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65/111)

64.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열린 아치형 문은 내가 들어서자마자 빠르게 닫혔다.

누가 일부러 닫은 듯한 달칵 소리와 함께 앞에 있는 길드장과 내가 혼자 방에 남겨졌다.

방안은 아늑한 별장 안 같은 느낌이었다. 체스나 카드를 비롯한 각가지 보드게임 같은 것들이 한구석에 자리했고, 책이 꽉 채워진 꽤 많은 책장이 벽에 자리하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키가 큰 성인 남자가 눕더라도 공간이 남을 법한 커다란 소파 두 개가 나무로 된 책상을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오랜만의 손님이시네요.”

그리고 그곳에 앉아 있는 남자는 자기 앞에 앉으라는 듯, 책상 하나를 끼고 마주 보는 소파를 가리켰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소파에 앉아 그를 바라봤다.

“정확히 말하면 제 첫 손님이십니다.”

그가 얼굴에 약은 미소를 띠우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처음 마주한 첫인상은 ‘절대 엮이고 싶지 않다.’ 였다.

웃고 있지만 온갖 위험한 분위기가 그에게서 새어 나왔다.

정보 길드장이 이렇게 생겼었던가. 나는 소설 속에서의 그의 모습을 곰곰이 되짚어 봤다. 암만 되짚어 봐도 소설 속에선 그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단 한 줄도 없었다.

소설 속에서 그는 단지 돈을 받은 만큼 값을 했던 정보 상인으로 나와 있을 뿐이었다.

물론 여주인공에게는 단골손님 특전인지 그쪽이 돈을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해 주었지만.

하지만 실제로 보니 소설 속에서 그의 외모에 대한 언급이 왜 없었나 의아할 정도로 잘생겼다. 회색 머리칼에다가 은색 눈동자가 그의 눈웃음에 가려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뺨은 못 해도 이안의 가슴을 치는 것을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잘생겼다.

그와 내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

“헤스 울티오입니다.”

물론 그것도 가명일 테지만.

하지만 나는 그가 자기소개를 한다는 점에서 내심 깜짝 놀랐다. 소설 속에서는 이름조차 알려 주지 않던데. 소설 속에서 그는 신비주의 그 자체였다.

이름부터 시작해서 출신, 배경까지 책에서는 아무것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니까 그 말은 그런 그가 그런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심지어 단골손님이었던 여주에게도.

“네. 근데 첫 손님이라뇨?”

‘찾아오고 싶어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몇 달은 기다려야 하는 곳 아닌가.’

나는 아까 그가 나에게 한 말을 머릿속에서 더듬었다. 분명 <윈닉타>는 제일 큰 정보 길드였는데 손님이 한 명도 없을 리가 없었다. 의뢰하고 싶은 사람들이 미어터진다면 모를까.

“아아. 의뢰인이 아닌 손님으로는 영애가 처음이십니다.”

그러자 방금까지 약은 미소를 짓고 있던 길드장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휘어진 눈꼬리와 옆에 있는 눈물점이 그를 색스럽게 보이게 했다. 보통 사람들이었으면 그 모습에 홀려 멍하니 있을 듯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은안으로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더더욱 지울 수 없었다. 정확히는 내 생존 본능이 그를 향한 경계를 높였다.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나를 본 그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이내 설명을 하고자 입을 열었다.

“의뢰인과 손님은 다릅니다. 의뢰인은 통상적으로 통하는 저희 길드에 오는 법에 따라 방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의뢰자가 어떤 분인지에 따라 저와 그 의뢰인이 만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죠.”

‘뭔가 앨런 같은 느낌이네.’

중요한 내용인 느낌이 나는 것을 가볍게 설명하는 게 앨런이랑 비슷했다. 좀 더 자세하게 비유하자면 위험한 느낌이 추가된 앨런 같았다. 물론 외모는 아예 달랐지만.

앨런은 학자 같은 느낌이라면 앞에 있는 길드장은 뭔가…

그가 금화 하나를 엄지손가락으로 툭 치면서 높이 던지자 금화가 책상에 땡그르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니까, 자기는 신분 높고 돈 많은 사람들만 만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손님은 제가 정해 놓은 암호를 통해 오신 분들을 뜻합니다. 물론 알려지지도 않았지만요. 그래서 영애께 손님이라고 한 겁니다.”

애초에 이걸 통해 오라고 만든 것도 아니지만요.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도대체 오라고 만든 게 아니면 왜 만든 건데. 나는 살짝 어이없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것을 바라본 그가 나를 향해 야살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영애께서는 어떻게 이곳에 오셨나요?”

나른한 은안이 나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같이 냉혹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며 나는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 하나하나 생각했다.

사실, 여기를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엄청, 엄청나게 운이 좋아서, 라고 할 수 있다. 정신 빠지게 검을 휘둘렀던 그 날에 슈엘라가 오기로 길드장을 만난 장면이 생각났으니까.

물론, 원작이 완벽하게 기억난 것은 아니었다.

기억난 것은,

『“무엇을 시키겠습니까, 손님.”

“과거의 달 한 잔이요.”』

<레시아>에서 그녀가 시켰던 음료의 종류와 그녀가 그 카페에 가서 커피를 엎었던 서술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억을 떠올린 다음 날, 나는 바로 <레시아>에 찾아갔다.

슈엘라가 했던 행동을 복기하며 메뉴판 가장 아랫부분 개미만 한 글씨로 나와 있는 음료를 시키자 종업원은 알겠다고 하며 메뉴판을 가지고 나갔다. 누가 보면 없어진 메뉴인가 하는 정도로 조그마했다. 애초에 저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도 없을 것 같았지만.

메뉴판을 가지고 간 종업원을 본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빠졌다.

‘원작에서 나왔던 곳이 여기였을 줄이야.’

레모네이드가 맛있어서 종종 방문하던 레시아가 윈닉타와 연결된 곳인지 몰랐다. 애초에 기억을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여기에 ‘과거의 달’이라는 음료가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슈엘라가 술을 엎으면서 종업원한테 달이랑 그림자 어쩌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녀가 다가온 종업원에게 말한 한마디였는데. 문제는 그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가 지운 듯이 흐릿했다.

‘애초에 책 한 권을 다 기억하는 것이 미친 거야.’

아무리 여러 번 읽은 책이라지만 책에 나와 있는 모든 걸 기억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게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메뉴를 받아 간 종업원이 아닌 다른 직원이 음료를 가져다줬다. 옷이 다른 직원들과 미묘하게 다른 것을 보니 이 가게의 점장인 듯싶었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점장이 내 테이블에 음료를 내려놨다.

과거의 달은 다른 음료들과 달랐다. 투명하고 까만 원형의 구 같이 생긴 컵 안에 하얀색 음료가 채워져 있었다. 거의 원 모양이라서 입구가 좁아서 그런지 빨대가 꽂혀 있는 상태로 나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지 길드장을 만날 수 있지.

빨대를 뺀 채로 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봤다. 원작이 생각이 안 나니 이제 기억이 나는 걸로 짜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슈엘라는 그림자와 달 어쩌구라고 했었어.’

그림자와 달. 그리고 둥근 까만색 잔과 하얀색 음료.

‘이걸 엎으면?’

나는 그 순간 테이블에 있는 잔을 엎질렀다. 그러자 그 지점장이 음료를 치우기 위해 내 테이블로 다가왔다.

하얀색 구 같았던 잔에서 하얀 부분이 사라지자 검은 부분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 모습이 마치….

“달이 그림자에 먹혀들어 가고 있네요.”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말을 중얼거렸다.

달이 그림자에 먹히는 것 같았다.

테이블에 음료가 흘러내리는 것과 잔이 비워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내가 다가온 지점장에게 말했다.

어느 누가 이 음료와 잔을 달과 그림자로 비유하겠느냐마는. 애초에 이 음료가 존재하는 걸 눈치채고 시키는 것부터가 정상이 아니었다.

‘틀리면 그냥 뻔뻔하게 다른 음료 시켜서 다 마시고 가야지.’

아니면 과거의 달을 다시 시켜서 마실까. 어떤 맛인지 궁금했는데.

내 말을 들은 지점장은 빙긋 웃더니 나에게 자기 손수건을 주었다.

“자리가 더럽혀졌으니 다른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손님.”

빙고.

오. 정답인가 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그를 따라갔다.

그렇게 점장은 나를 귀빈실 같은 곳들 중 하나의 방으로 데려가더니 자연스럽게 그곳에 꽂혀 있는 몇 개의 책을 빼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스르륵 소리가 나면서 책장이 열리더니 내려가는 까마득한 계단이 나왔다.

‘무슨 지하에 이렇게 넓은 곳이 다 있지.’

한참을 내려갔다가 올라갔다가 이리저리 꺾어서 직진하다 보면 녹슨 아치문이 하나 나온다. 그리고 그 아치문을 열어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마디로 반은 도박이었던 거지.’

“음….”

거기까지 떠올린 나는 앞에 있는 마스터를 보며 뭐라고 말할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눈웃음에 가려져 있는 번뜩이는 눈동자를 마주치며 말했다.

“운과 기연의 합작이었죠.”

“운과 기연의 합작이란 말씀이신가요?”

괜히 윈닉타의 마스터가 아닌지, 소년이 야살스럽게 웃는데 순간 목덜미를 내놓은 초식 동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안이랑 많이 붙어 있어서인지, 그런 눈빛에 내공이 쌓여 침착하게 넘길 수 있었다.

나는 앨런이 이안에게 하는 행동을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단지 밑에 있는 조그마한 글씨를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었고, 실수로 음료를 엎질렀는데 우연찮게도 그 모습이 그림자에 먹히는 달빛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진실이 섞인 거짓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만 말하면 알아서 잘 알아듣지 않을까.

‘어쨌든 쟤를 만나러 왔다는 것은 잘 전달됐겠지.’

앞에 있는 사람에게 사실 여기가 소설 속이고 거기에서 이 방법으로 너랑 만난 사람이 있는데 그 부분이 단편적으로 기억이 나서 찾아왔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이 정도로도 충분한지 그가 말을 돌렸다.

“네. 그럼 저에게 찾아오신 용건은 무엇입니까? 영애.”

나는 머릿속에 생각해 둔 내용을 꺼냈다.

“<작은 항아리> 초대권을 얻고 싶어서.”

소설에서 이 사람을 찾아왔던, 슈엘라, 그 사람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꼭 필요했다.

“영애분, <작은 항아리>의 물건을 사는 초대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이안의 그 예의 재수 없는 웃음을 떠올리며 웃었다. 앨런이 헛소리를 했을 때 사자 소리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담긴 것 같은 웃음.

“하하하.”

그러자 뭐가 그리 웃긴지 그가 소리 내며 웃었다. 아까까지의 미소는 적대하는 빛이 섞인 아슬아슬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약간의 재미있다는 느낌이 섞인 나름 호의적인 분위기였다.

‘어디가 호감 포인트였던 거지.’

나는 어리둥절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채 그가 웃음을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그는 눈꼬리를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그리고 이제껏 목소리와 다른 흥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작은 항아리>의 안쪽으로 갈 수 있는 입장권 중 가장 좋은 것을 구해다 드리죠,”

그가 허공에서 동전을 튕겼다.

“원래라면 모든 의뢰는 돈으로 받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하늘로 떠오른 금화가 그의 엄지손가락에 다시 안착했다.

“이번 의뢰는 돈 대신 다른 것으로 대신해도 될까요? 상단주님.”

그가 야살스레 웃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