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 (73/111)

72.

나는 평민들의 일상복을 걸치고 클로에가 준 짙은 고동색 로브를 그 위에 둘렀다. 노예를 낙찰했을 때 낙찰자를 알아볼 수 없게 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례에 따라 얼굴에는 앞의 길거리에서 파는 하얀색 호랑이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일반 축제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면을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터라 눈에 띄는 꼴은 아니었다.

똑. 똑똑똑. 똑. 똑.

앞에 있는 문을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자 문이 열리면서 노파가 얼굴을 내밀었다. 부슬부슬 헝클어진 머리는 잠에서 막 깨어난 듯이 보이게 했다.

“게 무슨 일이여? 뭔데 이리 시끄럽게 남의 집 문을 두드리고 난리여?”

나는 아무 말 없이 윈닉타 길드장에게서 받은 초대장을 노파의 눈앞에 내밀었다. 그 초대장을 발견한 노파는 잠시 눈이 커지더니 성가신 기색을 지우곤 웃었다.

“어이구. 이 미천한 소인이 귀하신 나리를 알아보지 못했사옵니다.”

부드러운 웃음 안에 가려진 눈동자가 날카롭게 아리엘을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를 훑어본 노파가 확인을 다 끝낸 듯 문을 열어주며 아리엘을 들여보내 줬다.

“이리, 들어오시죠.”

문을 열리니 평범한 가정집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람한 체격의 다른 남자가 튀어나오더니 나를 향해 말했다.

“이제부터는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그를 따라갔다.

그는 방문으로 보이는 문을 벌컥 열었다.

문 뒤에는 방문이 아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펼쳐져 있었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여기서 누굴 죽이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앞장서서 걸어가는 남자를 묵묵히 따라갔다. 날 맞이했던 노파나 지금 따라가는 남자나 윈닉타에서 꽤나 고위직을 맡은 수인들일 것이다.

괜히 입을 열어서 정보를 털리는 것보다는 얌전히 입 다물고 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좌석에 가면 번호판이 있을 겁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왔을 때 번호판을 들고 가격을 외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 외의 여러 가지 설명을 듣고 나니, 어느덧 63번이라고 써져 있는 번호판이 올려진 테이블과 앞에 있는 1인용 소파를 향해 그가 손짓했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혹시나 직원이 필요하다면 손을 들어 주십시오. 그러면 바로 달려올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1인용 소파가 생각보다 푹신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앉아 있는 나를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인 그는 빠르게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경매가 시작되었다.

“방문해주신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이제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와아아아. 흥분한 귀족들의 함성이 들렸다.

“우선, 바느질을 잘하는 수인입니다. 10실버부터 시작합니다!”

“20실버.”

“30실버.”

바느질, 빨래를 잘하는 일반적인 수인들부터 시작해서 점점 갈수록 소위 말하는 ‘값어치가 높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다음은 에스타 섬에서 온 수인입니다. 꽤나 괜찮은 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20골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30골드!”

“35골드!”

경매장의 분위기가 점점 달아오르면서 떠들썩해졌다. 나는 무심하게 앞의 광경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슈엘라가 나오지 않았네.’

그녀가 꽤나 특이했기에 늦은 순서에 나올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늦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한참 동안 나는 짐승같이 가격을 올려대는 귀족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경매품입니다.”

“그 희귀하다는 파랑새 수인입니다! 머리 같은 경우도 물빛 색으로 빛나고 있지요. 그리고 몸매도….”

그가 음흉한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다.

한 번 끈덕지게 훑어보고 침을 한 번 꿀떡 삼켰다.

“그쪽으로 쓰시기에도 만족스러우실 겁니다. 하하하.”

사회자가 질 나쁜 농담을 던지며 소개했다.

그러자 경매장 안에서 크게 웃는 소리들과 함께 여유로운 휘파람 소리들이 들렸다.

‘…파랑새?’

경매 내내 시큰둥하게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았다. 무대 위에는 옷이라고 칭하기도 애매모호한 천 한 자락을 걸친 수인이 수갑에 묶인 채 서 있었다.

눈빛 하나는 누구를 찢어 버릴 듯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찾고 있던 슈엘라가 맞았다.

뒤에서는 질 나쁜 농담들이 들려왔다.

“둘이서 돈을 합치는 건 어때?”

“에이, 그럼 재미는 누가 보나.”

“둘이 같이 보면 되지. 크크큭.”

가면이 그들에게 익명성을 부여하면서 거리낄 게 없어진 귀족들의 저질스러운 말들이 곳곳에서 들렸다.

의도치 않게 그 말을 들은 나는 당장 고막을 씻어 버리고 싶었다.

가면이 준 익명성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하여금 뇌가 텅 비어 있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는 말들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저 정도면 책에서 슈엘라가 자기 주인을 죽이고 나올 만했네.’

원작에서 자기를 사들인 주인을 처참히 살해하고 나온 그녀가 이해되었다.

‘뒷골목에 있었던 수인들부터 시작해서 저놈들까지. 어쩜 대가리가 제대로 박혀 있는 애들이 없는 거야. 무슨 짐승들인가.’

굉장히 더러워진 기분에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경매 시작하겠습니다. 시작은 100골드로 하겠습니다!”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금액이었다. 몇몇 귀족들은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110골드!”

“120골드!”

번호판을 드는 중간중간에 노골적인 의미가 담긴 휘파람 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번호판을 놓고 가만히 있었다.

“200골드.”

뒤에 있던 남자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러자 경매장에 일순 정적이 찾아들었다. 아무도 나오지 않자, 박수 소리와 함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남자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잠시 기다리던 사회자는 뜸을 들이다가 외쳤다.

“아무도 없습니까? 3초 센 후에 낙찰을 진행하겠습니다.”

뒤에서 킬킬거리며 웃는 남자의 뒤통수를 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극적인 효과를 위해선 더 참아야 했다.

“3.”

“만약 자네가 가지게 된다면 나도 좀 맛 좀 보여주게.”

아무래도 내 뒤에 있는 남자가 원작에서 그녀를 낙찰받게 되는 주인이 맞나 보다.

“2.”

숫자가 가까워질수록 흥분으로 가득 찬 경매장이 터질 것 같았다.

“1.”

“400골드.”

바라던 타이밍이 오자 숫자판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한순간에 경매장에 찬물이 부은 듯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400골드, 400골드 나왔습니다!”

그러자 사회자가 힘차게 외쳤다. 뒤에 있던 남자가 돈이 꽤 있는 가문인지 그가 가격을 더 올렸다.

“410.”

그리고 나는 바로 방어했다.

“500 골드.”

“510.”

“600골드.”

어느새 경매는 그와 나 사이의 경쟁으로 번져 있었다.

“610.”

보지 않아도 활활 타오르는 그의 눈빛에 의해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이제 이 짓거리도 그만해야지.’

나는 굳이 귀찮게 가격을 찔끔찔끔 올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내 돈도 아니었다. 물론 내 돈이었어도 찔끔찔끔 올릴 필요는 없었겠지만.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1200골드.”

내 말이 끝나자, 뒤에서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번호판을 던지는 소리가 났다.

제 경매장은 쥐새끼 한 마리도 돌아다니지 않는 듯 완전한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를 향해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었던 슈엘라도 놀란 눈빛이었다.

“카운트 안 하나?”

나는 턱을 까딱이며 앞에 있는 사회자에게 말했다.

“ㄴ, 네! 해야죠.”

그러자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사회자가 화들짝 놀라면서 카운트를 하기 시작했다.

“카운트 시작하겠습니다!”

“3.”

“2.”

넓은 경매장에 사회자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1.”

땅땅땅.

최종적으로 경매를 마치는 소리와 함께 앞에 있는 파랑새 수인의 행방에 누구에게 향할지가 정해졌다.

***

아리엘이 경매에 가서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이 더러운 기분을 한껏 느끼고 있는 그 시각. 이안은 마르코스가 가주와 대면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일로 공사다망하실 텐데 그 와중에 이렇게 신경 쓰고 불러 주시다니, 마르코스 가주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한마디로 요약건대, 바쁠 텐데 왜 쓸데없이 불렀어. 라는 말이었다.

“최근에 바쁜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다니, 역시 세심하십니다. 카델리온 가주님께서 이리 찾아와 주시다니 그 기쁨을 다 말할 수 없군요.”

기쁨을 다 말할 수 없는 것은 기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그니까, 나도 바쁜데 너 부르기 싫었다는 비꼬는 말이었다.

“길을 개척하는 것 때문에 부르신 건 아니실 테고….”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그레이스 마르코스가 조약돌만 한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것도 있긴 합니다.”

예컨대 길을 개척하는 것 때문에만 부른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녀가 차 시중을 들던 시종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시종이 꾸벅 인사하더니 응접실에서 나갔다.

“시종을 내보내시다니, 무슨 일이십니까.”

그가 비뚜름하게 웃으며 물었다.

싸움이 나지 않기 위해 수장들끼리서 대화할 때는 의례적으로 응접실 안에 다른 시종이나 시녀를 들였다.

자주 싸우는 각 지역의 수장들이 싸울 기미가 있을 때 그들을 의식해서라도 싸우지 않기 위해 들인 것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시종을 내쫓는다는 것은 가문 사이에서 싸움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돌려서 예고하거나 매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할 때밖에 없었다. 그니까 그 ‘비밀’의 범주는 그들의 측근도 들으면 안 되는 것을 말한다.

시종이 나간 뒤, 그레이스 마르코스가 찻잔을 은근히 매만졌다.

밝은 달빛이 찻잔을 비췄다.

한참 동안 찻잔을 매만지던 그녀는 차를 한입에 모조리 다 입에 털어 버렸다. 그리곤 자신의 짙은 회색빛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뒤로 넘겼다.

“하….”

복잡한 생각이 담긴 한숨이었다. 그 한숨에는 앞에 있는 수인에게 어디까지 말을 전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안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빙글빙글 웃으면서 지켜봤다.

지금은 그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많은 것을 그에게 주어선 안 됐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어느 순간 동부가 북부의 손에 끌려다니는 것을 보게 될 테니까.

앞에 있는 비현실적인 외모에 묻혀서 그의 성격에 대한 소문이 나돌지 않는 것이지, 그레이스 마르코스는 이안 카델리온 성격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은 썩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수장들 중에 제일 까다로운 타입이라니까.’

차라리 세르디한 가주 같으면 같이 빙긋 웃으면서 내려까줄 텐데.

쯧, 생각을 이어 가던 그녀가 혀를 찼다.

“차 따르는 시종도 없이 여기 단둘이 남겨진 채 혀 차는 소리를 듣는 것은 너무 슬픈 것 같은데.”

평소보다는 기분이 좋은지 그가 웃으면서 존댓말까지 썼다.

그 말이 끝나자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씀드리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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