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앨런의 얼굴을 보니 밤이라도 샌 듯, 눈가가 거뭇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마차는 이안의 눈가와 비교될 정도로 좋아 보였다.
“아리엘.”
‘왜?’
“옛날에 그런 말이 있어. 호박에다가 페로몬을 사용하면 최고급 마차로 변한다는 말.”
신데렐라 동화랑 비슷한 얘기였다.
‘웃기지 마.’
아리엘이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진짠데? 날파리 요정이 이 마차를 바꿔놨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짜게 식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속이려면 좀 정성껏 속이지.
하지만 그렇다기엔 이안이 너무 진지한 표정이었다.
“진짜야.”
‘진짜?’
사람의 표정이 진지하면 믿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너무 진지한 그의 표정에 내가 그를 향해 솔깃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진짜야.”
‘이게 정말로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앞에 있는 말들이 빨리 가자는 듯이 푸르르하고 성질내는 것을 본 나는 다시 이안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앨런을 봤다.
‘아. 또 속았어.’
그리곤 나를 들고 있는 힘차게 이안의 명치를 뒷발로 가격하면서 도약했다. 이번에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그 진지한 표정에 속아 넘어갔다는 점에서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게 날아올라 문이 열려 있는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안정적으로 마차에 착지한 나는 그와 반대쪽으로 앉아 신경질적으로 꼬리를 탁탁 흔들었다.
“아리엘, 알고 보니 너 비둘기 종족의 숨겨진 막내딸이었던 거야??”
“하긴, 요즘 비둘기들이 하늘의 무법자들이죠.”
‘쟤네는 무슨 헛소리 하는 걸까.’
“용감하게 이안 님 가슴을 발로 걷어차는 모습을 보십시오. 본받아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비둘기가 분명하네.”
‘비둘기 같은 소리 하네….’
나는 마차에 누워 이안이 마차에 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햇빛이 따갑게 땅을 내리쬐고 있었다.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만으로도 지상은 후끈후끈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
“와, 여긴 정말 시원하네요.”
영애들이 희귀한 나무들과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찬 유리 온실에 어린 영애들부터 나이 든 귀부인들까지 감탄을 금치 못하며 들어왔다.
“셀레스틴 영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어머, 새로운 저택이군요. 색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이 너무 예쁘네요.”
“저는 특히 백색 꽃이 예쁜 것 같아요.”
셀레스틴은 그린 듯한 미소와 함께 유리 온실에 온 영애들을 적당히 응대하며 준비한 장소로 안내했다.
“저 꽃은 수선화라고 합니다. 꽃말은 고결함이에요. 보통 열두 번째 달에서 세 번째 달 즈음에 핀답니다.”
보통은 시종 시녀들이 장소를 안내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셀레스틴은 영애들과 귀부인들이 직접 꽃을 보고 알 수 있게끔 일일이 한 명 한 명 안내했다.
“어머, 셀레스틴 영애. 오늘도 아름다우시군요.”
“이렇게 친절하게 안내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오늘도 아름다우세요.”
당연히 파티의 초대자에게 좋은 말이 오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감사드려요. 메리체 영애도 꽃같이 아름다우세요.”
“셀레스틴 영애께 잘 보이려고 힘 좀 써 봤어요.”
핑크색 복실거리는 머리의 영애가 찡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그런 메리체 영애의 모습이 귀여운 듯 옆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작게 웃음소리를 흘린 사람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셀레스틴 영애가 얼마 동안 티 파티를 직접 주최하지 않은 것이…?”
“네. 이곳을 직접 꾸미기 위해서였답니다.”
당연히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의 유리 온실에서 그녀가 키운 품종은 키우기 쉬운 몇 종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원래 있던 저택의 뒤쪽이 카델리온에 의해서 다 박살 났다고는 어떻게 말할까.
그보다 한 발이 더 빨라서 다행이었지, 만약 늦었더라면 그곳에서 망가져 있는 것은 그녀의 고용인이나 저택이 아닌 그녀가 되었을 것이었다.
그녀의 말을 의심하는 것 같은 몇몇 귀부인들도 있지만 대개 계절이 바뀔 때 저택을 옮기는 일은 꽤나 흔한 일이니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꽃에 조예가 깊다고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직접 보니 대단하군요. 영애.”
“과찬이십니다. 아쉴라 부인.”
셀레스틴이 부끄러워하는 소녀처럼 볼을 붉혔다. 그러자 복숭아처럼 분홍빛이 도는 뺨이 그녀를 사랑스러운 소녀로 보이게 했다. 그녀가 시종을 향해 은밀히 눈짓하자 그것을 바라본 시종이 선물 상자와 꽃들을 가져왔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자신이 관심을 가졌던 꽃들과 선물 상자가 각자의 자리 위에 올려졌다.
각자의 자리 위에 올려진 꽃이 다를뿐더러 그것은 그들이 들어오면서 관심을 갖고 한 번 정도 물어봤던 꽃에, 귀부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꽃에 대해 물어보지 않은 손님들에겐 시선이 오래 머물렀던 꽃들이 선물과 함께 자리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런 그녀의 세심함에 그곳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호감 어린 표정들로 변했다.
계획대로였다. 호감이 있는 수인들을 많이 초대하되 그중 자신에게 별로 감정이 있지 않지만 사교계나 여러 가지로 영향력이 큰 수인들 몇몇을 같이 초대했다.
‘이대로만 가면 돼.’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이 초대한 손님들을 바라봤다. 다른 귀부인들의 눈에는 셀레스틴이 아쉴라 부인의 칭찬을 받아 수줍어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저택을 둘러보면서 각자 마음에 들어 하셨던 꽃이랑 선물을 준비했어요.”
“차향이 좋더라니, 에시파토스 찻잎이군요.”
“구하기 힘들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구하셨나요?”
몇몇 영애들은 흥분을 금치 못하고 셀레스틴에게 물었다. 부드러운 분위기라서 그런지 평소였다면 꾸중을 들을 수 있는 영애들의 이런 무례들은 부드럽게 넘어갔다.
셀레스틴이 은근히 찻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운이 좋게 발이 닿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애분들께 나누어 주고 싶었습니다. 차향이 정말 좋았거든요.”
귀부인들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아마, 그들은 셀레스틴에게서 새로운 쓸모를 보았을 것이다. 정확히는 시몬드 가문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겠지만, 이들을 연결할 다리 중 하나로 셀레스틴이 쓰일 확률은 굉장히 높았다.
“서부에서 나오는, 구하기 어렵다는 그 찻잎이군요.”
“아, 맞아요. 저도 그 찻잎을 구하고 싶었는데, 이리 챙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그녀를 의심하거나 적대적인 시선은 유리 온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아, 여름 축제가 곧 시작한다던데….”
“이번 연회는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네요.”
“아마 연회의 주인공은 셀레스틴 영애일 거예요!”
당연히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운명은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재수 없는 검은 덩어리한테 그 짓까지 했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감춘 셀레스틴이 난처한 표정을 지어냈다.
“하지만 연회에는 다른 훌륭한 분들도 많이 계시는걸요.”
그러자 셀레스틴을 칭찬한 어린 영애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도르륵 굴려 귀부인들의 눈치를 봤다. 그러자 아쉴라 부인이 눈치 빠르게 그런 분위기를 풀어냈다.
“괜찮아요. 저도 똑같이 생각한답니다. 셀레스틴 영애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만한 정말 훌륭한 영애예요.”
“저는….”
다른 귀부인이 불만을 표하려고 하는 찰나, 아쉴라 부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 수인의 말을 끊고 자신의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볼일이 생겨서 이번 축제는 참가하지 못할 것 같네요. 셀레스틴 영애의 모습이 기대됐는데 아쉽군요.”
이 파티에서 권력이 제일 높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 불만을 표하려고 했던 귀족들이 입을 다물었다.
“아, 그리고 곧 펠릭스 상단에서 경매를 주최한다고 하던데.”
아쉴라 부인은 능숙한 귀부인답게 대화 주제를 자연스럽게 바꿔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러자 약간 굳어져 있었던 분위기가 다시 온화하게 풀리자 셀레스틴이 입을 열었다.
“여태까지 이루어졌던 분위기랑 엄청 다른 분위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레이스 홀에서 개최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번 여름 축제 때 펠릭스를 낙찰받은 사람이 이번 연회의 꽃이 될 줄 알았는데. 여름 축제보다 늦어서 아쉽군요.”
누구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것이 짐짓 아쉽다는 듯한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걸 가지고 나오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선망의 눈길을 받게 될 거예요. 여태까지 펠릭스에 대한 관심은 그 무엇보다도 뜨거웠으니까.”
“모든 영애랑 영식들, 그리고 섬에 있는 다른 큰손들까지 갖고 싶어 하니 저도 누가 낙찰받을지 궁금하군요.”
그리고 소문만 무성한 펠릭스를 누가 낙찰받을지에 대해서는 모두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이번 축제에 초미의 관심을 끌 거라고 예상했던 펠릭스가 축제가 끝나고 공개되니… 연회에서 보고 싶었는데 참 아쉽네요”
“아, 이번 연회에서 영애들은 어떻게 입고 갈 예정이신가요? 저는 여름에 어울리는 하늘색 프릴 드레스를 새로 마련했답니다.”
셀레스틴이 혹시나 하는 어조로 그 영애를 향해 물었다.
“구름 같은 연하늘색이신가요?”
“네! 어떻게 아셨나요. 영애.”
그녀가 방긋 웃었다.
“귀여운 영애의 인상에는 그런 느낌의 색감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물어봤답니다.”
“저는….”
“저는….”
그러자 다들 축제 때 자신이 무엇을 입고 갈 건지부터 시작해서 운명적인 만남과 같은 쓸모없는 이야기들을 계속했다. 그렇게 셀레스틴 시몬드의 티 파티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
티 파티 손님들이 모두가 물러난 그 날 밤.
하늘에 별이 흩뿌려 있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어둠으로 조용한 방 안에선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만 잠시 들렸다.
셀레스틴은 자기 방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방이 2층인지라 바로 앞에 있는 나무와 함께 암흑에 물든 정원이 보였다.
그때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사랑스러운 내 딸, 아리테아.”
셀레스틴이 앉아 있는 곳으로 향한 시몬드 가주는 셀레스틴을 향해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 다정함 밑에는 자식을 도구로 생각하는 것이 깔려 있겠지.
역겨운 이물감이 목구멍 밑에서부터 올라왔다.
셀레스틴은 입꼬리를 해맑게 올리고 눈을 크게 뜬 채 시몬드 가주를 바라봤다.
“아리테아라뇨. 아빠. 아직은 셀레스틴인 걸요?”
“어차피 곧 이번 시대의 아리테아가 될 거잖니.”
시몬드 가주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는 무조건 이번 연회의 주인공이 될 거란다.”
“아니 연회의 주인공은 물론, 세상의 주인공까지 될 사람이야.”
셀레스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시몬드가 손에 들고 있던 주사기를 건넸다. 셀레스틴이 그 주사기를 받고 자신의 팔에 불길한 빛을 띠는 검푸른 액체가 담겨 있는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주사기를 꽂아 넣자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참곤 그녀는 꽃 같이 웃었다.
“제가 아니면 누가 되겠어요.”
누가 이 쓰레기 같은 역할을 맡을까.
“제가 아니면 누가 이 역할을 맡아서 할까요. 아리테아는 저뿐인데.”
그 천한 것의 기운까지 받아야 하니 이런 역겨운 역할을 다른 사람이 맡아서 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바라는 것을 위해서면야.’
이곳의 정점이 되기 위해서는 더 못 할 짓이 없었다.
어느덧 약물을 다 주입한 그녀가 주사기를 빼서 시몬드 가주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 주사기를 받은 시몬드 가주가 셀레스틴을 품에 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너뿐이지. 사랑스러운 내 딸. 아리테아. 너는 아리테아여야 한단다.”
예언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때 나뭇가지가 흔들렸다. 시몬드 가주가 나뭇가지로 시선을 옮겼다. 그것을 느낀 셀레스틴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녹스 히아트까지 약혼시켜 주신 거잖아요.”
사랑스러운 아버님.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영락없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옆으로 눈을 돌려 그 모습을 본 시몬드 가주는 나직하게 웃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몸은 좀 어떻니. 변화를 보이고 있니?”
“아니요. 그때 한 번 겪은 이후로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축 처진 채 말했다.
“그래. 괜찮단다. 내 딸아.”
시몬드 가주가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자 셀레스틴 시몬드의 눈빛이 일순 차게 식었으나 다정한 아버지인 양 그녀를 안고 있던 시몬드 가주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왜요? 혹시 문제가 있나요?”
“아니. 전혀 없단다. 그럼 이 아비는 가 볼게. 사랑스러운 내 딸.”
‘볼일이 다 끝났으니 가려고 하는 것이겠지.’
시몬드 가주가 그녀를 안고 있다가 놓아주자, 차가운 표정을 얼굴에서 거둔 그녀가 다시 꽃 같은 웃음을 걸쳤다.
“네. 아빠. 다음에 또 와주세요.”
“아빠가 오는 게 저는 너무 좋거든요!”
그걸 본 시몬드 가주는 나직하게 웃더니 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옅어지자 셀레스틴 시몬드가 뒤에 있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