하신다면.”

그가 내 앞으로 종이를 두 개 내밀었다. 하나는 노예의 증서였고, 다른 하나는 계약서였다.

그 계약서는 노예를 사고 대금을 지불한다고 하는 계약서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 금액을 윈닉타의 길드장이 지불하도록 한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다른 이상한 조항이 없나 꼼꼼히 그것을 훑어보았다. 특히 2포인트로 적혀져 있는 글씨가 있는지 없는지까지 다 확인을 마친 나는 계약서에 장난질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후에, 대충 비안 웨스트라고 끄적이며 사인했다.

“꼼꼼하기도 하셔라. 다른 고객분들은 계약서를 잘 보시지 않으시던데.”

내 사인을 받은 계약서를 본 그가 빙긋 웃었다.

어딘가 오소소 솜털이 돋아나는 느낌이었다.

“꼼꼼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그것이 계약서라면 더더욱.”

나는 앞에 있는 노예 증서를 가져갔다.

“살기 각박한 세상이잖아요. 더러운 세상이라고 해야 하나.”

한눈팔면 떼어먹히는.

한 마디로 너 못 믿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것 말고도 다른 뜻도 있긴 했지만.

나는 시니컬하게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데려갈 수인에게 안내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겨 있는 동작이었다.

“하, 하하.”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문고리를 붙잡은 그가 잠시 멈칫하며 웃었다.

“각박하고 더러운 세상이라….”

그 누구도 윈닉타의 상단주 앞에서 이 세상이 더럽다던가 각박하다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문고리를 잡고 내리려던 그가 나를 돌아봤다. 나는 빨리 문고리를 내리라는 듯 고개를 까닥했다. 얼굴에는 여전히 백호 가면은 쓰고 있는 상태였다.

“마음에 드는 말이네요.”

그가 문고리를 내리고 문을 열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따라갔다.

“여기 있을 겁니다.”

방을 안내한 그는 ‘즐거운 시간 되시길.’이라고 속삭이며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끼이익 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내는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갔다.

‘반항이 심해서 혼자 가둬 놓은 거겠지.’

독실이었다.

방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채 깜깜했다. 말 그대로 밀폐된 공간이었다.

날카롭게 잘 벼린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해 박혔다. 콕콕 박히는 살기에 몸이 따끔할 정도였다.

‘이런 식이면 곤란한데.’

화르륵,

나는 노예 증서를 그가 준 촛불에 태워 버렸다. 촛불의 조그만 불이 종이를 먹으면서 몸덩이를 부풀렸다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이제 나는 너의 주인이 아니야.”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내가 발을 돌려 이곳을 빠져 나가자 그녀가 나를 따라왔다.

“하지만 너에게 제안 하나를 하고 싶어.”

“내가 하는 제안이 마음에 들면 나와 같이 있고, 아니면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나는 뚜벅뚜벅 어두운 지하 통로를 걸어갔다. 이리로 직진하다가 나오는 계단에 가면 된다고 했으니까 혼자서 못 갈 것도 없었다.

“너에게 돈을 지원해 줄 사람이 곧 올 테니까, 돈은 가지고 가든가.”

“붙잡지 않아.”

어차피 이렇게 적대심이 많아 봤자 아무것도 못한다.

오히려 하는 일에 피해를 준다면 모를까.

“그리고 이건 노예에게 하는 것이 아닌, 능력이 뛰어난 수인에게 하는 제안이야.”

나는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지하 통로가 아닌, 어둑어둑한 뒷골목 거리가 보였다. 눈치가 빠른 클로에가 나에게 다가와 주변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소리를 차단했다.

“정보 길드 하나 만들어 볼 생각 없어?”

클로에가 아무 표정도 없이 내 옆에 있는 그녀에게 로브와 돈주머니를 건넸다. 돈주머니에 있는 정도의 돈이면 한 달 동안 사는 돈으로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그 돈을 불릴 능력이 충분히 있었다.

원작에서도 거의 한 푼 없는 상태에서 돈을 어마어마하게 불렸으니.

“하지만 하려면 똑바로 해야 해.”

그녀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여태까지 숨겼던 페로몬에 대해서 밝혀야 한다. 이용당하는 것을 치가 떨리게 싫어했던 그녀는 자기 페로몬을 숨겼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새가 보는 풍경을 보고 심지어 그와 교감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보 길드를 세우는데 어마어마한 메리트였다.

그러니 이것은 그녀의 의지에 따른 문제였다.

그녀가 다루는 페로몬이었으니까.

“만약 정보 길드를 한 번 해 보고 싶다면 마차 대여소로 와서 쟤 따라가.”

아리엘이 옆에 있는 클로에를 가리켰다.

어차피 선택은 네 몫이라는 듯,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리엘은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어떻게 되었으려나.’

어느덧 카멜레온 저택에 몰래 들어와 침대 위에 올라가 있는 나는 멀뚱히 누워 있었다.

‘슈엘라가 클로에에게 갔을까.’

만약 둘이 만나서 의기투합을 한다면 그만큼 좋은 시나리오도 없었다.

‘슈엘라는 놓치고 싶지 않았는데. 이게 잘한 선택일까.’

그녀를 풀어 주겠다고 하고 제안을 한 것이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다.

딱히 어떤 강렬한 확신이 들지도 않았다.

‘그래도 클로에에게 갔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었다.

‘하지만 굳이 없어도 그녀는 나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이안…. 기다려야 하는데.’

이안은 일이 길어지는지 아직까지도 오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갖가지 생각을 하며 점점 느리게 눈을 끔뻑끔뻑 감았다 떴다. 그러다가 점점 무거워지는 눈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을 했어….’

아리엘이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아 꾸물꾸물 이불 안으로 더 깊게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는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퍼졌다.

아리엘이 잠들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조용하게 방문이 열렸다.

조용하게 열린 방문 사이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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