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상단주라뇨?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으며 시치미를 뚝 뗐다. 펠릭스 상단주가 비안 웨스트라는 것을 밝힌 적이 없는데. 여기서 빠르게 맞는다고 인정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여태까지 비안 웨스트가 펠릭스 상단주인 것을 아는 사람은 딱 3명이었다.
클로에, 에티아 가주, 그리고 그 보좌관.
“만나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은데, 혹시 수인을 착각하신 거 아니신가요?”
소설 속에서도 윈닉타 길드장이 돈을 제외한 다른 것을 대가로 받는 것은 없던 일인데.
그리고 일단, 앞에 있는 쟤랑은 연을 잇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안 좋은 일에 휘말릴 것 같은 기분.
최대한 만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앞에 있는 수인이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년처럼 보여도 이리저리 구른 티가 났다. 같이 있으면 위험한 인물이었다. 나도 모르는 순간 저 손안에서 단물 다 뽑히고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안은 처음부터 얕볼 수 없는 인물이라면 쟤는 얕봤다가 눈뜨면 골로 가 있을 것 같은 인물이었다.
“아, 펠릭스 상단주님 아니십니까?”
“그 소문의 펠릭스 상단주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 입으로 저런 말을 하니 쪽팔려서 죽을 것 같았다.
이 정도까지 하면 알면서도 모른 척해 줄만 한데.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못 박듯이 나를 향해 말했다.
“네. 비안 웨스트 님. 소문의 펠릭스 상단주이신 비안 웨스트 님께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말에 나는 앞에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달칵 내려놨다.
입안에서 약간 씁쓸하지만 단맛이 은은히 맴돌았다.
“돈을 대신해서 무슨 대가를 원하시나요.”
“그레이트 홀에서 있을 경매에 저를 초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쯧, 정보가 거기까지 새어 나갔나. 나는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윈닉타가 괜히 윈닉타가 아니었다.
“불가능합니다.”
“왜죠?”
나는 이안을 떠올리며 다시 눈꼬리를 휘었다. 이안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네가 더 잘 알겠지. 그레이스 홀 초대장의 가치와 <작은 항아리>의 초대장의 가치가 같지 않다는 것을.
그러자 길드장이 눈꼬리를 초승달처럼 구부렸다.
“그러면 이건 어떠십니까.”
그가 책상 앞에 있는 동전 두 개를 예쁘게 쌓아 놨다.
“작은 항아리에서 무엇을 사든, 그 비용은 다 이쪽에서 지불하겠습니다. 다만,”
그가 나를 보며 위험하게 눈을 접었다. 나른한 은안이 휘어진 눈꼬리 안에 숨었다.
“이곳에 한 번 더 들러 주시죠.”
그러고는 그가 미소를 풀며 나를 응시했다.
나른한 은안과 눈 바로 밑에 있는 눈물점이 묘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어딘가 차가운 느낌이 났다. 사람 자체가 차가운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번 한 번을 끝으로 발걸음을 끊으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들은 나는 의아했다. 그렇게까지 나와 연을 만들고 싶은가.
‘작은 항아리 초대장에다가 어떤 걸 사도 비용을 대신 대주는 것과 그레이트 홀 초대권.’
작은 항아리 경매는 살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니 그가 한 제안은 이익이면 이익이 되었지, 적어도 손해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쪽이 손해일 텐데요.”
그러자 그가 소파에 기대앉았다.
“사람에 따라 시간의 가치는 천차만별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시간의 가격을 재단합니다. 때에 따라서는 어떤 사람의 시간은 천문학적인 금액이지요.”
책상에 놓인 작은 회중시계가 눈에 띄었다.
금도 은도 아닌 낡아 보이는 시계였다. 오래된 것 같은 회중시계가 뚜껑이 열린 채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저는 미리 미래의 당신의 시간을 사는 겁니다. 오히려 미래 당신의 시간을 생각하면 이 정도 돈은 푼돈이죠.”
뭐 그렇다면야.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더 할 말은 없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받아들일게요.”
“아 그리고 미래의 제가 바라는 바람을 한가지 이뤄 주실 수 있으신가요? 만약 그때 싫으시다면 거절하셔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네.”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빚진다는 느낌을 주어도 상관없겠지.’
무조건해야 하는 부탁도 아니니 상관없었다. 무리가 되지 않는 부탁이면 들어주고 들어주기 싫거나 어딘가 이상한 부탁이면 거절하면 되니까.
“초대장은 점장을 통해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직접 받고 싶으면 직접 받으셔도 상관없고요.”
“레시아 점장을 통해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레이트 홀 초대장은 어떻게 전달해 드릴까요?”
그 말에 나는 바로 답했다.
이곳에 오래 있다 보니 당이 떨어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그가 그런 나를 보더니 사르르 눈웃음 지었다. 웃고 있지만 웃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은 여전했다.
“저는 직접 받는 것이 더 좋지만 레시아 점장을 통해 전달해 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불시에 찾아오시는 것도 기분 좋은 만남이 될 것 같군요.”
기분이 좋긴 그도 피곤하고 나도 피곤할 것이 분명했다.
항상 웃고 있지만 그에게선 수인을 좋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수인 자체를 싫어하는 거면 모를까.
나도 이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진이 많이 빠지는 일이었다.
나는 카델리온 저택에 가자마자 누워서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들르고 싶을 때 들러 주세요. 레시아 점장에게 말해 놓을 테니 앞으로는 점장에게 말하면 번거로운 절차 없이 바로 올 수 있을 겁니다.”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가 나를 향해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윈닉타는 상단주님께 항상 열려 있답니다.”
앞에 있는 길드장이 무엇을 한 건지, 추운 기운이 갑자기 주위에서 발목부터 타고 올라왔다.
나는 한기를 맞으며 문득 이안 카델리온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호랑이 온기에 길들어졌나.
뒤에 있던 그가 문손잡이를 열고 문을 열었다.
“그럼, 안녕히 계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 호랑이한테 가면 별 해괴한 걸 시키면서 붙잡고 안 놔주겠지.’
생각해 보니 추워도 잠은 잘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저택에 가자마자 디저트고 뭐고 바로 잘 거다.
나는 한번 했던 다짐을 굳게 다시 새기며 손잡이를 돌렸다.
방에서 나간 뒤 내 귀를 손수건으로 다시 한번 닦은 건 물론이었다.
***
“으아아아.”
저택으로 돌아와 씻고 옷까지 갈아입은 나는 바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침대가 하찮은 내 몸뚱어리를 환영하듯 포근히 감쌌다. 매트리스가 엄청 발전했었던 전생과 비교해 봐도 카델리온 저택의 침대는 유달리 포근했다.
‘예전에 봤었던 그 피투성이 백호 때문이겠지만.’
이안이 백호인 상태로 피투성이였었던 그 모습이 눈에 훤했다. 도대체 무슨 과거사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꼴로 혼자 있는 게 익숙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선대 가주 부부도 안 보이고.’
여태까지 이 저택에서 지내면서 이안의 부모님을 본 기억이 없었다.
책에서는 이안이 가주가 되자 카델리온을 싹 다 뒤집어엎었다고 해서 그런가. 근데 그 뒤집어엎은 부분이 부패하거나 중간에 돈 빼먹은 수인들을 엎은 게 아니었나.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선대 가주 부부가 죽었다던가 그런 이야기는 없었는데.’
선대 가주 부부에 대한 이야기는 책에 일절 나와 있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까 남주인공의 부모님이라는 위치 정도면 조연으로라도 나올 만하지 않나.
‘무슨 복잡한 가정사가 있나.’
나는 드넓은 침대에서 설탕을 묻히고 있는 핫도그라도 된 듯 대굴대굴 굴렀다. 윈닉타 길드장을 만나고 바로 직전에는 침대에 눕자마자 쓰러져서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침대에 누우니까 잡생각들로 가득 차 잠이 오지 않았다.
‘서재나 갈까.’
베개를 안고 침대를 몇 바퀴 뒹굴거리던 나는 침대 이불을 탁탁 정리하고 베개를 원래 자리에 던졌다. 내가 안고 있었던 베개가 퍽, 하는 반가운 소리를 내며 다른 베개 친구들과 조우하는 것까지 본 나는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도서관 문을 열자 앞으로 넘어질 뻔한 것을 나는 허둥지둥 대며 발을 움직였다. 발을 여러 번 움직이자 몇 번 휘청이던 몸이 균형을 바로 잡았다. 그 꼴이 신나는 음악에 맞춰서 탭댄스를 추는 것 같이 보였다.
그래도 이 도서관에는 다른 수인들이 잘 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누가 봤다면 이불 킥 일주일 감이었다. 이안이랑 앨런이 있었다면 또 두고두고 놀려먹었겠지.
“아리엘, 그 현란한 발놀림은 뭐야?”
그리곤 제발 여기 없었으면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커스 데뷔를 준비하시나 봅니다.”
얼마 전에 월급을 받은 앨런이 안경을 바꾼 듯, 그의 안경이 네모난 직사각형 안경에서 외알 안경으로 바뀌었다. 이러나저러나 학자 같은 외모는 그대로였다.
일반인이라면 소화하기 어렵다는 직사각형 안경과 외알 안경 두 개를 다 잘 소화해 내는 것을 보니, 문뜩 앨런도 꽤 수려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연극이나 음악계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시는 걸까요.”
물론 그 잡생각은 지금 앨런이 하는 행동 때문에 와장창 깨졌지만.
새로운 외알 안경을 낀 앨런이 아까의 내 행동을 절도 있는 자신의 동작으로 만들어 따라 했다. 심지어 완성도도 꽤 높았다.
맨날 집무실에 박혀서 일만 했던 쟤네가 여기는 왜 왔을까. 타오르는 수치심에 얼굴이 빨개진 나는 앞에 있는 그들을 무시하고 책장 사이로 들어가 책을 찾기 시작했다.
‘약초학이랑 건축에 대한 거 하나 챙겨야지.’
나는 재빨리 책을 찾고 볕이 잘 드는 구석진 곳을 찾아 책을 폈다. 호랑이들은 제 할 일을 하러 갔는지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다는 둥 뭐 한다는 둥 하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고양이인 상태로 읽을까.’
나른하게 볕을 쬐니 느낌이 참 좋았다.
“아리엘, 근데 오늘 어디 갔다 왔어?”
‘아직 안 갔던 거였어…?’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분명 웃고는 있는데 그 눈웃음이 유달리 서늘하게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나는 눈동자를 위쪽으로 굴려 쳐다봤다. 그러다 이안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와 눈이 마주친 나는 눈동자를 아래로 굴리면서 나한테 무슨 냄새가 나는지 맡았다.
‘샤워하고 머리 감고 다 씻었는데. 오늘 마리랑 레아가 유독 열심히 벅벅 씻겨 줬는데.’
암만 냄새를 맡아 봐도 비누 향기밖에 나지 않았다.
“카페 갔는데.”
나는 그를 다시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리고라니?”
“그리고 또 어디 갔어?”
그러자 그가 오늘은 끝까지 물어보려고 하는지 연신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하지만 여기서 윈닉타 상단주랑 만났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고양이로 변하자.’
대답하기 껄끄러웠던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페로몬을 운용했다. 내 심장 깊숙이 숨어 있던 기운이 나를 감싼다는 느낌으로 기운을 밖으로 뺐다. 그랬더니 사람 외형이 변할 때랑은 다른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이 내 몸을 감쌌다.
“아리엘?”
이안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 나를 불렀다.
‘이미 늦었어.’
이러다가 동상 걸려서 죽는 게 아닌가 싶었을 때, 내 몸이 고양이로 변했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내 발바닥 젤리를 바라보며 양 앞발을 탁탁 털었다. 인간이었을 때는 작아 보였던 사물들이 이상한 나라에 온 듯, 모든 것이 거대해 보였다.
‘아. 추워.’
오랜만에 페로몬을 꺼내 써서 그런지 익숙해져 있던 추위가 다시 나에게 엄습했다.
나는 적응되지 않는 시야에 고개를 휘휘 돌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곤 이안을 향해 다가가 능청스럽게 울었다.
“미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