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 (64/111)

63.

앨런이 뒤의 의자에 슬며시 몸을 기댔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왜.”

“보고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앨런이 의아한 낯을 하자 이안이 무심하게 말했다.

“아직 안 봤어.”

윽, 안 보여.

내 시야를 가리는 종이에 나는 종이를 살짝 올리곤 떨어뜨린 책을 다시 주워 다음 문장을 읽었다.

『…그렇게 작은 종족 간 다툼은 다른 가문의 개입으로 인해 유례없을 큰 전쟁으로 번졌다.』

‘…읽기 싫다.’

나는 멍하니 앞만 보고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이안의 손길을 느꼈다.

‘내가 네 개냐.’

그가 내 머리를 강아지 털을 헤집듯이 막 헤집어 놓았다.

앨런은 나를 쳐다보더니 ‘이런, 실타래들의 왕이 되셨군요. 제가 본 실타래들 중 가장 거대합니다.’라고 하며,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돌아온 카온 가의 영식이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서 이제 이렇게 살 순 없다며 혼자서 중얼거린다고 합니다. 그것도 텅 빈 눈으로.”

내용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줄을 따라 내려가고 있던 내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는 어떨 때는 갑자기 죄송하다고 그만해 달라며 울먹이면서 발작하기도 하고요.”

“그래?”

그 말이 끝나자, 내 폭탄 맞은 머리칼을 이안이 다시 하나하나 예쁘게 정리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맨날 이렇게 흩트려놓고 다시 정리하는 거면 왜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걸까.’

사그락사그락, 부드러운 손길에 폭탄 테러라도 당한 것 같던 머리칼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그거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함도 없지 않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누구도 원치 않았던 개입이었다.』

그 문장을 마지막으로 내가 책을 덮었다. 라면 받침대에나 쓸 법한 내 책을 아리엘에게서 가져가 바닥에 내려놓은 이안이 앨런에게 물었다.

“아리엘은 데리고 갈 수 있대?”

“가능할 겁니다. 그쪽에서 부탁하는 입장이니까요. 대신 아리엘 님은 수인으로 가는 것보다는 동물로 가야 할 듯싶습니다.”

“아리엘 님께서 사람인 상태로 가시면 이안 님이…….”

“그건 상관이 없는데.”

“아니, 아리엘 님을 노리시는 분들이 있으셔서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쟤가 나를 왜 데려가지.’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이안을 올려다봤다.

“아리엘을 다른 데 내보이는 게 싫긴 한데….”

하지만 그는 뜻 모를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내 머리를 어느새 가지런한 원래의 머리칼로 돌려놓은 그는 뱅뱅 손가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아리엘, 갈 거야? 싫다면 안 가도 돼.”

“아니요. 같이 가 준다면 감사하죠. 당연히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면 <작은 항아리>에 참석하기도 쉽겠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맞잡고 머리칼에서 떼어 놨다.

그가 순순히 머리를 내려놓는가 했더니 곧이어 손을 맞잡곤 낭창 예쁘게 눈을 휘었다.

“너에게서 떨어져 있으면 더워.”

애정 결핍이야?

차오르는 말을 내뱉지 않은 채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마주 보고 생글생글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쟤는 나를 쿨 팩과 동물 인형 그사이 어딘가로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

어둑한 방 안, 검은 로브를 쓴 거대한 장정이 소파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사람이 천천히 눈을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느슨하게 묶고 있는 회색 머리와 전체적으로 얇은 몸의 선은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소파에 누워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을 익숙하게 바라보는 그는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있는 듯이 보였다.

그가 고개를 까딱이자 무릎을 꿇고 있던 수인이 일어났다.

“이번 <작은 항아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작은 항아리>는 윈닉타가 주관하는 거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앞에 있는 윈닉타의 마스터가 만들어 낸 뒷세계 길드들 중 하나가 개최하는 행사였다.

묵묵히 서 있는 그의 앞에 느른히 기대 누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소년이 자기 앞에 있는 각설탕을 집어 책상 위에 쌓아 올렸다.

투명해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가 유독 눈에 도드라졌다.

앞에 있는 수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각설탕을 다섯 개까지 쌓은 그는 맨 밑에 있는 각설탕을 손가락으로 툭 하고 쳤다.

그러자 높이 쌓여 있던 각설탕들이 맥없이 와르르 무너졌다. 무너지는 각설탕들을 바라본 소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글쎄. 그냥 하지 말까?”

아이들이 자기가 쌓은 블록을 무너뜨리듯이 툭하면 정말로 다 엎어버릴 것 같은 말투.

장난하듯 가벼운 말투였다.

“그것을 원하신다면. 마스터의 뜻대로.”

<윈닉타>를 여기까지 이끌어 낸 소년.

이렇게 보여도 눈앞에 있는 소년은 뒷세계를 거의 장악한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모든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제일 무서운 점이었다.

항상 장난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땐 소름 끼칠 정도로 이해타산적이었다.

무수히 많은 길드가 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사라졌다.

“그냥 계속해.”

어차피 경매 준비는 다 끝났다.

초대자 목록을 작성하는 것 빼고는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경매를 계속 진행하거나 앞으로의 일을 전부 엎어버리거나, 둘 다 똑같은 일이었다.

결국 이 모든 목적은 하나로 귀결되니까.

“비안 웨스트가 누구인지는 알아봤어?”

“펠릭스 상단주 말입니까?”

그가 앳된 미소를 지었다. 나른한 은안에 일순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예.”

목을 옥죄어 오는 공기를 뚫고 힘겹게 대답을 마친 수하가 입을 열었다. 방금의 일 때문인지 담담한 목소리에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평범한 가정이었지만 어머니, 아버지는 모두 돌아가셨고 무남독녀.”

잠시 뜸을 들이던 수하가 말을 이었다.

“라는 이야기가 담긴 가짜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짜 신분을 만들어주는 곳에서 ‘비안 웨스트’라는 이름을 들고 가 새로운 신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디서 만들었는데?”

“뒷골목 가장 앞쪽에 있는 꽃집입니다.”

꽃을 파는 동시에 가명과 가짜 신분을 만들어 주는 곳.

꽃집이 있는 곳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에서 조금 떨어졌을 뿐이지 뒷골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종종 같은 이름으로 다른 신분을 만드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실제 이름인지 가명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소년의 긴 속눈썹이 너울거렸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거주지 및 동선 등을 더 알아보려고 했으나 알아보는 도중 행적을 놓쳤고, 그녀를 아는 사람은 부단주 한 명뿐었습니다.”

“펠릭스 부단주?”

“네.”

“흐음. 추적 중에 행적이 끊기고 아는 사람도 없다, 라….”

어떻게 된 것일까.

그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분명 얼마 전에 펠릭스 상단주와 에티아 가주가 만났었는데.’

펠릭스 상단주와 에티아 가주가 만날 때 이상했던 점이라면 저택 앞에 집사가 아닌 보좌관이 나와 있던 점밖에 없었다.

‘그걸 보니 에티아 가주가 펠릭스 상단주를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고.’

도대체 왜 에티아 가주가 관심을 보이는 거지.

갈색 머리칼에 고동색 눈. 흔하게 생긴 소녀였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한두 명쯤 마주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상단주께는 왜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펠릭스보다도 더 큰 상단이나 길드에는 관심조차 안 가지시지 않습니까.”

그 말을 내뱉은 수하가 아차 한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아무 위협도 가하지 않은 그가 순순히 고개를 돌렸다.

“흥미롭잖아.”

일순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 옆으로 무언가 번뜩이며 지나갔다. 팍, 내리꽂히는 소리와 함께 가만히 서 있던 남자의 뺨에서 핏방울이 맺혀 흘렀다.

누워 있던 소년이 처음으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여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내가 말했지. 많은 걸 궁금해하면 미래가 힘들어진다고.”

“정보 길드에서 일하는 사람의 미덕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거든.”

위험한 분위기가 앞에 있는 사람을 내리눌렀다.

“네가 쓸모도 없는 다른 머저리들보다 괜찮다고 해서 네가 특별한 줄 알면 오만인 거야. 알았어?”

수하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유념, 하겠습니다.”

가까스로 낸 목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대답을 들은 그가 싱긋 웃으면서 앞에 있는 사람에게서부터 떨어졌다.

털썩 소파에 소년이 앉자마자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마스터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앞에 있던 수하가 몸을 숙이곤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걸 확인한 그가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

그러자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동색 머리에 고동색 눈.

그리고 정말 길을 지가다가 한 번씩은 마주칠 법한 흔한 외모.

이곳을 찾아온 손님은 그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앞에 있던 사람이 자신의 머리 색깔과 똑같은 후드를 내렸다.

“안녕하세요. 비안 웨스트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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